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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정신을 잃어 버린 기자의 말로

박소현(방송작가)

 

용인신문 | 학창 시절 뉴스에 나오는 기자를 보면서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위험할 수도 있는 현장에서 생생한 뉴스를 전하기 위해 전쟁터도 마다하지 않던 그녀의 모습은 내게 기자를 꿈꾸게 했다.

 

대단한 인물들 앞에서도 결코 주눅이 든 기색없이 당당하게 질문을 하던 그녀의 매력은 여고생이던 내게 끝까지 보기 힘들던 뉴스를 끝날 때까지 보게 만들었다. 그녀 덕분에 뉴스를 기다렸다 보게 되었고 기자가 될 수 있는 학과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누군가의 꿈이 될 만큼 멋진 모습의 방송 기자였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대학생이던 내게 시사 프로그램 현장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혹시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결국 만나지는 못했다. 그날 내가 참여했던 프로그램은 일제시대 강제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가 방송을 통해 자신이 겪었던 일을 증언하는 시간이었다. 할머니로서는 가족들에게도 숨겼던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던 순간이었다. 국민들에게 그 방송은 나라를 빼앗긴 아픈 역사 속에 참혹했던 민족의 삶을 적나라게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동경했던 기자를 만나고 싶었던 목적은 어느새 희미해졌고 기억조차 하기 싫은 과거를 끄집어내야 했던 그 할머니의 처절한 표정이 한동안 내내 잊혀지지 않았다.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뼈아픈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게 했고 강제 위안부로 끌려가 처참하게 짓밟혔던 어린 소녀의 삶을 할머니의 표정은 처절하게 절규하고 있었다. 방송이 끝나고 스튜디오의 불이 꺼지기 시작했지만 할머니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녀를 동경하며 꿈꾸던 기자는 되지 못했다. 그래도 그녀 덕분에 정치에 매우 관심이 많은 국민의 한사람으로 살고 있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세상은 변화를 받아들이며 요동치기도 하고 잠잠해지기도 한다. 사람이 하는 정치가 완벽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바뀌고 세상은 변해도 결코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역사의 진실이다. 나라를 빼앗겼던 민족은 언어를 잃었고 가치관을 강요당해야 했다. 그것을 거부하며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고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최선의 타협을 했다.

 

가끔 내가 그 시대에 유관순 열사처럼 여고생이었다면 나는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칠 수 있었을까, 만약 강제 위안부로 끌려갔다면 그 비참한 삶을 감당해낼 수 있었을까.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할 정도로 잔인하고 비참했던 그 시대를 살아냈던 민족은 마침내 다시 나라를 되찾았고 그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잔혹하고 참담했던 시대를 저항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다 알 수 없어도 그분들의 정신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지는 말아야 한다.

 

목숨을 위협받는 극한 상황에서 모두가 독립운동가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피치 못할 이유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친일파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는 양심은 필요하지 않을까?

 

최근 내게 기자를 꿈꾸게 했던 그녀를 TV에서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국민들 앞에서 역사에 대한 진실을 거부하고 있었다. 역사를 왜곡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변하게 했을까? 전쟁터에서 두려움 없이 용감하던 기자가 비겁한 모습으로 그곳에 앉아있었다.

 

기자로서의 시작이 누군가의 꿈이 될 만큼 멋있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내가 꿈꾸던 그 모습이 아니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삶이 기자를 시작했을 때처럼 멋있게 끝나기를 기대하고 싶다.

 

그런데 지금 TV속 그녀를 보면서 그 기대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