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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만 29년 한달, 그림으로 담아 낸 역사

용인신문 ‘용인만평’을 끝내며 _ 윤기헌(화백·부산대 교수)

2022년 1월 1일 자. 2022년 지방선거가 있었다. 늘 그렇지만 뽑고 나서 끊임없이 공공의 영역은 견제하고 감시해야 한다. 

 

1995년 11월 30일자 부터 ‘만평’ 그려
이제 그만 펜을 놓으니 ‘시원섭섭’ 교차
강산 세 번 바뀌도록 고향 신문과 동행

 

용인신문 |  용인신문 김종경 발행인 겸 대표에게 “이제 그만 펜을 놓아야겠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시원섭섭. 그 단어가 가장 적절하다 싶었다. 세상에는 ‘재능’과 ‘성실’ 두 가지가 있다. 나는 재능은 없되 초중고등학교 개근을 한 걸 보면 어느 정도 성실은 했던 것 같다. 

 

용인신문 만화를 위해 유학 때도, 출장 때도, 거른 적이 거의 없다. 그리고 사실 만화를 접은 지도 20여 년이 다되어 간다. 일찌감치 작가로의 미련을 접고 교육과 연구로 방향을 틀었다. 고향 봉사 또는 인간관계라는 인연으로 용인신문에 대단치 않은 재주를 선보인 것뿐이다.

 

아무튼, 그동안 연재한 기간을 따져보니 정확하게 29년 하고도 한 달이다. 강산이 세 번 변할 시간이다. 탄핵이다 해서 시사(時事)는 인기를 끌 수 있지만, 시사만화는 더 이상 신문의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않은 데다 옛날 사람과 오래된 스타일도 이제 적절하게 물러나는 게 맞다. 그래서 연재를 끝내려 한다. 

 

# 고향이라는 매개체
토박이들은 공감하겠지만 용인(龍仁)이라는 고장은 사실 크게 도드라지는 동네는 아니었다. 기호지방(畿湖地方)이 근대 시기까지 지금의 TK처럼 정치적 자산이 많았다지만 용인은 친일파들을 제외하고는 딱히 큰 인물도 없다. 예로부터 서울로 가는 길목일 뿐 숯이나 인삼과 쌀도 유명하기엔 좀 모호해서 다른 고을처럼 명품, 특산물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는 달갑지 않은 ‘묘지와 명당’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였다. 

 

첫 만화는 1995년 11월 30일 자 용인신문의 전신<성산신문>이다. 당시 군수가 관사를 개조하는 것을 태국의 청백리 잠롱이 안타깝다고 평하는 내용이다. 지역일간지 화백이었던 나는 고향 후배이자 성산신문 기자 김종경의 청을 받고 고향 신문에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간지 미술기자였으므로 한동안 이돌이라는 필명으로 그림을 보냈다. 

 

에버랜드(자연농원)와 민속촌 말고도 70년대 고속도로가 가로 세로로 놓이고 서울 공장들이 내려오면서 용인은 그때부터 용인이 아니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투기 바람이 온 지역민들을 들뜨게 했다. 당연히 인심은 사나워졌다. 사실 태풍, 수해, 가뭄도 비껴갈 정도로 적당히 논과 밭을 부쳐 먹고살 만한 땅이라서 용인사람들은 대체로 유순하고 크게 평판이 어긋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그런 용인에서 초중고교를 나왔다. 공부를 못하는 것도 특별하게 잘하는 것도 아닌 평범, 그 자체 시골 소년이었다. 용인을 일주일 넘게 떠나 본 적도 없는 촌사람이었다. 그러나 역마살이 찾아오는 바람에 운명의 수레바퀴에 떠밀려 40여 년간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며 살고 있다. 

 

# 만화, 내 영혼의 종착역
만화는 내 본질과도 같다. 오타쿠라는 말도 생기기 전부터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만화에 탐닉했다. 만화방도 있겠지만 읍내를 나가야 해서 아마도 눈을 뜬 계기는 동네 허름한 이발소에서 자주 봤던 신문 쪼가리였다. 네 칸 만화, 만평이 재미있었다. 신문을 좋아해서 덕분에 한자 실력도 남보다 빨랐다. 그리고 대개 당시 아이들이 그러하듯 잡지 <소년중앙>을 돌려 보며 만화가의 꿈을 꾸었다. 그 이후로 50년간 한길만 걸었다. 그러니 어릴 적 책 한 권, 신문 하나가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초등학교에서는 책과 노트에 낙서로 도배를 해서 불시 검사 때 혼난 적도 있다. 친구들에게는 마징가를 그려주는 화가 노릇도 했다. 워낙 만화에 미쳐 사니까 중학교 때는 만화 마니아 답게 수준급 레벨은 되어 만화를 골라 읽을 수준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조용하고 소심한 극 I 타잎인 내가 선생과 동료를 설득해 직접 게시판에 매주 학급 이야기를 만화로 연재하기도 했다. 

 

첫 만화는 1995년 11월 30일 자 용인신문의 전신<성산신문>이다. 
당시 군수가 관사를 개조하는 것을 태국의 청백리 잠롱이 안타깝
다고 평하는 내용이다. 지역일간지 화백이었던 나는 고향 후배이
자 성산신문 기자 김종경의 청을 받고 고향 신문에 만화를 연재하
기 시작했다. 당시 이돌이라는 필명으로 그림을 보냈다.

 

2006년 12월 11일 자, 2007년 대통령 선거 때도 정치인들의 이합
집산은 여느 때와 같다. 용인의 정치는 어찌 보면 무색무취 영혼
이 없어 보인다.


# 시사만화의 길
고등학교 때 이미 대학을 가면 ‘학보사 만화 기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가진 나는 원하는 대로 대학에서 날아다녔다. 그러나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걸 느끼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졸업을 앞두고 생각보다 미래는 만만치 않았다. 지금은 시사만화 네 칸 만화도 사라지고 만평도 대개의 신문이 없애는 추세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인기가 많았다. 그 직업을 대표하는 이른바 화백, 만화 기자 자리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 사람이 퇴직해야 자리가 날 수 있고 자리도 제한적이었다. 나는 대학에서 학보사와 만화습작을 거쳤지만, 실력이 예나 지금이나 걸출하지 않아 신문 취재기자부터 거쳤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게 급선무였다.

 

용인의 작은 지역신문, 안양, 부천의 지역신문을 거쳐 드디어 1994년 꿈에 그리던 화백 자리로 경기도 일간지 <중부일보>에 입성했다. 나는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만 4년, 나는 만화, 만평, 삽화와 그래픽까지 그려야 하는 일인다역의 자리였지만 아마도 지금 생각하면 가장 행복하고 열정적으로 시사만화를 그렸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 IMF 외환위기 때 유학을 떠나게 되어 이차 저차 운이 좋아 교수라는 직함까지 얻어 만화 관련 직종에 여태껏 근무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만 60을 눈앞에 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았으니 나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다.

 

# 용인 지역 정치의 민낯
신문 밥을 먹었으니 나도 어지간히 ‘정치 과몰입’부류이다. 시사만화를 한다는 건 매일 매일 모든 뉴스에 촉을 달고 살아야 한다. 그때 길러진 습관이 남은 탓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용인은 마치 지옥도를 보는 것 같다. 공장이 내려와 매연과 폐수를 뿜어 멱감던 대개의 하천을 모두 오염(지금은 일부 정화되었지만)시켰으며, 땅값은 천정부지로 뛰어 전국 투기꾼이 아직도 최고의 투자가치로 치는 곳 중의 하나이다. 골프장과 무덤과 연수원이 아마도 아직까지 전국 최대일 것이다. 서울 사람들의 놀이터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이제 용인시는 전국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반대로 유명세도 치루고 있다. ‘욕망의 최전선’ 용인은 그래서 늘 시끄럽다. 대개의 시장과 군수는 임기를 마치기 바쁘게 교도소 가기 바쁘고, 행정은 시행착오를 반복한다. 토박이와 외지인의 복합체 100만 Big city는 늘 도시가 토해내는 여러 문제로 시끄럽다. 

 

그리고, 이 터에서 레거시 미디어와 관청과 시민들에게 무시 받지만 그럼에도 오롯이 지역을 지키는 지역신문은 귀하고 소중하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미래는 그렇게 맑지 않지만 늘 가진 것 없이 버텨 왔으니 이외수 선생님 말씀처럼 용인신문은 ‘존버’할 것이라 믿는다. 내 소중한 안식처였던 용인신문의 건투를 빈다. 

 

사설이 길었습니다. 

 

30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부족한 저의 그림을 봐주신 많은 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림은 별로지만 기차와 버스, 비행기 안에서도 마감은 지키려 애를 썼습니다. 용인 내 고향이 이제 ‘꽃피는 산골’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시민들이 깨끗한 환경에서 평온하게 사는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랜 영혼의 파트너이자 동향 벗, 김종경 발행인과의 30년 넘은  우정도 지역이라는 매개로 소중하게 남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 세밑 윤기헌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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