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인신문 |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 서슬 퍼런 임금님이 주인이던 시대, 허균이 한 말이다. 진나라가 망했고 한나라가 혼란스러웠으며 당나라가 쇠한 데는 단 하나의 이유만 존재한다. 권력자가 백성을 괴롭힌 까닭이다. 백성 눈 밖에 나서 끝이 좋았던 임금은 없었다.
맹자는 『맹자』 「진심장구」 하편에서 백성은 귀하고 사직은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고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임금은 가볍고 백성은 귀하다’는 군경귀민론(君輕貴民論)이다. 순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라고 했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으나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을 가볍게 알고 제멋대로 굴다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권력이 한둘이 아니다.
권력을 쥔 자가 권력을 빙자하여 하면 안 될 짓을 했을 때, 본인 생각으로는 ‘아무도 모르게 했으니 누구도 모르겠거니’ 하겠지만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이미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리고 자신이 안다. 벌써 이렇게 셋이 알거늘 저리도 어리석고 모자라서야 되겠는가. 하늘이 임금을 세우고 또 사람을 들어 벼슬아치로 앉히며 권력을 주는 것은, 백성을 돌아보고 건강하게 길러내며 편안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권력이 마치 제 것인 양 “강한 자에게는 운명도 고개 숙이며 피해 간다”느니 하는 말을 겁 없이 내뱉는다면, 그게 어찌 임금의 입에서, 벼슬을 가진 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란 말인가. 이는 백성을 능멸하지 않고서야 어찌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이겠는가. 이러한 자들이 임금이 되고 권력을 휘두른다면, 그런 나라의 백성은 목숨은 부지했으나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권력에 취해 그 힘이 영원할 것처럼 여기며 살았던 자들의 비참한 말로를 백성은 이미 알고 있다. 권력을 백성을 위해 쓰지 않고 제 사욕을 위해 썼다면, 또 제 처와 가족과 측근에게 한없이 너그러웠다면, 그런 권력은 끌어내려 백성 기강의 엄중함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다음 권력이 함부로 힘을 남용하거나 사유화하고, 권력 언저리에 빌붙어 날뛰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권력이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았다거나 명품 따위를 받았다는 식의 불미스러운 일조차 있어서는 안 된다. 받고 안 받고는 의미가 없다. 그런 소문이 난다는 것 자체가 본질이다. 소문만으로도 충분히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물속에 들어갈 일이다. 고래로 능력이 안 되는 것들이 권력을 잡으면 제 마음대로 휘두르다 반드시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러면 이들은 제 딴에는 머리를 짜내어 온갖 묘수를 수첩에 적고 야단법석을 떤다. 그러다 하필이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가장 위험한 결정을 저지르고 만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바르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털고 또 털어도 먼지 안 나게 살아야 한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논어』 「헌문」편 12장 6절에 공자의 제자 자장이 정치하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해야 밝은 사람(명·明)이 될 수 있느냐 묻는다.
그러자 공자께서 답하신다. “물에 젖어 들듯 스며드는 비방(침윤지참·浸潤之譖)과 살에 닿듯 절실하게 느껴지는 하소연(부수지소·膚受之愬)이 통하지 않는다면 밝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장장 2500년 전이다. 그런 시대에 이런 통찰이 있었다는 게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백성보다 더 높은 덕망과 윤리, 도덕을 요구한다. 바르지도, 도덕적이지도 않고 덕망조차 보이지 않는 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약탈자의 태도로 백성을 대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런 자들이 한자리 얻겠다고 온갖 모략과 술수를 일삼고 있을 때에도, 백성은 묵묵히 제 소임을 다하며 소보다 더 느린 걸음으로, 그러나 소보다 더 부지런하게 성자의 삶을 살고 있다. 가장 시끄러운 국가 재난의 한복판에서도 백성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가장 조용한 구원자였다. 임금과 벼슬아치, 그리고 권력은 이토록 착하고 순박한 백성을 위해 뼈가 부서지도록 일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