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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기묘명현의 표상 김세필(金世弼) 선생의 얼을 계승

기 획 |名家를 찾아| 경주김씨 문간공 십청헌파(文簡公十淸軒派)

   
 
경학(經學)과 시문(詩文) 뛰어나…당대 유림의 사표(師表)
문중들 ‘세수돈목(世守敦睦)’ ‘과물탄개(過勿憚改’ 실천


글·홍순석(강남대 교수,용인향토문화연구회장) | 사진·서정표(편집장)


우리 고장 용인은 널리 알려 있듯이 선현의 유적이 많이 소재한 곳이다. 특히 충절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모현면 능원리에 영면하고 있는 포은 정몽주선생은 예나 지금이나 전국 유림의 표상이다.

조선 중종조의 기묘명현 가운데 7명이나 용인과 연고를 갖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정암 조광조선생은 포은과 함께 용인의 얼로 추숭되어 왔다. 정암과 함께 사은정(四隱亭)에 뜻을 남긴 조광보(趙光輔)·조광좌(趙光佐)·이자 선생 역시 지절(志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신 분이다.

김세필(金世弼)·이성동(李成童) 선생 역시 이들과 함께 기묘명현으로 추숭된 분이다. 그럼에도 그의 묘역이 있는 수지구 죽전동과 남사면 묘봉리를 찾는 이들이 별반 없다. 김세필 선생의 묘역은 화를 당한지 400년이 지난 1999년(기묘년)에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92호로 지정되었다.

최근 난개발로 훼손 위기에 처하자 그의 후손들이 나서서 힘겹게 얻어낸 결과이다.
사실,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은 지금까지도 정암의 명성에 가려진 인물이다. 그는 정암보다도 10년이나 앞서서 중종의 신임을 받고, 도학정치를 구현했던 명현이다.

정암 이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으로 유배되고 사사(賜死)되자, 이 일이 잘못되었음을 중종에게 간언하다가 화를 당했던 인물이 바로 십청헌이다. 중종 당시의 역사기록을 살피면, 십청헌은 정암의 강직함을 우려하여 개혁의 완급을 충고하였다.

정암이 사사되었을 당시 십청헌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때였다. 그가 조정에 있으면서 정암의 무고를 중종에게 간하였다면 사사됨은 면하였을 것이라는 것이 사관들의 평이다. 정암과 십청헌 두 선생의 인연은 이처럼 깊다.

# 조선 중종조 유림의 사표인 십청헌 김세필 선생
십청헌의 행적이 드러나지 못한 것은 그의 학덕과 지절이 정암보다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는 고려말 충신으로 포은과 함께 이름을 남긴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고손이며, 세종을 비롯하여 여섯 임금을 섬긴 바 있는 명신 김영유(金永濡)의 손자이다.

그의 가문은 명문거족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그가 당대 유림의 사표(師表)로 천거되었음을 보면, 훈구대신이나 신진사림들로부터 명망을 함께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경학(經學)과 시문(詩文)에 모두 뛰어나, 도학자요 문인으로 높이 평가된다. 사관은 십청헌의 인물됨을 이렇게 평하였다.

“김세필은 학술과 재예가 뛰어났으며, 자상하고, 스스로 삼감으로써 시류의 무리배들과는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은 까닭도 거기에 있다.”

십청헌의 이러한 성품은 그의 아들 김저에게 이어진다. 김저는 명종때 윤원형의 횡포를 간언하다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참수되었다. 이로써 누대에 걸쳐 충절로 이어온 그의 가계는 김저에 이르러 멸문(滅門)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십청헌 가문의 성세가 선대에 비해 빈약한 것은 이 때문이다. 비록 가문의 성세는 미약해졌지만, 선조들의 충절은 가문의 자긍심으로 그의 후손들에게 계승되고 있다.

# 수지구 죽전동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었던
경주김씨
용인지역에 경주김씨가 입향한 것은 고려 말엽으로 추정된다.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순절이후, 아들 근(根)이 시묘를 하면서 계기가 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수지구 죽전동 일대에 정착하면서 경주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십청헌의 후손들은 현재 용인지역보다는 충북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 더 많이 거주하고 있다.
팔성리는 말마리, 지부내, 토끼실 등 세 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십청헌과 관련이 있다. 이곳 김씨들을 “말마리 경주김씨네”라고도 부른다.

십청헌 김세필선생의 묘역은 수지구 죽전동에 있다. 묘역 일원이 일괄적으로 1999년 4월 26일자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92호로 지정되었다.

묘역에는 충민공 김저, 김구, 김원경, 김중경, 김득곤전한공 김물, 참의공 김륜, 남곡공 김의의 묘소가 있다. 십청헌의 묘역 입구에는 십청헌의 신도비와 충민공 김저의 신도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2002년에 건립한 <십청헌 김세필선생 문학비>가 있다.

십청헌의 후손들 가운데, 저명한 인사로는 김건열(15대손, 종친회장), 형호(고문), 오영(18대 종손), 김덕호(총무) 지열(후손)씨 등이 있다. 이밖에 경주김씨 문간공파 종회 부회장으로 성제 정호 보열씨, 이사로 우열 승렬 병천 문호 재흠 동흠 명제 주용 홍섭 응호 동용 교명 기양 만제 유식 관제 동용씨, 감사로 균제 홍우씨, 문중대표 종은 귀환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