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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온 몸을 던져 용인을 사랑했던 선생

용인 구석구석 그의 발자취…문화자료 남긴 일생
삶의 뿌리를 찾아서 / ‘향토사학자 고(故) 박용익옹 (추모 3주기를 맞아)

   
 
# 현장중심의 향토사학자
“모름지기 현장을 중시해야 돼. 발로 뛰어야지. 책상에 앉아서 이것 저것 갖다 붙여 책이 되면 그건 도둑질과 같은 거여. 또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어떻게 믿어?”

현장을 중시하는 신념으로 걷고 걸은 것이 하루평균 10리. 아무도 관심없는 묘소. 인적 없고 발길 없는 곳에서 향토문화자료를 발견하고 일흔의 나이에 총총걸음으로 찾아와 잘 모르는 얘기를 구구절절 풀어 놓던 분. 바로 오늘 ‘삶의 뿌리를 찾아서’의 주인공인 향토사학자 고(故) 박용익옹이다.

점퍼를 걸친 몸에는 필기도구, 나침반, 줄자가 담긴 낡은 가방 하나와 카메라 한대가 전부였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그 모습이었다. 이렇게 옛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 평생을 돌아다니며 현장을 누비며 셔터를 누르던 그의 족적에는 용인의 역사가 묻어 있었다.
선생은 35년여를 옛 선조들의 사라져 가는 흔적을 찾아 다녔다. 흔적들은 그의 손을 통해 역사가 됐고, 자료가 됐고, 향토문화의 정신도 되살아났다.

# 고향사랑의 일편단심
선생은 명문대로 손꼽히는 고려대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지만 낙향을 결심했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지난 68년의 일이었다. 가족들도 “해보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그의 고집은 꺽지 못했다.
직장생활과 출판사업에 이어 농사를 짓다 망한 것도 향토사학의 대가로서 삶을 살기 위한 인연이라면 인연이 되었다. 그러나 향토사 연구의 첫발은 무엇보다 고향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었을 것이다.
그가 낙향해서 무작정 가방을 메고 처음 찾은 곳이 포은 선생 묘였다고 한다.

눈에 띄는 것은 무조건 찍고 기록으로 남겼다. 이렇게 용인지역의 흔적들을 찾아다니기를 10년. 마침내 뜻을 이룰 기회를 만나게 된다. 선생을 비롯해 향토사 연구에 관심이 많던 12명의 회원이 용인 최초의 향토문화연구모임인 ‘용인 향토문화진흥회’를 만들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 지난 1982년 12월의 일이다.
이듬해 ‘용인군 읍지’ 발간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용인의 역사는 새롭게 책으로 엮여서 나오기 시작했다. ‘용인금석문 탁본전’, ‘내고장 민요’,’내고장 인물’ 등도 당시에 나온 것들이다. 이 시기야 말로 향토사 분야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용인이 부흥기를 맞이한 때이기도 했다.

선생의 발걸음은 용인에 국한돼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1987년에 결성된 전국 18개 향토사 연구단체 모임인 ‘한국향토사연구협의회’에도 그가 있었다.
향토문화와 관련된 일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기전문화연구위원으로 경기도 향토사 연구에도 중책을 수행했고, 1988년에는 용인문화원장에 부임해 용인향토사연구의 전성기를 이뤘다. 이러한 그의 열정은 70세가 지난 이후에도 식지않고 계속 되었다.

지난 2000년 발족한 ‘용인향토문화지킴이 시민모임(향지모)’ 회장에 이어 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를 이끌기도 했다. 현장을 중시하는 그의 지론을 이어받아 향지모는 지역문화유산의 현장을 답사, 조사발굴하는 산교육을 첫번째 이념으로 삼고있다.

#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
선생은 용인신문에 ‘옛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를 연재하기도 했다. 신문편집을 하는 필자와의 인연도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덕분(?)에 선생을 따라 산도 오르고 탁본도 했던 기억이 새록 새록 남아 있다.
발품을 팔고 끊임없이 연구해 쓴 선생의 모든 글들이 소중하겠지만 지면상 전부를 소개할 수는 없고 그중에서 몇가지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1920년대 양지공립보통학교 신축기념 술잔(지름 6.5cm×높이 3cm)을 소개하고, 청계천의 고서점(古書店)에서 찾았다는 남사면 천석꾼의 추수기(秋收記:24×36.5cm/한지)를 통해 1930년대 당시의 경작내용과 재산 등을 밝히기도 했다, 또 원양지면 이인긍(李寅兢)의 호적단자와 임명장을 통해 구한말 관제개혁 후의 서식(書式)을 알려주기도 했고, 양지면 박수민씨댁의 산림경제(山林經濟)전서를 통해 500년전 농서(農書)를 재발견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용인8경의 하나로 잘 알려진 양지면 공세울 제일초등학교 맞은 편 선유대의 ‘仙遊臺’라고 새겨진 바위 밑에 새겨진 가인암 암각문(可人岩 巖刻文)의 고증을 통해 조선철종 8년 문인들이 시회(詩會)를 갖던 곳으로 밝혀 향토사적 의미를 더욱 크게 하기도 했다.

선생은 또 여러가지 향토문화재자료를 재조명 했는데 용인군 수여면(용인면) 남리에 살던 사람이 천명의 사람으로부터 천자문의 글씨 하나하나마다 주소와 성명을 기록하게 한, 일종의 방명록(1920년대 추정)과 가장 오래된 기록물로 흥미로왔던 원삼면 설풍, 설성길 묘비(1441)도 비록 높은 벼슬은 아니었다지만 선생에 의해 용인신문에 소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석만 쓸쓸하던 독립운동가 어대선(1863~1921)을 재조명 하기도 했다.

# 마지막 바램
“워낙 많아 나도 알지못해, 수 백건은 될거야!”
용인향토사에 쏟은 선생의 열정만큼 그가 모은 자료는 끝이 없는 듯 보였다.
반평생을 뛰어다니며 모은 자료도 다 정리할 틈을 가지지 못했다. 그런 그였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면 금새 눈시울을 붉히곤 했던 기억이 난다.

선생의 머릿속에는 온통 용인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 뿐이었다. 이는 선생의 마지막 바램이자 소원이기도 했다. 지금도 선생의 쩌렁쩌렁한 울림이 들리는 듯 하다.
“우리것을 세계화 시켜야지 남의 것을 세계화 시키면 뭐해.”


글·서정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