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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조급한 현대인 “절제의 시조가 약”

“나를 키운것은 8할이 용인”…일상 속 현대인의 결핍 다뤄

   
 
# 용인에서 핀 시조의 꽃
요즘 세상에 시조라니? 그냥 시인이라고 해도 사람을 다시 쳐다볼 시대에 시조시인이라고 하면 박물관에서 나온 사람인가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막상 정수자 씨의 작품을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현대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어에 다만 시조의 정형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만 차이가 날 뿐. 사람들이 갖는 본연의 감성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었다.
정수자 씨(丁秀子·51)는 용인에서 출생해 1984년 세종숭모제전 전국시조 백일장 장원으로 등단한 이후 2003년에는 등단 15년 이상된 작가의 작품 가운데 한 해의 작품을 뽑는 중앙시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시와 수필을 꾸준히 썼던 것이 글 쓰는 힘이 됐다고.
“수지초등학교 2학년과 3학년 때 학교 대표로 용인군내 백일장에 나갔어요. 용인초등학교 큰 플라타너스 밑에서 시제를 받아 글을 썼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그땐 상을 못 탈까봐 부담이 컸는데 특선을 해서 어효선 동시집을 받았죠. 그 유명한 시인의 시집을 책으로 보게 돼 어찌나 감동을 받았던지 지금도 보관하고 있어요.”
신봉리 언덕 꼭대기에 살던 그는 개천에서 놀기도 하고, 광교산을 오가며 찔레순과 싱아, 삘기를 먹기도 하는 등 자연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정 시인의 시 속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제 시에 용인이라는 명칭을 쓰지는 않지만 시골 정서와 산 밑 집에서의 추억들은 거의 다 용인에서 살던 어린 시절이 담겨있는 것이죠.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했는데 저를 키운 것은 팔할이 용인일지도 몰라요.”
그의 작품의 주요 소재는 자연과 소외된 삶이다. 소외된 삶이란 일상 속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결핍 같은 것이다. 딱히 직설적으로 무엇을 결핍한 것인지 시에서 토로하지 않지만 시에는 스스로 느끼는 현실에 대한 불만족, 모호하지만 ‘먼 것’에 대한 지향이 묻어난다. 스스로를 다잡으며 멀리 있는 데까지 가보려는 작가의 모습 또한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 ‘생활속 시조’고민
시조가 현대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 물어보았다.
“현대는 무절제, 무한질주, 무한추구의 속성이 팽배하잖아요. 시조는 느리게, 절제하면서 사는 방식을 보여줘요. 자칫 절제가 상상력을 제한할 수도 있는데 그것만 조심하면 현대인의 무한욕망, 무한 속도추구를 절제하도록 연습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사실 사람들이 조금만 참으면 각종 오염으로 이 세계가 망가지는 것을 조금 더 늦출 수 있을 텐데 지구에 쓰레기를 산같이 쏟아내고만 있잖아요. 시조는 정신의 여유, 절제 속에서 청빈에 가까이 가는 힘을 키워줄 수 있어요. ‘형식’을 갖추는 정형성에 시상을 앉히는 것이 정제이고 절제니까요.”
그는 요즘의 자유시는 모던한 반면 독자들이 이해할 수 없거나, 장광설에 그치는 등의 문제가 종종 드러나지만 시조는 산문과 다른 시 본연의 절제미를 보여줄 수 있다고 했다.
“어떤 예술이든 대중화가 과제죠. 어느 예술이든 소통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대중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대중을 끌어올리는 소통이 진정한 즐거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시조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대중에게 거리감을 주는 게 사실이에요.”
최근 시조계에서는 아이들에게 동시조를 쓰게 하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어려서부터 일정한 형식 속에 언어를 다루는 묘미를 느끼고 재미를 붙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생활 속에서 시를 즐기는 게 필요해요. 현재는 생활과 시조가 유리돼 있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시인들이 독자와 소통하기 좋은 고민을 담아, 독자가 다가올 수 있는 시를 써야해요. 시조를 너무 옛시조처럼 쓰면 고루하다는 편견을 고착시키겠죠.”

# 아직도 진행형인 ‘대표작’
그는 전통을 홀대하는 근대사를 아쉬워했다. 긍지와 자부심을 가르치지만 스스로 너무 대접하지 않고 살기에만 급급해 시회(詩會)를 즐기는 생활 속 시문화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시조를 자유시가 나온 이후 사라지는 장르가 아니라 우리의 성정을 가장 잘 담아내는 문학 형식으로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만만찮다.
“어학 전공자들도 제 시집에서 모르던 말을 발견한다고 해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이라고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표현하는 것은 한 단어 밖에 없다고 하죠. 저도 그걸 실현하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고전적인 말도 찾아 쓰죠. 다양한 체험을 위해 영화, 전시회 등 다양한 장르를 접하려고 해요. 답사여행도 다니구요. 꼭 시상을 찾으러 다니진 않아요. 그렇지만 안 쓰고 있으면 문장이 내 안에서 덜그럭거리고 때로는 대화를 걸어와요. 채워야 좋은 글이 나올 수 있으니까다양한 장르와 경험을 통해 저를 채우고 다시 비워서 세상과 다양한 소통을 하고 싶어요.”
시집, 문예집과 철학책, 역사책을 가리지 않고 읽는 것이 시어의 폭을 확장시켰고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 내야 하는 시어 선택의 폭을 넓히게 됐다.
대표작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스스로 ‘이거면 더 이상 안 써도 되겠다’고 생각할 만한 작품을 쓰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래도 하나를 선택해달라고 하자 “자기 스스로 감동하지 않은 작품을 누가 감동하겠나 하는 생각으로 작품을 내놓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선뜻 택하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그는 어렵게 ‘장엄한 꽃밭’을 골랐다. ‘장엄한 꽃밭’은 고행하는 모습, 어딘가에 도달하고자 하는 모습을 통해 궁극의 거처에 도달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 시박사의 끝없는 열정
시조시인이라고 늘 시조만 쓰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난 2005년 2월 아주대에서 ‘한국 현대시의 고전적 미의식 연구’라는 주제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얻은 결실이다. 논문에서는 정지용, 조지훈, 박목월 등 〈문장(文章)〉을 중심으로 한 시인들의 고전적 미의식을 다뤘다. 이들의 작품속에 산(山)은 정신적 거처이자 이상향, 정신적 지향처로 산시(山詩)에 이들의 미의식이 집약돼 있다고 보았다.
평론가로 등단하지는 않았지만 박사학위를 받고 난 뒤 시조에 대한 평, 시집해설 등 시작(詩作)외의 글을 요청하는 곳이 많아져 신문에 칼럼을 게재하고 있는 것 뿐 아니라 요즘은 아주대와 경기대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지난 2005년 가을부터 금년 여름까지는 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연구팀에서 ‘조선족 문학의 탈식민주의’를 연구하기도 했다. 시조시인이라고 해서 시조만 쓰는 것이 아니라 논문도 쓰고 평론이나 수필, 칼럼을 쓰기도 한다.
“청탁 오는 글을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고 쓰다보니 바쁘고 정신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렇게 글을 쓰는 게 요즘처럼 시조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시대에 시조 시인이 해야할 역할로 생각돼요. 또 글을 쓰는 것이 실력을 쌓는 길이기도 하니까요.”
시가 낯설어진 세상에서 사는 현대인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없는지 물었다.
“시인의 역할이라는 게 시 속에 압축된 언어, 정제미를 살려서 적재적소에 두고, 그 효과를 독자들이 음미하고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시를 쓰는 사람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를 즐겼으면 좋겠어요. 시를 써야만 한다는 게 아니라 시를 통해서 즐거운 상상, 위로, 인습의 타파, 새 세상의 발견 같은 즐거움을 느끼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거죠. 처음이 어색해서 그렇지 시를 자주 접하다보면 나중에는 안 보면 허전해지고 나중에는 자기 취향대로 시를 즐길 수 있게 되니까요. 시를 알면 세상이 달리 보이고, 정신이 풍요로워져요. 내적 성장과 풍요를 가져다줄 수 있구요. 시와 더불어 울고 웃을 수 있으면 이 아니 즐거울까.”

장엄한 꽃밭
1.
오체투지 아니면 무릎이 해지도록
한 마리 벌레로 신을 향해 가는 길
버리는 허울만큼씩 허공에 꽃이 핀다

그 뒤를 오래 걸어 무화된 바람의 발
雲山을 넘는 건 사라지는 것 뿐인지
경계가 아득할수록 노을 꽃 장엄하다

2
저물 무렵 저자에도 장엄한 꽃이 핀다
집을 향해 포복하는 차들의 긴 행렬
저저이 강을 타넘는 누 떼인 양 뜨겁다

저리 힘껏 닫다 보면 경계가 꽃이건만
오래 두고 걸어도 못 닿은 집이 있어
또 하루 늪을 건넌다, 순례듯 踏靑이듯


■ 정수자
1957년 경기도 용인 출생
1984년 세종숭모제전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시조문학>등단
1996년 한국시조작품상
1997년 수원문학작품상
2003년 중앙시조대상

시조집 『저물녘 길을 떠나다』『저녁의 뒷모습』


유성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