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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한국 농악의 산실 … 민속놀이의 대통령

그 만의 풍류 인생을 살아간다
| 삶의 뿌리를 찾아서 | 한국민속촌 농악단장 정인삼

   
 
기계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의 생활은 노동속에서 표출하는 농악의 가락과 장단을 통한 흥겨움이 대중적 놀이의 기반이었을 것이다.

모심기, 논매기, 벼베기, 타작하기 등 각 단계별로 독특한 장단으로 흥에 겨워 춤도 추고 노래를 하면 신바람도 나고 일의 능률도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기계화 시대가 되어 일상생활에서 공동체적 문화의 기반을 둔 놀이문화가 대부분 퇴색되어 버렸다. 우리가 이어갈 민족의 얼이 배인 전통이 무너질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전통을 찾아내서 복원하는 일이야 말로 우리 민족에겐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닌 일일 것이다. 그러한 일을 하며 한 평생을 바친 사람이 있으니 한국민속촌 농악단장이며 우리춤보존회 회장인 정인삼(66)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 땅의 풍물재비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70년 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전북농악’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그가 지도하고 연출한 종목이 여섯번이나 같은 상을 받았으니 가히 민속놀이의 대통령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다.

# ‘농악사관학교’의 비공식 축제
용인과 한국민속촌에는 비공식적인 축제가 하나 있다. 민속촌농악단장인 정인삼씨의 생일이 그 축제의 날이다. 이날 그에게서 배웠던 3000여명의 제자들이 전국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모여 드는데, 흥을 타고 난 사람들 답게 자연스럽게 판이 벌어지고 귀동냥으로 전해 듣고 달려온 전통예술에 종사하는 예술인들까지 합세해 기어코 굿판으로 변해야 직성이 풀리는 날이다. 그리고 이 날은 선·후배들의 만남의 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문하생들이 찾아오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평상시에는 정인삼씨 또한 전국 도처에서 벌어지는 제자들의 공연과 국악인들의 대소사를 참석하느라 바쁘기 그지 없다.
현재 한국민속촌 농악단은 ‘농악사관학교’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엄격한 규율과 선·후배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기자가 인터뷰 중 일때도 오가는 문하생들에겐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긴장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농악명인 추모제를 3년마다 한번씩 자기 자신이 제수를 장만하여 제를 올려 기리고 있으며, 1999년부터는 사재를 털어 한국 민속촌에서 전국농악 명인대회를 개최, 농악부분의 개인놀이를 매년마다 치루어 단체 판굿에 치우친 농악의 발전과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가 사라지는 농악을 고스란히 보관한 춤과 음악의 전당을 만들고 숱한 제자를 배출하고 전국에서 벌어지는 판과 축제에 묻혀 사는 사이 총각으로 환갑을 넘긴지도 벌써 여섯해를 맞고 있다. 그는 그의 말대로 그만의 타고난 풍류인생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 춤꾼으로 입문, 농악까지
1942년 생인 정인삼을 풍류인생으로 잡아 끈 것은 6.25전쟁이었다. 역사의 한 복판에서 전주 고향집이 폭격에 맞아 어디에 하소연 할 데 없이 고모네서 운영하는 양화점에 의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양화점 유리창문 바깥으로 보이던 풍경이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이다. 양화점 앞에서 내는 양악단과 국악단 등의 소리는 항상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고, 특히 그에게 국악단의 징, 장구, 깽매기(꽹과리)와 쌍호적의 울림은 ‘애간장’을 도려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후 정인삼은 16세부터 호남지방의 농악을 배우면서 개인놀이인 부푸춤(일명 상쇠춤)과 고창지방에서 추어지었던 소고춤을 고창의 유만종 선생으로부터 사사 받았다.

스무살에 전주농고에서 춤을 가르치던 정형인(정자선의 아들)에게 승무를 배웠고, 전주국악원을 드나들면서 아쟁, 가야금, 거문고, 장고장단 등을 배우면서 무와 악을 겸하게 되었다.
정인삼은 본격적인 춤꾼으로 성장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박금술 선생으로부터 한국무용의 전방과 창작부를 사사 받으면서 춤꾼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그는 스물 네살때 전주시에서 ‘국제양화점’을 개업해 대성공을 거둔적이 있다. 그러나 몸에 배어버린 흥 때문이었는지 71년까지 전주농고에서 농악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당시 국내에서 내로라는 명인들을 모시고 와 배우며 가르친 것이 효과를 보았는지 ‘전국민속경연대회’에 나가 장관상을 세 번 타더니 1970년엔 결국 대통령상까지 타게 됐다. 그러나 그러는 과정에서 그 잘나가던 사업은 폭싹 망해 집 한 채 값을 날린 셈이 되고 말았다.

1974년 용인에 한국민속촌이 생기고 그는 전주농고 졸업생과 졸업예정자 32명과 함께하는 ‘민속촌농악단’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 영원히 노력하는 춤꾼
정인삼은 민속촌농악단을 이끌면서, 한국민속촌에서 국가 지정 문화재인 탈춤놀이와 각 지방의 농악놀이, 외줄타기 등의 시연공연과 함께 초청공연을 통해 한민족의 전통문화 재인식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정인삼은 민속촌 농악단장으로서 편안하게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호남지방의 소고춤을 집대성하여 정인삼류의 소고춤을 완성하고, 화성재인청의 이동안(중요 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보유자 1906-1996)선생에게 경기지방의 전통무용인 ‘신칼 대신무’와 ‘진쇠춤‘을 전수받았다. 이동안 선생 사후, 선생의 제자인 경기도 무형문화재 정경파 선생으로부터 꾸준히 사사받아 호남지방의 호남승무와 살풀이, 소고춤, 상쇠춤, 설장구춤에 이어 경기지방의 신칼대신무와 진쇠춤까지 이어받아 영원히 노력하는 춤꾼으로 인식되고 있다. 현재, 사단법인 한국 무용협회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가 가장 기억하고 싶은 일은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에서 한국의 민속예술을 세계에 널리 알린 일이다. 정 선생은 “무엇보다도 아시안게임에서의 ‘고놀이’연출지도가 일생일대의 최고의 작품이었다”며 “2000여명의 학생이 모여 연출한 자리에서 외국인들이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고 미소 지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서울성동공고 700명, 은광여고 800명, 수도공고 400명, 서산농고 200명을 지도하여 ‘고싸움’을 연출하였고, 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에서는 ‘우정’이라는 제목으로 공주농고 300명과 해성여고 리본체조를 5대주 음악을 배경으로 연출함과 동시에, 300개의 소고와 전립을 외국인들 손에 들려 보내 한민족의 문화를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전하는 문화 전도사의 역할을 했다.

# 육십평생 민속예술과 결혼한 사람
정인삼은 전국민속경연대회를 통해 크고 작은 상을 수상하였는데 85년 이천 거북놀이 연출로 문공부장관상을, 86년 용두레질 놀이 연출로 대통령상, 87년 여주 쌍용줄다리기 연출로 대통령상과 함께 87년 경기도문화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용인시문화상 문화예술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정인삼을 말하기를 육십 평생 민속예술과 결혼한 사람이라고 한다. 실제 한 평생을 혼자 살아오면서 농악지도와 춤 지도, 그리고 잊혀져가는 민속놀이를 발굴 보급하였고, 민속촌 농악단원과 함께 매주 민속촌 공연장에서 30여년간 한결같이 상쇠춤을 추고 있다.

1998년 9월에는 국제 유네스코 주최로 명인명무전에 초청되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초청 발표회를 갖고, 그 해 9월~10월엔 일본 국립극장으로 초청되어 소고춤을 추었고, 1998년 10월에 고 이동안 선생 3주기 추모공연 때에는 경기문화예술회관에서 ‘신칼대신무’ 발표회를 가졌으며, 1999년 5월 11일에는 화성 재인청류 정경파(경기도 무형문화재 8호) 8회 발표회에서 제자 정철기, 유연곤과 함께 ‘신칼대신무’와 ‘진쇠’를 경기문화예술회관에서 재연하기도 했다.

1999년에는 기흥읍 서천리와 농서리에서 유래한 용인두레싸움을 연출, 주민 80명과 함께 동두천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12회 경기도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하기도 했다.

# 한민족 문화 지킴이
정인삼은 전통춤을 배워 혼자만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여러 제자들에게 꾸준히 춤을 가르치고 양성하여 전국 각지에서 활동케 하고 있다.

먼저 소고춤을 정철기, 광명의 임응수, 대전 시립무용단원인 김한덕에게 전수시켜 그 맥을 잇게 하고, 상쇠춤과 장고춤 농악 등은 30년간 광주농고, 금산농고, 공주농고, 김천농고, 원삼중학교 등의 학생 약 500여명에게 가르쳐 이들이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국악인이면서 무용인으로 또 연주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정인삼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집대성이라는 정인삼류 설장고 춤을 가르치고 있으며, 전국 각지의 특이한 춤이거나 꼭 보존해야 하는 춤이라면 직접 배워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도 한다.

현재 사단법인 한국 농악보존회 회장을 맡아 후진양성에 구슬땀을 흘리며 66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마당에서 젊은 농악인과 함께 뛰는 정인삼이야 말로 진정한 한민족 문화 지킴이다.

서울대 오용록 교수는 “요즈음 전통예술의 전승에서 보이는 가장 큰 문제는 민족의 마음을 잃었다는 것이다. 감동이 없고 스산하기만 하다. 학생들에게 본래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고 그 마음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한다. 물론 학생들은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도 그 말을 계속 할 것이고 나 자신 그렇게 되고자 애쓸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리라 보는 것은 정인삼 선생님께 민족의 마음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라며 정인삼을 말하고 있다.

# 정인삼 춤 나들이
정인삼하면 그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민속촌 농악단장으로 한 평생 한국 농악보존과 제자 육성에 기여한 사람 정도로 평가한다. 정인삼이 한국전통무용가요, 춤꾼이라 하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모두가 춤꾼 정인삼을 표면상으로 민속촌 농악단장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춤의 한 뿌리가 농악에 있다는 깨달음을 매번 느꼈다”.
이 말이 농악 등 민속놀이와 춤을 구분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던진 화두다. 가무악 일체의 문화적 성격을 가진 우리 민족문화에 춤과 놀이가 어찌 따로 구분될 수 있겠는가. 정인삼 선생 스스로 밝히 듯 농악과 춤은 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지난 2004년부터 시작한 ‘정인삼 춤 나들이’공연을 통해 수원과 전주 등에서 제자들과 함께 춤공연을 선보이며 우리문화의 얼을 살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공연에서는 화성재인청류의 ‘신칼대신무’, ‘장검무’, ‘진쇠춤’과 정인삼류의 ‘설장고’를 비롯해 전국 고깔 소고춤의 모든 동작을 조화롭게 재구성해 정 선생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춤들을 정리·재연한 소고춤 등을 펼치고 있다.

정 선생은 “내가 세상에 왔다간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과 춤을 알림으로 내게 춤을 가르쳐 주신 스승님들께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은 마음, 제자들이 공연을 보며 뒤를 이어주길 바라는 기대감으로 ‘정인삼의 춤 나들이’를 열게 됐다”고 말한다. 또 그는 “공연을 끝냈을 때는 스승님께 40년간 짊어져 왔던 빚을 갚는 듯 했다”고 말한다.

# 단절된 우리 문화 이어갈 것
지난 10월 10일에는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가 주최하는 대한민국 국악제가 있었다. 이번에는 국악명인 10명을 만나며 ‘명인에게 길을 묻다’는 제목으로 전통 국악의 백미를 선사했다.

정인삼 역시 여기 10명중에 포함돼 국악알리기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올해 선정된 명인은 이양교(중요무형문화재 41호 가사예능보유자), 이홍구(40호 학연화대합설무 〃), 정철호(5호 판소리 고법 〃), 이영희(23호 가야금산조 〃), 이은관(29호 서도소리 〃), 김금화(82호 서해안풍어제 〃), 신영희(5호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 후보), 조창훈(20호 대금정악 이수자), 정인삼(한국민속촌 농악 단장), 최경만(부여충남국악단 예술감독) 등이다. 이들은 지난 10월 23∼24일 이틀에 걸쳐 5명씩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올라 농익은 기량을 발휘했다.

이웃집 아저씨와 같이 푸근하고 소박해 보이는 모습의 정인삼.
전통성과 현실성, 성실성이 살아있는 춤을 추는 그는 “경기도에서 경기문화를 활성화 할 수 있게 돼 기쁘다”며 “경기도의 춤이 가장 많이 살아 있다”고 말했다. 또 “불과 20년 전만해도 경기도의 백암농악과 화성 정남농악을 전국에서 으뜸으로 꼽았지만 그 맥락을 이어주는 사람이 없다”며 우리 농악의 현주소를 안타까워 하면서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전국 농악경연대회에서 보았던 백암농악의 생동감 있는 모습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백암농악을 극찬하기도 했다.

그는 민속촌 앞에 높게 솟은 아파트들을 바라보며 “남과 북이 대처하는 것만큼 우리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이 큰 문제”라며 “현장교육을 활성화 하고 단절된 문화를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