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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지극한 정의(情誼)와 사랑 …화목(和睦)의 표상

名家를 찾아사천목씨 직장공파 첨정공 종중(泗川睦氏 直長公派 僉正公 宗中)
‘형제상목’(兄弟相睦)을 다룬 ‘목시룡전’을 통해 연원 밝혀
직장공파 첨정공 종중 시조 종화…덕성리 삼배울에 기틀 마련

   
 
사천 목씨의 유래는 구체적인 문헌자료가 없어 알 길이 없다. 예부터 ‘형제상목설(兄弟相睦說)이 세간에 전해져 왔고, 이를 근간으로 사천목씨의 연원을 잡고 있을 뿐이다.
옛날 경상도 사천(泗川)지방에 형제가 살았는데 우애가 어찌나 깊었던지 그 소문이 널리 퍼져 마침내는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조정에서는 이 소문을 확인한 뒤 지극한 형제애(兄弟愛)를 표창하기 위하여 ‘화목 ‘을 뜻하는 ‘睦’자를 성씨로 내렸다는 것이다.
이 설화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문헌으로 한국고전소설 작품에 작가·연대 미상의 한글 필사본 ‘목시룡전’ (睦始龍傳,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 115면)이 있다. ‘목시룡전’ 은 ‘흥부전’ ‘적성의전’ 과 함께 우리나라에는 셋 밖에 없는 형제간의 윤리문제를 다룬 소설로서, 다른 두 소설은 형제간의 무정함과 시기질투를 줄거리로 하고 있으나, ‘목시룡전’ 만은 형제의 지극한 정의(情誼)와 사랑을 통하여 ‘형제상목’(兄弟相睦)이 개인적·가정적 차원을 뛰어넘어 사회적 화평의 기초를 이루는 핵심적 인륜(人倫)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문학사상 매우 독특한 위치와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기동, ‘한국고전문학연구’ , 교학사, 1887.)

사천목씨의 연원을 말해주는 ‘형제상목설’ 과 이를 뒷받침하는 ‘목시룡전’ 은 매우 연관이 깊을 것 같다. ‘형제상목설’ 이 단순한 설화가 아닌 실제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3대에 걸쳐 기로소(耆老所)에 든 사천목씨의 선조들
사천목씨의 유래에 대해선 1997년 9월에 대전 뿌리공원에 건립된 조형물의 기록에서 쉽게 살필 수 있다.
목씨(睦氏)는 선대(先代)가 경상도 사천에 살면서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리 화목·돈독하여 화목할 목(睦)자로 성(姓)을 얻게 되었고 본관을 사천(泗川)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천목씨 가문은 고려조부터 가문이 융성하여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33명이 문과급제를 하였으며 정승판서를 비롯하여 당상관(堂上官) 21명을 배출함으로써 명문대가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사천목씨의 시조는 고려조 무관을 지내신 낭장동 정공(郎將同正公) 효기(孝基)이다.
2세 합문지후공(閤門祗侯公) 덕창(德昌)은 고려 원종 10년(1269)에 최탄(崔坦)·한신(韓愼) 등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고 순국하시어 충신 일등으로 영주군(靈州君)에 봉해졌다.
3세 직제학공(直堤學公) 준평(俊平)은 비서성판사(秘書省判事),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특히, 11세 현헌공(玄軒公) 세칭(世枰:1487- ? )은 중종 때 명현(名賢)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아들 두일당공(逗日堂公) 첨(詹: 1515-1546)은 대사간 이조참판, 도승지등을 지내고 선조25년 77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첨(詹)은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서흠(敍欽), 장흠(長欽), 대흠(大欽)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크게 현달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효행으로 유명했던 수흠(守欽)은 청백(淸白)함이 지금도 일화로 구전되고 있다. 맏아들인 서흠(敍欽)은 예조참판·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인조 27년 77세에 기로소에 들었다. 사후 영의정의 증직(贈職)과 충정공(忠貞公)의 시호를 받았다.
또 숙종 때 남인(南人)의 중진으로서 많은 파란을 겪은 수옹공(睡翁公) 내선(來善)은 이·호·예·형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 등을 두루 역임하시고 숙종 14년 71세에 기로소에 들었다.
기로소는 반드시 문과급제를 거쳐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내고 수(壽)가 70세 이상의 원로만이 들어갈 수 있는 국가 최고의 예우(禮遇) 기구이다. 한 가문 3대에 걸쳐 기로소에 든 사례는 조선조 500년 동안 오로지 목씨 가문만이 갖고 있는 자랑이다.
이밖에 사천목씨 가문을 빛낸 이로는 행선(行善), 호룡(虎龍)등이 있으며, 장흠의 손자 창명(昌明)은 숙부인 내선(來善)과 함께 숙종 때 남인의 중진으로 유명하다. 조우(祖禹)의 아들 만중(萬中)은 영조와 순조 대에 걸쳐 대사간(大司諫)과 판서(判書)를 지냈다.

이동면 덕성리 삼배울에 첨정공 종중의 기틀을 열다
사천목씨 직장공파 첨정공 종중의 시조는 종화(宗和:1616-1693)이다.
첨정공 종화는 경익(慶益)의 맏아들로 자는 충백(衷伯)이다. 문장에 능통하였으며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첨정공 종중의 원로에 의하면, 용인지역에 사천목씨가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첨정공때부터라고 한다. 첨정공이 벼슬에서 물러나 덕성리 삼배울에 낙향하여 정착하였다는 것이다.
삼배울에 낙향하게 된 연유는 자세하지 않다. 부인이 진주소씨(晉州蘇氏) 사정(士 )의 딸인 점으로 보아, 처가의 연고지인 삼배울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조부 륭( ), 선친 경익(慶益)이 동두천에서 화성으로 옮겨온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경익은 3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종화(宗和)는 용인, 차자 성화(聖和)는 양수리, 3자 시화(是和)는 이화리에 각각 정착하였다.
이후 14대에 걸쳐 약 110세대 300여 명의 후손들이 삼배울을 비롯하여 각지에 살고 있으며, 사천목씨 전체 인구 8000명 가운데 대략 4%를 차지한다. 삼배울 선영에는 16세 이후 27세 선조까지 82기의 묘소와 70기의 석비가 안치되어 있으며, 재실인 숭모재(崇慕齋)에서 제향을 올린다.
사천목씨 첨정공파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종회를 조직하여 선영 및 재산을 관리해 오고 있다. 초대회장 영하씨 이후 진철(2대), 진계(3대), 진하(4대) 씨가 회장직을 이어 왔으며, 현재 5대 종회를 이끌어 가는 주역은 목진억(78세)회장, 현수(총무), 진순(간사), 진양(재무관리) 등이다. 이 가문에서 배출한 주요인사는 진국(총리비서실장), 장균(이동면장), 진봉(교장), 사균(언론인), 해균(아동문학가) 등이 있다.

글|홍순석(강남대 교수) / 사진|서정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