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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길게 바라보았다

시와풍경사이/| 감동이 있는 시 감상-3

황동규
임실인가 순창인가 길 양편에 나와
한창 태 내고 있는 꽃들에 한눈팔며 천천히 달리다
길 한가운데로 당당히 걸어나오는,
손끝이 거의 땅에 닿도록 허리 굽었으나
조금도 두리번대지 않던 노인,
눈길 서로 닿지 않아 몸끼리 맞닿을 뻔한 노인,
그가 차 바로 앞에서 걸음 멈추고
나를 향해 천천히 수직으로 허리를 들었다
그의 흰 눈썹이 빛났다,
나는 깊고 길게 그를 바라보았다

봄 하늘에 차를 세우고 한참 마음속에 잠긴다



시인은 지금 남도를 여행 중이다. 손수 운전하면서 봄이 무르익고 있는 국도를 천천히 달리며 봄꽃들에 정신 팔려 있다. 차창으로 상큼한 봄바람이 스카프처럼 감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 때 허리 굽은 노인이 두려움 없이 길 가운데로 당당히 걸어나오는 것이다. 생명 천지인 봄과 노인의 대비가 극명하게 삶과 죽음의 색깔을 드러낸다.
승용차의 속도 또한 죽음일 수 밖에 없는데 노인은 죽음 앞에 당당하게 서 굽은 허리를 고추 펴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 앞에 노인과 차가 멈추어 서고 시인은 노인의 흰 눈썹을 깊고 길게 바라보는 것이다. 죽음 앞에 당당한 모습의 노인, 죽음의 순간을 잠깐 동안 멈추게 하는 초연함이 돋보인다. 죽음의 유예의 순간을 깊고 길게 바라보는 황동규 시인은 여행의 모티브가 시속에 자주 드러나는 시인이기도 하고 우리들에게 <즐거운 편지>로 별리의 정형을 바꾸어 놓은 시인이기도 하다.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