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가 안 된다는 목회자와
이를 보고 자란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귀신 장사가 안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주역 설괘전(說卦傳)은 묘신문(妙神文)이라고도 하는데 설괘전 제6장에서는 신(神)에 대해 꽤 구체적이다.
신이라는 것은 만물을 묘하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神也者妙萬物)…중략…후에야 능히 변화하여 만물을 다 이루느니라(然後能變化旣成萬物也). 이를 자사(子思)는 중용 16장에서 신은 신묘하여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며,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視之而弗見聽之而弗聞體物)라고 했다.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에 사람들은 신의 신령스러움은 알지만, 그 신이 신이 된 바는 알지 못한다<人 知其神之神 不知其神之所以神>. 고 했다. 그래서 주역에 대한 신의 정의는 이렇다. 천지만물 인간사는 음양으로 다 헤아릴 수 있으나 신은 음양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陰陽不測之謂 神)이라 했다.
주자는 이를 신의 일은 알기 어렵기 때문에 꼭 알 필요는 없다고 뭉뚱그려 말했다. 그런데 공자의 최측근 마부 번지가 귀와 신을 아는 것은 어떠냐는 취지로 앎에 대하여 물은 것이다. 이에 공자 답하길 일반 백성들은 옳음에만 힘쓰면 되고, 귀와 신 따위는 공경은 하되 멀리한다면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번지문지(樊遲問知) 자왈(子曰) 무민지의(務民之義) 경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 가위지의(可謂知矣) 문인(問仁) 왈(曰) 인자선난이후획(仁者先難而後獲) 가위인의(可謂仁 矣論語雍也)6-20> 여기서 무민지의(務民之義)로 표현된 일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옳은 일이란 딱 하나다. 내 가족 내 새끼를 지키는 일이다. 문제는 한국 교회 목회자는 일반인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데 있다. 믿음이란 것은 할 수 없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고 기도하는 순간부터 이기에 기도하기 쉬는 죄를 범치 말라는 구약의 말씀을 가슴에 화인처럼 찍고 사는 거다.
목회는 소명과 사명 사이에서 하나님의 설복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구속사가 교회건물 보증금 잔액에 따라서 월세를 내느냐 못 내느냐에 좌우된다면 이건 아니지 않은가. 교회건물이 월세가 밀렸다는 이유로 목회자가 이중직을 갖는데서야. 주경학자 정암 왈, 죽을 각오로 목회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목회 하다가 죽어.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봐야지 설령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소명의 삶 후회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자 옆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던 일립 대(對)왈. 암, 그렇고말고. 목회는 시작은 소명이어도 감당은 사명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