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폐 끼치고 싶진 않았어요.”라는 김기택(송강호 역)은 노동과 기생(奇生)의 관계를 넘나든다. 영화 <기생충>은 냄새의 영화다. 지하방에서 먹는 짜파구리, 전봇대와 노상방뇨, 노란색 가로등, 환기되지 않는 화장실 변기는 냄새의 종합세트다. 숙주는 냄새를 먹고 자란다. 냄새를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계급의 동질성을 공감한다. 하지만 같은 음식을 먹었다고 신분 상승의 욕망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은 여전히 구분된다. 높은 곳에 살다 보면 낮은 곳을 내려다보려 하지 않는다. 왜, 어지러우니까. 어차피 인간의 욕망은 사방이 탁 트인, 뷰(view)가 좋은 곳을 찾을 뿐이다.
“사람답게 살지 않으면 어때요. 우린 살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라는 ‘다자이 오사무’의 절규가 공허하다. 아무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를 삭제해 버리고 싶다. 왜, 그따위로 자학하느냐고. 인간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낳아지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원래 내 의지와 상관없으니 능동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것인데, 죄송하다니 너무 열악한 소심함이다. 사람답게 사는 것의 기준을 정하는 것도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각자의 판단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근대적인 인간의 자의식이 아니던가.
선거철이다. 시장에 손님보다 정치인들이 많은 걸 보니…. 정치는 이미지 싸움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나름이다. 전통 시장에 가 본적 없는데 꼭 가려고 하는 이유는 너무 뻔하지 않은가. 경험한 적 없는 것을 하려다 보니 지식은 무용지물이다. 먹을거리가 민생의 기본이긴 하지만, 가려면 공부 좀 하고 가던지. 하기야 군대를 면제받은 사람이 “훈련소 건빵 맛이 여전하네.”라고 천연스럽게 말하는 걸 보면 그로테스크하다. 꼰대 남성의 어색한 포즈의 부조화는 비웃음과 냉소를 유발한다는 걸 정녕 모른단 말인가?
정치인이 유권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순수한 보고가 아니다. 평소에 그들을 생각하던 입장과 태도가 드러나는 행위의 과정이다. 자신이 인지하는 지식의 발화점은 현재 머물고 있는 그 자신의 위치와 합치된다. 그러므로 대상에 대한 태도는 객관화된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으로 변환한 일시적인 포장 행위일 가능성이 크다. 정치인은 시장의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척’만 할 뿐이다. 그들이 맡은 냄새를 ‘좋다’라는 이미지로 포장하지 못하니까 말로 때우려다 실수를 반복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박 사장은 세탁하지 못한 기택의 옷 냄새에 코를 막는다. 기택네 가족의 냄새를 지하철 냄새라고 부르기도 한다. 평범한 시민들의 교통수단을 비하하는 박 사장은 지하철을 타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정치인들도 익숙한 곳에 가서 선거운동하는 게 좋겠다. 억지를 춘향에게 부리는 변 사또는 되지 말자.
유권자의 혁명은 ‘이미지 정치인을 몰락’ 시킬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쾌감이다. 하기야 이것도 주관적인 행위이다. 사람마다 처지에 따라 다르니, 그냥 자신의 근대성으로 결정하면 될 일이다. 모든 비유가 은유적인 것보다는 직관적이면 좋을 것 같아 한마디 더, 이제부터 선택은 유권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