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
장승리
병든 아버지 옆에서 국어사전을 읽어 내려갔다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듯
병든 아버지 옆에서 검은 아버지를 읽었다
부유하는 계단에서
닿을 수 없는 바닥의 촉감을 기억하려 애쓰며
정든 아버지를 외면하며
검은 아버지를 읽다
밝아오는 죄책감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
인생은 슬픔이라고
말을 잃어버리기 직전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새벽이었다
유언이 아니라 첫 울음이었다
한 단어뿐인 페이지 속에서
읽다 잃어버렸다 아버지를
아버지가 덮었다
한 계단이
한 계단을 지웠다
장승리는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2년 중앙일조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습관성 겨울』『무표정』『반과거』가 있다. 이번에 발행된 시집『무표정』은 문학과지성사 R 씨리즈다.
「국어사전」은 아버지의 죽음과 시 쓰기에 관한 시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에 대한 추모의 시이기도 하고 메타적 시이기도 하다. 시적 공간은 병실이다. 국어사전은 시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아버지를 간병하며 시를 쓰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냉정해서 불편한 시다. 메타적이어서 더 그럴 것이다. 병든 아버지 옆에서 검은 아버지를 읽는 화자는 이미 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하고 그 죄책감을 시로 옮겨 적는 것이다. 아버지는 새벽에 유언을 했다. 유언은 딸의 울음에 다름 아니었다. 한 단어뿐인 유언을 읽다 잃어버린 딸, 아버지는 죽음을 맞았다. 아버지를 아버지가 덮은 것이다. 죽음은 삶이라는 한 계단이 죽음이라는 한 계단을 지우는 일인 것이다. '문학과지성사' 간 『무표정』 중에서.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