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에 관한 연구 하재연 초가 완전히 녹아버린 후 촛불의 빛은 어떻게 되었는지 일요일의 흰빛이 월요일 쪽으로 사라져갈 때 빛이 사라진 지구가 혼자 돌고 있는 밤을 생각한다. 지구는 그때부터 처음의 방식으로 고독해지겠지. 굿바이, 하고 인간들에게 인사를 하고 정말로 우주적 회전을 하게 될 것이다 빛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묻지 않고 빛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연구하는 사람들을 사랑한 적이 있다. 그도 빛과 함께 사라져서, 우주적인 안녕을 해야만 했고 나는 다시 먼지처럼 이곳저곳에 묻어 있다가, 쓱 닦이곤 했다 흘러넘쳤던 빛의 입자들은 공중으로 높이 올라가다 생각난 듯 한 번 반짝였다. 그리고 나서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음이 되어 세계의 투명한 공기를 짙게 한다 하재연은 2002년 문학과사회 제1회 신인문학상으로 문단에 나왔다. 그녀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시공간 개념을 끊어내고, 그 사이에 벌어진 틈 속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흡수하거나 뒤섞는 것으로 작은 우주를 완성한다. 그녀의 세계에서 ‘안녕’을 우리가 본래 알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녀만의 ‘우주적인 안녕’이기 때문이다. 하재연이 독자들에게 건네는 ‘안녕’은 전혀 다른 의미들을 불러들이며
돌의 뼈 곽효환 돌의 뼈를 본적 있다 들녘 가득한 감나무 황금색으로 물드는 청도읍성 언저리 석빙고 수 백년 풍장에 홍예虹蜺로 남은 돌의 뻐대 돌벽 틈새로 혹은 경사진 돌바닥 배수구 따라 물과 풀과 흙이 들고 날 때마다 돌들은 어깨를 걸고 몸을 붙였을 게다 많은 것들이 맺히고 풀리고 흘러갈 때마다 더 가까이 더 깊숙이 서로가 서로의 몸으로 파고들며 견디어온 돌의 뼈대는 단단한 시간의 문양이 있다 수많은 바람이 실어 오고 간 풍경과 삶이 물결치는 세월의 무늬가 있다 곽효환의 시선은 오래되고 아름다우며 눈물겨운 것들에 머문다. 그가 북방에서 더 북방으로 혹은 더 남방으로 이동한 결과다. 그의 시선의 이동은 어법과 이미지의 변화를 가져온다. 시적 혁명이라고 말해야 될 듯한 변화다. 그는 지금 청도읍성에 홍예로 남은 돌다리를 보고 있다. 아니다. 무지개처럼 걸쳐 있는 돌의 뼈를 보고 있다. 돌과 돌의 뼈는 엄청난 이미지의 차이다. 돌의 뼈에는 시인의 숨결이 있다. 돌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시인의 간절한 눈빛이 어려 있는 것이다. 돌다리의 틈새로 물과 풀과 흙이 들고 날 때마다 돌들은 어깨를 걸고 몸을 붙였을 것이라고, 많은 것들이 맺히고 풀리고 흘러갈 때마다 돌들은
비참한 저녁 식사 세사르 바예호 언제까지 우린 멍에를 써야만 할까. 불쌍한 무릎을 뻗을 수 있는 모퉁이는 어디에 있을까 언제까지 우리에게 양식을 주는 십자가는 노를 멈추지 않을까 언제 까지 병든 우리는 의문부호를 달아야 할까 우린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배가 고파 밤을 새는 소년의 고통스런 얼굴로. 언제일까, 영원한 아침의 언저리에서 우리 모두 함께 아침 식사를 하게 될 그날은 결코 데려와 달라고 하지 않은 이 눈물의 계곡에 언제까지 머물러야 하는 걸까 팔꿈치를 괸 채 눈물로 목욕한 패자는 머릴 숙이며 묻는다, 이 만찬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 어둠 속 의 그 존재, 알 길 없다 이 만찬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바예호는 페루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통 받던 인디오들의 처지를 안타까운 눈으로 보고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시를 썼다. 바예호가 사망했을 당시 체 게바라는 겨우 아홉 살이었고 두 사람이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바예호는 체의 첫번째 부인이자 그로 하여금 사회주의에 눈을 뜨게 해준 일다 가데아와 연애 하던 시절 함께 즐겨 읽었던 시인이며 체의 녹색 노트에 가장 많이 필사된 시인이다. 「비참한 저녁식사」는 사회의 불합리 속에 고통 받
땀과 채찍 니콜라스 기옌 채찍, 땀과 채찍. 태양은 일찍 맨발의 검둥이를 깨우고, 발가벗은 그를 또 농장에서 만났다. 채찍, 땀과 채찍. 바람은 소리치며 지나갔다. -손마다 검은 꽃이네! 피가 그에게 말했다: 자, 가자! 그가 피에게 말했다: 자, 가자! 맨발에 피투성이가 떠났다. 사탕수수밭은 떨면서 길을 내주었다. 하늘은 숨죽이고, 하늘 아래 그 노예는 주인에 의해 피에 물든 그 노예는. (........) 쿠바의 시인 니콜라스 기옌은 처녀시집인 『손의 모티브 Motivos de son』와 『손고로 코송고 Sóngoro cosongo』를 발표하며 흑인문학의 기수가 되었다. 흑인적 어법을 구사하며, 리듬감과 정감이 넘치는 그의 시는, 아프리카 흑인 전통의 풍부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쿠바 흑인의 고난 받는 삶을 조명함으로써 학대받은 흑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했다. 잘 자란 사탕수수가 평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잎을 서걱대며 흑인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노동 현장은 목가적이지만, 사탕수수의 달콤함 속에는 비탄의 눈물이 숨어 있다. 채찍과 땀과 피투성이의 맨발은 주인에 의해 피에 물든 흑인 노예의 처절한 모습니다.『체의 녹색 노트』중에서. 김윤배/시인
첫 번째 사랑의 시 파블로 네루다 여인의 몸, 하얀 구릉, 하얀 허벅지. 너를 내어주는 모습은 꼭 이 세상을 닮았구나. 우악스런 농사꾼인 내 몸뚱이는 너를 파헤쳐 대지의 밀밭에서 아들놈이 튀어나오게 한다 터널처럼 난 홀로였다. 새들은 도망첬으며 밤은 엄청난 계략으로 나를 침범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난 너로부터 떠났다 무기처럼. 내 활시위에 메워진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멩이처럼. 하지만 복수의 시간은 다가왔다, 넌 나를 사랑하고 있다. 가죽의, 이끼의, 갈증나는 단단한 젖의 몸. 아, 젖가슴 사발! 넋이 나간 눈동자! 음부의 장미들! 네 슬프고 느릿한 음성! 내 연인의 몸이여, 난 네가 상냥하길 고집하리라. 나의 목마름, 끝없는 번민, 막막한 행로여! 영원한 목마름, 어두운 수로들, 끊임없는 피로, 가없는 고통이여. 스페인의 시인 로르카는 네루다를‘철학보다 죽음에 더 가깝고, 지성보다 고통에 더 가까우며,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고 평했다. 네루다는 칠레 공산당 입당 이후 박수갈채와 가시밭길의 삶을 걸었던 시인이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첫 번째 사랑의 시는, 열 여섯 살에 만난 테레사와 열 일곱 살에 만나 친구
봄의 정치 고영민 봄이 오는 걸 보면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밤은 짧아지고 낮은 길어졌다 얼음이 풀린다 나는 몸을 움츠리지 않고 떨지도 않고 걷는다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만으로도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지나가도 상처가 되지 않는 바람 따뜻한 눈송이들 지난겨울의 노인들은 살아남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단단이 감고 있던 꽃눈을 조금씩 떠보는 나무들의 눈시울 찬 시냇물에 거듭 입을 맞추는 고라니 나의 딸들은 새 학기를 맞았다 고영민 시인의 봄은 정치로서의 봄이다. 정치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는 행위라고 말 할 수 있다면, 봄은 그것들을 대신해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움츠리지도 않고 떨지도 않고 걸을 수 있는 봄은, 억압하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밝고 건강한 국가에서나 가능한 봄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몸을 지나가도 상처가 되지 않는 바람’이 있고 ‘따뜻한 눈송이들’이 축복처럼 내리는 것이다. 혹독한 시대를 건너온 노인들은 살아남아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고, 나무들은 단단히 감고
햇 빛 유이우 모두 다 손을 잡고 뛰어내렸다 얼굴 가득히 고개가 아픈 옥상 호시절이 저 멀리 기차처럼 지나가고 청바지 같은 하늘 속으로 기적이 걸어나가지 않아도 산책이 많은 몸이었습니다 도착할 거라 믿었던 발도 없이 우리들은 늘 세상 속이었고 커지며 사라지며 세상을 고요하게 살아내기 시작했다 유이우 시인의 첫 시집『내가 정말이라면』은 독자를 당황하게 한다. 그녀의 시는 다르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 다른 것이 이 시인의 매력이다. 그녀의 시에는 시론의 어느 덕목도 숨어 있지 않다. 시론의 낡은 틀에 얽매이기를 거부한 시, 기존의 시집과는 다른 곳에 놓여지기를 꿈꾸는 시가 그녀의 시세계다. 제목을 향해서 시문이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녀의 시는 서로 엇나가는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면 메시지가 형성되게 마련인데 그녀의 시에는 그러한 운동성이 없다. 어디에서 감동을 건져 올려 신문지면을 채울지가 문제다.「햇빛」은 그나마 작은 감동이라도 전할 수 있겠다 싶었다. 어린 날의 기억은 옥상에 머문다. 내려다보면 뛰어내리고 싶은 옥상에서는 저 멀리 호시절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그 시절, 하늘은 청바지처럼 진한 코발트빛이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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