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복숭아 나무와 오얏나무는 진딧물부터 하루살이 벌레들이 많아 앉아서 쉴만한 장소는 못된다. 그럼에도 그 나무 아래는 자연스럽게 길이 생긴다. 단맛나는 과일 때문이다. 덕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다. 권한 것도 아니지만 자연히 사람들이 모인다. 거기에는 덕이라는 단맛을 나눠줄 수 있어서다. 옛 백성들은 훌륭한 군주의 조건으로 덕을 꼽는다. 덕이란 백성들에게 경제적 이득을 주는 행위라 한다. “군주가 훌륭한지 아닌지, 저잣거리의 일반 백성들이 어찌 알랴.”하고 백성들을 하찮게 여기는 군주가 더러 있기도 하나 백성들은 어느 군주가 경제적 이득을 줄 군주인지 아닌지 분명히 안다. 그 군주를 모르겠거든 그가 쓰는 사람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라 했다. 주역 중지곤괘 제1효에 나오는 말로, 가을 서리가 밟히기 시작하면 곧 겨울이 닥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군주가 어떤 사람을 들어쓰느냐에 따라서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풍성한 가을이 오느냐, 아니면 춥고 배고픈 빙하기가 오느냐를 가늠하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목수라도 나무를 켤 때는 먹줄을 따르는 법이다. 이는 곧 행정경험을 말한다. 행정경험이 풍부한 군주가 나와서 백성들의 삶에 질을
[용인신문] 조선에는 3대 암군이 있다. 서자 출신 방계 임에도 16세에 권좌에 오른 선조는 1608년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55세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재위 기간으로만 친다면 장장 41년이다. 7년간의 임진왜란으로 나라를 결딴낸 인물이기도 하다. 아홉 단으로 쌓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손은 뒤로 묶고, 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등에 짊어지는 함벽여친銜璧輿櫬의 예와 한번 무릎을 꿇을 때마다 세 번 이마를 땅에 찧어 피를 내기를 세 번씩 모두 아홉 번을 해야 한다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욕을 당한 인조. 1790년 명군 정조가 서른아홉 나이에 수빈 박 씨에게서 득남하는데 그 아들이 훗날 승어부를 못한 조선왕조 멸망의 문을 연 임금 순조다. 나라를 망쳤음에도 백성 누구도 그런 임금을 탄핵하지 않았다. 그만큼 세상이 어두웠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되는 데는 백성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임금을 먹여 살리는 것은 백성들인데 백성에게는 세금 낼 의무와 부역의 책임만 있고, 권리는 없던 셈이다. 어리숙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어두운 시대임이 분명했다. 그나마 지금은 세상이 조금은 밝아져 최소한 나라를
[용인신문] 맹자가 살던 시대에 현자가 셋 있었으니, 그 중 양주는 “내 몸에서 한 호리의 털을 뽑아서라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해도 나는 하지 않겠다”고 했고, 묵자는 “내 머리 꼭대기 정수리를 갈아 발꿈치에 이르는 것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하겠다”고 말한 인물이다. 그러나 자막은 “양주도 묵적도 다 틀렸다”며 그 중간을 잡은 인물이다. 맹자는 이 세 현자를 이렇게 평가했다. “양주는 인仁을 해치는 자요, 묵자는 의義를 해치는 자며, 자막은 시중時中을 해치는 자이니, 이 모두는 하나를 들어 백 가지를 폐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이유에 대해 맹자는 “훌륭한 임금이 나오질 않아 제후들은 방자해졌으며 처사들은 멋대로 정치를 했고, 양주와 묵적의 말이 천하를 휩쓸었다. 천하의 말 중엔 양주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묵적에게 귀의한다”고 말했다. 양주나 묵적이나 자막 이들은 개인적으로 볼 땐 나름 훌륭한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맹자는 굳이 조목조목 예를 들어 이들은 훌륭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다. 나라를 다스림에는 두 개의 축이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가 있고, 군주를 가르치는 현자가 있는 것이다. 공자가 쓴 춘추
[용인신문] 공자가 살던 시대에는 주나라를 중심으로 제후국이 있는데 주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은 왕이라는 호칭을 쓸 수가 없다. 이에 주나라 왕은 제후국 군주들에게 작위를 주는데 나라의 도덕적 역량 및 벼리의 조건을 따져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이렇게 다섯 개의 작위를 구분해서 내려준다. 공자의 나라인 노魯나라는 첫 번째 서열인 공公이 아닌 두 번째 서열 후侯라는 작위를 받는데 공자는 춘추경을 기록하면서 후侯의 지위에 있는 魯나라를 공公의 지위로 올려 군주의 명칭을 장공, 희공, 소공, 애공, 이런식으로 기록한다. 이는 魯나라만이 역사 기록의 중심이라는 공자만이 할 수 있는 필삭筆削인 셈이다. 여기서 노나라 국정의 독특한 면이 있는데 군주와 신하로서의 국정운영이 아닌 여러 명의 대부와 읍재들이 각 지역을 나눠 맡아서 노나라 국정에 함께한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이 있고, 각 당의 당수가 있는 거와 비슷한 이치이다. 여기다가 노나라에는 종속한 부용附庸국이 있다. 주루邾婁나라와 또 속국 주루邾婁 속나라가 그런류의 나라들이다. 문제는 각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대부들이나 혹은 부용국 또는 속국 중에서 백성을 잘 먹여살리지 못하는 대부라든가 읍
[용인신문]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장땡”이라는 말은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식의 뒤틀린 결과 우월론이다. 이왕 갈 서울이라면 바로 갈 것이지 왜 하필 모로가야 겠는가. 물론 거기에는 나름의 고충은 있으랴. 다수가 그렇게 한다 해도 그렇게 해선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정치인이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치국과 평천하에 앞서 수신과 제가를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우선은 나를 돌아보고 내가 무흠한가 그렇다면 가족을 돌아봐야 한다. 여기에서도 누군가에게 책잡힐 일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때는 치인治人길로 들어서도 된다. 나와 내 가족은 의혹 투성이 인데 남을 다스리겠다고 한다? 그건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출마자야 당선만 되면 그만일지 몰라도, 이쯤 되면 국가의 부끄러움이요, 국민의 수치다. 국가라는 거대의 집단을 책임지고, 국민을 이끌어가야 하는 그런 막중한 자리에는 거기에 걸맞는 인물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되지도 않는 말을 공약이랍시고, ‘던지기’ 식으로 뱉어낸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경박한 일은 없으리라. 그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 몫이기 때문이다. “하나라 마지막 왕인 걸 왕과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이 천하를 잃
[용인신문] 논어 학이편 첫 문장을 요약하면 세 마디로 압축된다. ‘배워서’ ‘기뻤는가’ ‘그렇다면 군자되시게’ 이다. 곧 공부는 기쁘게 하되 그 완성은 군자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군자라는 말은 한마디로 ‘이거다’라고 단정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군자라 하면 훌륭한 사람 정도쯤은 된다. 군자에 이르는 과정에는 몇 개의 덕목이 있다. 대학 책에서는 이를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명토 박는다. 연의하여 풀어쓰면 이렇다. “몸을 닦았는가? 그렇다면 결혼을 하시게. 결혼해서 가정을 잘 이끄셨는가? 그렇다면 치국을 하시게. 치국을 해서 나라 안 온 백성들이 등따습고 배불렀는가? 그렇다면 평천하를 하시게.”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얼추잡아 2000하고도 500년 쯤 전에 공자 아들의 아들이 제자를 가르치면서 했다는 말이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거, 그것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가정을 이끈다는 거, 그것은 자신의 몸을 닦음에서 비롯된다. 착하게 살면서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멀리하는 거, 이것이 몸을 닦는 수신의 첫 번째 덕목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귀에 딱지가 지도록 들어온 말중에 하나가 “착하게 살거라”라는 말일 것이다. 부모
[용인신문] 논어 술이편7-18 문장에 섭땅의 군주 섭공이 자로에게 물었다. “그대의 스승 공자는 어떤 분이십니까?” 이에 대해 자로는 단 한마디도 못했다. 아마도 스승께서 워낙 크신 분이시라 딱 잘라서 말하기가 어려웠으리라. 자로는 돌아와 스승께 섭공과의 만남에서 스승이 어떤 분이냐 묻기에 “저는 차마 뭐라 답할 말이 없었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니 공자는 수제자 자로의 속 깊은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랑곳없이 분기탱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왜 말하지 못했느냐?”라고. 아마 모르긴 해도 공자는 서운했으리라. 명색이 수제자라고 자처하는 것이 스승을 위해 나팔은 고사하고 뽐뿌질도 제대로 할 줄도 모르니 꽤 서운했으리라. 이와 비슷한 일이 사마천 사기에 기록이 있다. 계손사의 아들 계강자는 용인술에 능한자다. 노나라 애공 7년 때 오왕 부차하고 영토분쟁으로 마찰이 있을 때에도 공자의 제자 자공을 보내 싸움의 물줄기를 아예 월나라로 돌려버린 일도 있다. 이로 인해 오나라와 월나라는 죽기살기로 싸운다. 흔히 오월춘추의 고사가 쏟아져나온 전거가 이 때문이다. 제나라가 쳐들어왔을 때는 공자의 제자 염유를 좌장군으로 삼아 승전보를 울린다. 이일 후 사기공자 세가편
[용인신문] 소문난 잔치 망건 팔더라고? 지금 강호는 차기 대권을 누가 거머쥐느냐로 생난리가 났다. 이제 팔 십여 일만 지나면 누가 되는 그중에 한 명은 대통령이 된다. 남아로 태어나 나이가 스물이 먹도록 나라를 평하지 못한다면 후세에 누군들 나를 남아라 하겠는가. 이십 중반 나이에 느닷없는 모함으로 비명에 횡사로 남이장군이 썼다는 시구인데 이게 어찌 스물 갓 지난 약관 선비의 붓끝에서 나온 경구라 하겠는가. 그야말로 으리으리한 호연지기라 하겠다. 이십 대 중반 나이에 병조판서를 지냈다는 남이南怡로 말할 것 같으면야 17세에 무과 장원급제하고 이시애의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썼다는 북정가. 예종 원년 1468년에 역모로 간신배들의 낡은 것은 없어지고 새것이 펼쳐질 징조라는 제구포신지상除舊布新之相에 죽어갈 때까지 숨 가쁜 일생이었으리라. 조선 개국공신 전 영의정 남재南在의 현손이요 태종대왕의 부마인 의산군 남휘南暉의 손자요 아버지 군수 남빈에 이르기까지 왕족 대우를 받았다 하니 그야말로 조선사에서 몇 안 되는 명문 중의 명문의 손이다. 어디 이뿐이랴 한명회. 신숙주. 권람. 수양대군 3걸로 불린다는 그중 장인이 권람이라는 데야. 그러나 일찍 피는 꽃이 빨리
[용인신문] 맹자 이루-장구 하편에 “군주가 죄 없는 백성을 죽이는 일이 있다면 선비는 주인을 바꾼다”고 했다. 시경 관저편엔 ‘언자무죄言者無罪 문자족계聞者足戒’라는 말이 있다. “말하는 사람은 죄가 없나니 듣는 사람이 경계로 삼으면 족하다”라는 말이다. 논어 양화 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선비가 덕을 버리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 길에서 들은 것을 길에서 말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저잣거리의 말을 확인도 안하고 옮겨 대면 안 된다는 경책이다. 그럼에도 예외조항을 두는데 시詩가 그것이다. 논어 위정편의 기록은 이렇다.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생각에 삿됨이 없다. 사람 살이에는 크게 두 개의 줄기로 나뉜다. 오늘만 살 것인가, 내일 저 너머에까지 살 것인가. 논어 위령공편의 기록은 이렇다. 군자는 죽기 전에 명성을 알리기를 원한다. 그런데 400년 후 사람 사마천은 죽기 전의 명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죽은 다음날 아침에 있을 자신의 초상화에 대해서만 걱정한 인물이다. 보임안서報任安書는 이렇게 심정을 밝힌다. 내가 구차하게 살기 위해 더러운 감옥에 갇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까닭은 비루하게 죽어 후대에 나의 글이 드러나지 않을까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용인신문] 중용 20장에서 애공이 ‘정치’를 물으니 공자는 “사람이 있으면 정치는 행해질 것이지만 사람이 없다면 정치는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사람은 백성을 위하는 군주다. 시경에 “은나라가 백성의 마음을 잃지 않았을 때는 능히 하늘과 좋은 짝”이라고 했다. 이것은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나라를 얻는 것이고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나라를 잃게 된다는 말이다. 이를 정조 이산은 오경백편 대학 10장주에서 이렇게 해석한다. 그러므로 백성을 다스리고자하는 위치에 있는자라면 덕 쌓기를 애쓸 것이니 덕이 쌓이면 백성이 따를 것이고, 백성이 따르면 땅을 얻으며, 땅을 얻으면 재물이 날 것이며, 재물이 나면 이에 따른 쓰임이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재물의 쓰임은 백성들에게 최소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삶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수기치인이다. 사실 공자의 모든 답변은 수기치인 네 글자로 설명이 가능하다. 수기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요, 치인은 개인의 욕심보다는 공적이고 정의로운 욕심이 더 강함이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통치행위는 어렵다면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쉽다면 또한 쉬울 수도 있는 일이다. 곧 국민을 불안과 걱정
[용인신문] 공자와 더불어 유가의 대표적 사상가로서 인류 사회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물이 맹자다. 맹자의 말은 특히 군주에게 있어서 벼리가 잘된 날선 검과도 같다.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군주가 책임져라. 이 말은 맹자가 제나라 선왕에게 한 말이다. 그중 한 내용은 이렇다. “왕의 신하 가운데 그 아내와 자식을 친구에게 맡기고 초나라에 유람하고 돌아왔는데 그 친구가 그 아내와 자식을 굶주리게 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있다. 이 물음은 자칫 이익의 효율성이란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수 많은 정치가들이 경제적 이利를 앞세우며 국가 가치를 국민적 이익에 두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는 정치하며 국민을 위한다는 저들은 다는 아니지만 해당 당사자들의 배만 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공자 맹자에게 있어서 국가의 가치는 이익 너머에 있는 정의에 둔다. 이익의 효율성은 기업의 덕목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경제 논리를 앞세워 기업 경영하듯 이끌어 간다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헌법이 보장한 법과 원칙이라는 법치를 앞세워 국가를 이끌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하책에 하수다. 본래 법이란 누군가를 벌주기 위함이 아니라 선량한 사람을 보호하는데
[용인신문] 인류 지식의 보고라고 하면 흔히들 고대 그리스를 꼽는데 고대 그리스에는 대현大賢의 반열에 오른 일곱 명의 인물이 있다. 이름하여 칠현자라 부른다. 그들이 쓴 책을 다 합쳐도 첫 줄을 넘어가지 못하는 책이 있는데 곧 공자의 논어 학이편 첫 줄을 말한다. 학이편 첫 줄은 단 세 단어로 압축된다. 배워 즐거웠는가, 그렇다면 군자가 되어라. 유럽의 어느 철인은 공자를 일러 진리를 해석해 주는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여기서 ‘논어는 성경의 각주다’라는 말이 나왔다. 또 어떤 이는 공자를 일러 천하에 평화를 가져다준 사람이라고 했다. 독일의 철인 헤겔 같은 사람은 “논어는 단지 도덕적 격언집에 불과하다”라고 한수 아래로 놓고 보기도 했다. 말은 맞는 말이지만 정답이 아닐 뿐, 두보의 시를 읽어보면 “뭐 이정도를 가지고 시성詩聖 운운한단 말인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때는 해석본을 함께 읽었을 때 나오는 말이다. 두보의 시를 한문으로 읽고, 한문으로 해석해본 사람이라면 맨정신으로는 못읽는다. “하나님도 두보 앞에 오면 낱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논어서설 끝부분 정자의 말을 인용해 쉽게 말한다면 헤겔은 논어를 제대로 안 읽었던가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