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군데서 이익이 많이 쏟아져 나오는 일이나 장소를 노다지라고 한다. 그런데손대지 말라의 뜻인 노 터치(No Touch)와는 발음상의 유사성에서 유래한 것 이외는 딱히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이 말에는 19세기말 조선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금광을 찾아 캘리포니아까지 이르렀던 미국인들은 흑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대포로 협박하여 일본을 개항시켰다. 황금의 나라 지팡그 라고 인식했던 일본에서 금맥을 찾지 못한 미국은 1866년 조선에 제너럴 셔면호를 보냈지만 실패했다. 무도한 나라 조선을 개화시켜 주겠다며 무자비한 침략을 자행한 신미양요의 이면에는 조선에 매장 확인 된 풍부한 금광이 목표였다. 흥선대원군의 완강한 저항에 무력도발이 실패로 돌아가자 청을 앞세운 통상교섭을 통해 마침내 미국은 1882년 조선과 수교한다. 이때 미 공사관 의사로 입국한 알렌이 명성황후 민씨의 조카 민영익을 갑신정변 당시 목숨을 구해준 인연으로 왕실의 극진한 보살핌을 얻었다. (알렌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 건립, 뒤에 제중원으로 개명) 이후 공사관의 외교업무를 맡아 보게된 알렌은 조선 전체 금 생산량의 4분의 1을 차지하던 평안도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미국에
고려사 열전에 신우로 기록된 우왕과 신창으로 기록된 창왕. 이성계와 급진파 정도전 세력에 의해 신돈의 자식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우왕은 누가 낳은 아들일까? 정말 신돈의 여종 반야의 아들인가? 보통, 사극에서는 노국대장공주(통칭 공주)가 죽고 공민왕이 방황하다가 신돈의 집에서 공주와 닮은 반야와 동침하고 태어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바로 우왕이 태어난 생년이다. 우왕은 1365년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있다. 1365년 2월 공주가 노산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 기록이 다 사실이려면 우왕은 공주가 죽은 후 바로 잉태되었거나, 공주가 살아 있을 때 잉태되었어야 한다. 문제는 너무 시간이 짧다는 것이다. 가능한 것은 공주가 살아 있을 때 아이를 가졌어야 한다는 것. 아니라면 아이를 가진 여인의 신변 보호를 위해 신돈의 집에 위탁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까지도 신돈은 공민왕이 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으니깐. 사극에서 등장하는 공주는 똑똑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며 공민왕 즉위와 반원자주 정책의 중심 역할을 한 것은 인정하지만, 어찌되었던 투기가 심한 몽골 여인 이었다. 그런 성격을 알았던 공민왕이 우왕의 생모인 반야를
미련 곰탱이와 까칠한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100일 동안 먹겠다고 환웅을 찾아온다. 경쟁자인 호랑이가 사라진 상태에서도 곰은 21일을 먹고서 여자의 몸으로 변한다. 13세기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등장한 마늘의 효능은 경이로울 뿐이다. 그래서일까 현재에도 마늘은 건강을 위해 매우 소중한 밥상의 찬거리다. 마늘과 함께 있는 고추는 어떠한가. 16세기 중반에 포르투갈인이 일본에 전래한 것으로 알려진 고추는 1592년 임진왜란 중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고추를 왜겨자라고 쓰고 있다. TV에서 김치냉장고를 광고하는 모델들이 아삭 하고 맛있게 먹는 빨간 김치의 역사는 17세기에 시작된 것일까? 빨간 김치는 아니지만 하얀 김치는 고려의 이규보가 남긴 동국이상국집에 염지(鹽漬)라고 표기한 것으로 볼 때 예전부터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초반에 딤채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구개음화 현상으로 김채로 변하여 발음하기 좋은 김치로 불려졌을 것이다. 김치의 어원이 소금에 절인 채소의 의미로 본다면 17세기 이전에 한반도에 살았던 선조들은 싱싱한 김치보다는 푹 절여진 김치를 먹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배추를 소금에 절여서 먹었을까? 저장 기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