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아느 네스(Arne Naess)의 근본생태학(deep ecology)을 계승하고 확대, 심화시킨 드볼(Bill Devall)과 세션즈(George Sessions), 카프라(Fritjof Cafra), 스나이더(Gary Snyder) 등 근본생태론자들은 오늘날의 생태위기와 현대인의 자아 및 정체성 상실에 주목하고, 이것을 현대 문명의 쇠퇴 증후로 파악한다. 드발과 세션즈는 사람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은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생명중심적 평등(biocentric equality)을 지향하는, 유기체적 전체(organic wholeness) 또는 큰 자아(Self)라고 불리는 공동체에서 사람과 사람이 아닌 생명체들이 모두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머레이 북친(Murry Bookchin)을 개조(開祖)로 하는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은 생태위기의 원인을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 세계를 상품화하려는 시장 논리에 기인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찾기 때문에 사람이 지닌 지배 속성에 주목한다. 정치학에다 생태학을 접목시킨 사회생태학은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열을
[용인신문] “주변이 주변인 것은 상황이 변했는데도 자기를 억압하는 기존의 위계를 스스로 고수하기 때문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중심과 주변이 어디냐갸 아니란 것이다. 중심과 주변의 경계는 사라져가고, 유동적이다. 중심이든 주변이든 내외부의 시선보다 내부에서의 생각 차이만 있을 뿐이다. 용인은 이제 서울의 주변도시가 아니다. 용인시 최대의 면적을 점유하는 처인구도 주변구가 아니다. 선거철 마다 ‘일류 수지’라고 찬사를 보내(?)는 낙하산 후보들의 낯뜨거운 구호에 전국구 스타를 만들어 줬던 수지구도 용인의 외곽이 아니다. 1973년 10만에 불과했던 용인은 2002년 50만의 중소도시로 성장했다. 팀 마샬의 주장대로 “우리의 삶은 언제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에 의해 형성돼 왔다.” ‘생거용인’의 마음으로 들어 와 살기 시작한 용인의 가치는 현재형이자 미래형이다. 그러므로 2017년 백만을 돌파한 대도시로 성장한 용인을 중심과 주변으로 나누는 이분법 자체가 시대 착오이다. 사람은 스쳐 지나가도 지리적 요소는 오랜 세월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니 지금, 용인시야말로 발상의 전환, 그것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해볼 수 있는 막바지 기회다. 1789년 혁명이후 파리
[용인신문] ‘무상(無常)’이란 말이 있다. ‘인생무상’이란 말이 더욱 익숙한데, 사람이 살면서 항상 같지 않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최근 처인구의 변화에서 ‘무상’을 절감한다. 10년 전에 수지구, 기흥구의 도시화를 목격하며 이젠 ‘용인’은 처인구에 국한될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하였다. 용인은 조선 초기에는 용구현과 처인현의 합체요, 일제 강점기에는 용인군과 양지군을 합친 지역이다. 지금의 용인시내 권역은 지역의 정통성을 말살하려는 식민지 정책에서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이다. 역참과 주막이 도로에 있었을 뿐인 곳에 백년도 안 되는 기간의 변화를 수용하면서는 인구 100만 도시의 중심 시가지로 형성되어 있다. 한 때 원삼면 두창리에는 초등학교 분교가 있었는데, 현재 국내 최대의 산업단지로 조성되고 있다. 요즈음 모현읍과 포곡읍에서는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변했다.”는 말을 실감한다. 길조차 없었던 곳에 고가도로가 교차해서 설치되고 있다. 산속 깊숙이 전원주택이 밀집해 있고, 집단주택이 건설되고 있다. 옛날엔 나루터가 있었고, 숲이 무성했다는 고림리 지역엔 1만 세대의 아파트가 조성되고 있다. 이젠 처인구에서도 ‘용인’은 볼 수 없겠구나 싶다. 토박이를 자처
[용인신문] 낙태법의 개정 시한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새로 발의된 낙태법은 14주까지 허용, 24주 내에서는 조건부로 임신 중지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배우자 동의 요건도 삭제된다. 모자보건법도 개정된다. 미성년자도 보호자의 동의 없이 시술이 가능해졌다. 신념에 따라 의사의 시술거부도 인정했다. 현재 청와대 청원에는 여성의 건강과 생명존중을 이유로 낙태를 전면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과, 반대로 폐지를 위해 싸워왔던 이들은 주수 제한 없이 완전한 낙태를 허용하라는 청원이 나란히 올라와 있다. 여성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게 되는 사정을 어찌 법이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떤 법도 인간사를 앞서갈 수도 따라잡을 수도 없다. 그나마 이제라도 허용 요건이 발의된 것만으로도 필자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어떤 여성이 자유롭게 가볍게 낙태를 할 수 있겠는가. 종교계가 주장하듯 생명을 경시하는 마음으로 낙태를 하는 여성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낙태를 선택한 여성들을 비난하고 ‘낙태프리’ 라며 주장하는 이들이야 말로 여성의 삶은 존중하지 않는 것이며 생명존중 사상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임신 14주까지 허용하는 개정법을 낙태프리와 같다는 이들의 외침에 필자는 동조할 수 없다
[용인신문] 센트럴파크는 미국 뉴욕시 맨해튼 중심부에 있는 공원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자 세계 수백 개 도시에 산재해 있는 흔해 빠진 공원의 이름이기도 하다. 성남시를 대표하는 공원도 중앙공원이고 인천에도 센트럴파크가 있다. 유럽의 큰 도시들에 중앙역이 있듯이 수많은 도시에 센트럴파크가 있다. 중앙(센트럴)을 좋아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 것 같다. 종합운동장 부지에 건설하고자 하는 공원의 명칭을 가칭 센트럴파크로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 용인시, 특히 처인구가 술렁이고 있다. 용인시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서 한국에서 공원은 어떤 정치적 과정과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서울의 대표적인 공원은 한강공원이다.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공원은 일정한 규모를 기준으로 볼 때 장충단공원일 것이다. 한강공원이 넓은 면적을 가진 것은 평가할만하나 강변에 자동차 전용도로를 먼저 만들어 사람 중심의 접근성을 갖추지 못했다. 철저하게 자동차 중심의 사고로 만들어진 것이 한강공원이다. 공원에 접근하려면 길고 칙칙한 지하 보도를 통해야 한다. 차라리 강변도로에 100m 정도 너비의 건널목을 곳곳에 설치하는 것이 인간적이었다. 넓은 한강변에 조성했음에도 불
[용인신문] 백군기 시장의 종합운동장부지 공원조성 계획은 뜬금없을 뿐만 아니라 황당하다. 전임시장 시절 종합운동장 부지에 공용터미널을 이전하기로 하고 여론수렴과 시행계획의 골간이 잡혔던 핵심 대중교통인프라 사업이 시장의 독단적 결정으로 백지화될 처지에 놓였다. 복합공용터미널이 불필요한 것이라면 백지화해도 무방하다. 현재 사용중인 공영터미널은 1980년대 용인이 시승격도 되기 이전에 조성된 것이다. 비좁고 불결하며 복잡하다. 자동차 보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대중교통은 근근이 명맥만 유지해온 탓에 협소하고 불편한 공용터미널에 대해 큰 저항 없이 30여년을 버텨왔다. 베이비 붐 세대가 한창 경제활동을 하던 시절 대중교통은 노년층이나 이용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베이비 부머가 은퇴하기 시작하면서 노년층은 급격히 증가하여 2017년 고령사회에 진입했고 초고령사회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한국은 3~4년 후 초고령사회 진입이 확실시 된다. 초고령사회가 된다는 것은 대중교통이 중요한 이동수단이 될 거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60대에서는 자동차 면허 반납이 유행이다. 자동차 유지비를 부담하기도 벅차고 순발력이 떨어져 운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별
[용인신문] 이미 다윈이 ‘진화론’에서 말했던 불편한 진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타적 행동을 하는 이기적인 동물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생각은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간다. ‘당연한 것’인데도 가끔 쓸데없는 이상향에 빠져들었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에게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내 탓이다. 그러므로 원망은 저들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하련다. 모이지 말라고 그렇게 부탁해도, 전국에서 모여든 일부의 사람들은 분노와 피해의식을 표출했다. 내일이 지구 종말의 날인 것처럼, 막무가내 악다구니로 소리 지르는 모습은 공포였다. 그동안 얼마나 한이 맺혔던 것일까. 그들의 외침이 광장에 가득한 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사회에서 선(善)과 악(惡), 힘과 정의는 객관적인 가치가 아니라 주관적이며 경쟁적인 담론이 돼버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국민’,‘자유’ 같은 단어들은 두리뭉실하다. 논점이 흐려지고 의미가 분산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런 말을 자주 인용하는 사람들의 오독(誤讀) 때문이다. 개인적인 삶의 경험치일 수 있으나, 타인을 열받게 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 자주
[용인신문] 용인시는 2020년 현재 인구수 109만 명이 넘었고, 그 면적은 591.34㎢로 서울 면적 605.25㎢의 98%에 버금가는 대도시로 급성장하고 있다. 행정적으로는 2016년부터 수원, 고양, 창원등과 함께 특례시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례시를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행정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것임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사법 서비스에 관한 면은 용인시의 규모에 걸맞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법원의 설치를 위하여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고려되어야 하므로 쉽지 않다는 점은 안다. 이미 용인지원의 설치를 위하여 2013년도에 국회에서 ‘각급 법원의 설치와 관할구역에 관한 법률’의 개정안을 발의한 바도 있었으나 통과되지 않았다. 2016년에도 용인지원의 설치를 위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되었으나 역시 통과되지 못했다. 이에 반하여 2013년에는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이 설치되었고, 2020년에는 인천지방법원 북부지원이 설치되었다. 이제는 용인시에도 수원지방법원 용인지원의 설치가 될 때라고 보인다. 법원의 설치를 함에 있어 한결같이 ‘지역주민들의 법원 접근성을 향상시키고 사법서비스의 질을 제고하기 위하여’, ‘지역주민들의 사법서비스 이용
[용인신문] 박지원. 한국 정치사에서 그 만큼 호불호가 분명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박지원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건배하던 장면이었다. 김정일은 호기롭게 원 샷을 했는데 김 대통령은 간신히 와인 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박지원의 모습은 절절했다. 박지원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여 국정원장이 되었다. 2000.6.15. 남북정상회담의 당시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21대 총선에서 낙선하여 야인이 된 박지원은 탁월한 정치적 식견으로 종편의 스타가 되었다.방송에서 그를 보는 재미는 쏠쏠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를 국정원장에 지명하고 청문회를 거쳐 임명하면서 방송에서 특유의 재치를 발휘하던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대목이다. 문 대통령의 인사 중 가장 파격적인 것을 꼽는다면 윤석열을 중앙지검장에 임명한 것과 박지원을 국정원장에 보한 것일 것이다. 박지원이 국정원장에 지명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고 진짜 안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대북 사령탑이 되었다는 생각에서 문 대통령의 탁월한 인사권 행사에 감탄했다. 아직 그가 보여
[용인신문]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이 있고 이유 없이 좋은 사람이 있다. 이유 없이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했고 이유 없이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기도 했다. 누구나 모두를 공평히 친절하게 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이란 차별당하고 또 차별하는 존재이다. 자신이 처한 곳에서 미움을 받는다면 중이 절 싫으면 떠나듯 떠나면 그만이다. 그러나 단순이 친교모임이 아닌 자신의 꿈과 미래와 생계가 달렸다면 누구든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그것을 알고 있는 자들은 그 약점을 이용한다. 그들은 약자에게 잠재적 폭력성을 드러낸다. 국가대표 트라이애슬론 최숙현 선수가 목숨을 끊었다. 팀 닥터와 코치와 감독과 선배선수의 가혹행위에 시달렸다는 유언을 남겼다. 최악의 선택을 하기까지 그녀는 이들의 폭행을 고발하고 단체에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누구도 그녀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체육계의 비리와 폭력사태는 우리에게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지난해 유명 축구감독의 횡령과 학부모 성폭력 사건, 국가대표 빙상 코치의 지속적인 성폭력 사태로 우리의 분노 게이지는 이미 최고점에 도달했었다. 지난 9일에는 피겨 유망주의 어머니가
[용인신문] 코로나 19는 내게도 작업의 변화를 줬다. 사람이 모이는 강연의 줄줄이 취소됐고 전시장은 문을 닫았다. 대신 홀로 카메라 들고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래서 주로 찾은 곳이 우리 북쪽 변경이랄 수 있는 파주 연천 철원 같은 곳이다. 비무장지대에 가까운 이곳은 한반도 평화에 무척 민감해 남북관계 호전과 악화에 일희일비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통일이 다가 온 것처럼 전방 GOP(관측초소)들이 폭파되더니 얼마 전에는 관계가 악화 돼 개성의 연락사무소가 폭파되는 반전이 일어나고 말았다. 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을 찾은 나 역시 주민들의 그런 분위기를 금세 파악한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고 관광객을 더욱 찾을 길이 없다. 그렇게 텅 비고 낡아가는 마을을 찍는 나도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이 사진 작업은 통일부의 ‘DMZ 지도’라는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3년에 걸쳐 비무장지대와 인근 지역을 취재해 방대한 북쪽 변경의 정보를 지도라는 형식으로 담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되자마자 장관을 사직했고 이 사업도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작은 기록 사업마저 추진하던 기관의 변동으로 취소되는 판에 현지 주민들의 절실한 숙원
[용인신문] 나의 소원은 (한)반도의 대륙화이다. 내 소원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라 하더라도 이런 소망을 가져 본 적은 있을 것이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베이징에 가서 점심을 먹고 싶다는…. 사전에서는 소원과 소망은 ‘바라고 원함’으로 같은 의미다. 하지만 일상에서 사용할 때 조금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다. 소원은 신념의 문제로, 주체자가 바라는 것으로 작동될 때 사용한다. 오래도록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으니까. 소망은 신앙과 믿음의 영역에서 작동된다. ‘바라보는’ 대상을 향한 ‘바라보기’의 타동사로서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해석의 행위일 뿐이다.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가? 묻는다면, 대게는 자기 자신, 가족, 연인… 까지는 술술 나올 것이다. 그리곤 제각각 다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순간 내게 문제가 발생하면,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 죽고 못 살 듯이 사랑해도 ‘곁에 없는 이’는 소용없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대륙화는 아직 기다려야 하는가. 죽은 지 40년이 지났어도, 또 30년이 가까워도 이들을 향한 맹목적인 구애(求愛)는 여전하다. 오늘도 이들과 그들의 소원은 한결같다. ‘까부수자, 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