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가 안 된다는 목회자와 이를 보고 자란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귀신 장사가 안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주역 설괘전(說卦傳)은 묘신문(妙神文)이라고도 하는데 설괘전 제6장에서는 신(神)에 대해 꽤 구체적이다. 신이라는 것은 만물을 묘하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神也者妙萬物)…중략…후에야 능히 변화하여 만물을 다 이루느니라(然後能變化旣成萬物也). 이를 자사(子思)는 중용 16장에서 신은 신묘하여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며,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視之而弗見聽之而弗聞體物)라고 했다.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에 사람들은 신의 신령스러움은 알지만, 그 신이 신이 된 바는 알지 못한다<人 知其神之神 不知其神之所以神>. 고 했다. 그래서 주역에 대한 신의 정의는 이렇다. 천지만물 인간사는 음양으로 다 헤아릴 수 있으나 신은 음양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陰陽不測之謂 神)이라 했다. 주자는 이를 신의 일은 알기 어렵기 때문에 꼭 알 필요는 없다고 뭉뚱그려 말했다. 그런데 공자의 최측근 마부 번지가 귀와 신을 아는 것은 어떠냐는 취지로 앎에 대하여 물은 것이다. 이에 공자 답하길 일반 백성들은 옳음에만 힘쓰면 되고, 귀와 신 따위는 공
뒷배 믿고 설레발치는 자식들? 논어 학이3문장에서 공자 왈, 얼굴빛이나 꾸미고 말만 번지르한 자 치고 인(仁)한 자는 드물다.<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이글의 대구(對句)가 논어 자로27문장이다. 공자 왈, 강하고 굳세고 질박하고 어눌하면 인仁에 가깝다.<子曰 剛毅木訥 近仁> 이 두 문장은 인문학의 정점을 찍는 성리학의 정수다. 논어의 이 글은 사람에 대한 지독한 관찰자로서 사람은 이 두 범위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공자의 고집된 통찰력이 집약된 문장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 범주는 아버지와 아들로 곧잘 회자되곤 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삼국지에 나오는 호부견자(虎父犬子)다. 유비가 죽기 전에 제갈량에게 유언을 한다. 내 아들 유선의 앞날을 부탁하오. 유선이 황제로서 부족하다 싶으면 공이 황제가 되어도 됩니다. 제갈량은 선군 유비의 유언을 받들어 유선을 보필하지만 정작 후주(后主) 유선은 간신들의 말만 믿고 제갈량을 멀리한 결과 제갈량 사후 위나라 사마소에게 항복을 한다. 얼마 후 사마소는 유선을 비롯 항복한 촉나라 신하들도 위로할 겸 연회를 베풀고 악사와 무희로 하여금 촉의 음악을 연주케 한다. 연회 중 흘러나온 촉의 음악을 듣고
교회 세습…가야바의 법정에 서게 될 것 ‘우와~ 돈 들어온다.’ 제법 규모 있는 어느 대형교회 창업주 목사가 자신이 창업한 교회 사무실에서 주일 예배 나오는 교인들을 보고 흡족해하며 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진위 여부를 떠나 이런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이미 교회는 예수가 말하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대 명제에서 훨씬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논어 선진 편에서 하루는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을 물었는데 유독 공자의 답변은 싸늘했다. 공자가 말하길 “사람도 못 섬기는데 뭔 놈의 귀신을 섬기랴. <계로문사귀신季路問事鬼神 자왈子曰 미능사인未能事人 언능사귀焉能事鬼>” 이쯤 됐으면 오늘 선생님께서 불편하신가 보다하고 한쪽에 얌전히 있으면 좋으련만 눈치 없이 또 묻는다. 이번엔 한 술 더 떠서 죽음에 대해 묻는다. 공자는 떨떠름하니 “삶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랴. <계로(季路)왈(曰) 감문사(敢問死) 왈(曰) 미지생(未知生)언지사(焉知死)>”라며 일갈한다. ‘죽고 나서 상다리 분질러지게 진수성찬 차려 놓고 제사 한들 살아생전 술 한 잔 올리는 것만 못하다.<사후만반진수死後萬盤珍羞 불여생전일배주不如生前一杯酒>’는 옛말이 있다.
트럼프한테 혼나지 않았다고 기뻐하는 꼴이라니. 이를 거머쥔자 천하의 패자가 되리라는 전설을 가진 벽이 하나 있는데 화씨의벽(和氏之璧)이다. 이쯤 되니 제웅들은 드러내놓고는 못하지만 내심 화씨벽을 탐할 수밖에. 어느 날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이 화씨벽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강호에 떴다. 진시 황제의 증조부이신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은 막강한 군사력을 믿고 화씨벽을 빼앗아오기로 맘먹는다. 전날에 빼앗아간 조나라 성읍 15개와 화씨벽을 바꾸자고 통보해오니 약소국가인 조나라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거절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진나라에서 전에 빼앗아간 15개 성읍을 되돌려 줄 리도 만무하지만 화씨벽을 안주면 전쟁하겠다는 협박인게 분명했다. 당시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과 법치를 내세워 천하제일강국으로 동쪽의 여섯 개 나라가 조공을 바치는 지경에 이를 만큼 그야말로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찔렀다. 이때 이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인물이 인상여(藺相如)다. 인상여는 세치의 혀로 진나라 소양왕을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들었으며 15개 성읍도 화씨의 벽도 아무 흠 없이 가져왔다. 여기서 완벽(完璧)이라는 말이 생겼다. 화씨의 벽을 완벽하게 가져왔다는 말이다. 이공로로
입신과 양명 사이에서 오명을 낳는 사람들. 삼과기문불입(三過其門不入)은 당서(唐書)에 나오는 말이다. 자기 집 대문 앞을 세 번 지나는 갔으나 집에 들어가지는 않았다는 우임금의 고사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그야말로 열심을 다해 공부를 해서 입신(立身)까지는 성공을 한다. 그런데 양명(揚名)에 이르러는 현달(顯達)치 못하고 오히려 이름과 가문에 먹칠하는 이른바 오명인(汚名人)으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권력을 거머쥔 사람들을 통해서 처음과 끝을 명징하게 보고 있다. 권력을 국민으로부터 위임 받아서 깨끗이 사용하고 마침에 이르러 그 권력을 깨끗이 되돌려놓고 내려오는 사람보다는 권력의 올가미에 걸려 비참한 말로를 겪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순(舜)임금 시절 우의 아버지 곤(鲧)은 9년에 걸쳐 국가의 강과 하천을 관리했는데 해마다 홍수가 나서 나라와 백성들에게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곤은 치수를 관리할 만큼의 열정은 있으나 역량면에서는 함량이 미달인 자였다. 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흐르는 물을 막아대는 흙막이 공사가 전부였다. 일정기간 고였던 물은 넘쳤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보다 못한 임금은 책임을
잊지 마라, 미국가면 거지도 영어는 잘한다. 한비자(韓非子)12. 세난편(說難篇)의 키워드는 ‘듣는 자의 마음을 읽어, 내 말을 그 사람의 마음에 맞춰야한다<說之難 在知所說之心 可而吾說當之>.’로 압축된다. 說은 설. 열. 세. 탈. 네 개의 독음을 갖는데 說을 설로 읽을 때는 설운(屑韻)에 입성으로 수설절(輸爇切)이 되고, 說을 열로 읽을 때는 설운(屑韻)에 입성으로 욕설절(欲雪切)이 되고, 說을 세로 읽을 때는 제운(霽韻)에 거성으로 수예절(輸芮切)이 되고, 說을 탈로 읽을 때는 갈운(曷韻)에 입성으로 타괄절(他括切)이 된다. 혼자 말할 때는 설로 읽어야 하고, <孟子離婁下. 博學而詳說之 將以反說約也> 남에게 말할 때는 세로 읽어야 하고, <史記酈食其傳. 酈生常爲說客 馳使諸侯> 들을 때는 열로 읽어야 하고, <論語學而. 學而時習之不亦說乎> 부의(賻儀)를 보낼 때는 탈로 읽는다. <禮記 檀弓上. 使子責說驂而賻之> 국제 정치에서 說은 요체다. 논어자로편(論語子路篇)13-16문장에서 초(楚)나라의 대부(大夫)섭공이 정치를 묻자 <葉公問政> 공자는 답했다. 가까이 있는사람은 <북한 김정은&g
남자의 계절 가을에 생각해 보는 벗. 증자 왈, “도에 뜻을 둔 군자는 문으로 벗을 만나 벗의 선한 것을 본받아 인(仁)을 돕는다”고 고했다. 쉽게 말하면 군자는 학문을 강론(講論)하는 일로 벗을 모으고 벗의 선한 것을 본받아서 나의 인성(仁性)을 함양한다는 말이다. <증자曾子 왈曰 군자君子 이문회우以文會友 이우보인以友輔仁 論語顔淵> 주자는 이를 보충 설명 했는데 공부하는 벗과 모임을 가지면 도가 더욱 밝아지고 벗의 선한 것을 취함으로써 나의 부족한 인을 보충한다면 덕은 날마다 증진할 것이다. <주자朱子왈曰 강학이회우講學以會友 즉도익명則道益明 취선이보인取善以輔仁 즉덕일진則德日進> 여기서 증자의 인성함양과 주자의 덕일진(德日進) 사이에는 절절시시가 있다. 자로의 벗에 대한 물음으로 공자의 답변에 들어있는 말인데 서로 절절하게 충고하고 격려했음에도 화기애애 한다면 벗이라고 할 수 있다. <자로문子路問 왈曰 하여사가위지사의何如斯可謂之士矣 자왈子曰 절절시시切切偲偲 이이여야怡怡如也 가위사의可謂士矣. 論語子路> 말이 좋아 충고지 양약은 입에 쓰다고 했듯이 입바른 소리는 듣기가 참 힘들다. 더군다나 충고했음에도 화기애애 한
아비의 뺨을 칠자는 자식뿐이다. 자성제인야子(誠齊人也)에서 子는 2인칭 대명사주어 ‘너는’이고, 성(誠)은 부사 ‘영락없는’이며 제인(齊人)은 제나라 사람이고 야(也)는 종결어미이다. 해석을 하면 “너는 영락없는 제나라 사람이구나.”쯤 된다. 사서(四書)엔 가끔 한글어순과 동일한 이런 식의 어순으로 된 문장이 더러 있다. 이 문장은 공손추장구상1문장(孟子公孫丑章句上1文章)에 나오는 말인데 공손/추가 꽤 싸가지 없이 묻는다. <‘공손/추’에서 이름에 축(丑)을 씀은 못된 버릇을 고치라는 부모의 잠(箴)이다.> 선생님이 제나라에서 벼슬을 하시면 관중이나 안자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공손/추문왈(公孫/丑問曰) 부자당로어제(夫子當路於齊) 관중(管仲) 안자지공(晏子之功) 가부허호(可復許乎)> 맹자는 관중이나 안자가 별로다. 이를 모르지 않는 제자 공손추가 그따위로 물은 거다. 에둘러서 그러나 완곡하게 답한다. 너는 ‘영락없는’ 제나라 사람이라 관중과 안자만 아는구나. <맹자왈(孟子曰) 자성제인야(子誠齊人也) 지관중(知管仲) 안자이이의(晏子而已矣)>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公孫/丑)의 축(丑)이다. 공손/추로 읽어
인류의 화약고가 된 동방의 고요한 나라 임진왜란 직전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보고는 전혀 상반됐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황윤길은 전쟁이 난다. 김성일은 전쟁은 없다. 듣는 이로 하여금 꽤나 헷갈리게 하는 말임에 분명하다. 여기서 최종 결정은 임금이 내려야한다. 물론 고통은 백성들의 몫이다. 범인(凡人)들에게는 가서는 안 될 자리가 있다. 어떤 사안을 결정짓는 자리가 그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제 깜냥 것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거다. 능력도 안 되는 것이 한 때 우쭐해가지고 남들이 하란다고 해서 불쑥 덤볐다가는 뼈도 못 추리는 수가 있다. 남북한 상황이 영락 그 꼴이다. 지금 북한의 김정은이가 천지분간모르고 저리 날뛴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천진사방으로 쏴 댈 때는 정치적 계산은 끝났다는 말이다. 음모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저리 행동하는 이면에는 대한민국 정부와 문재인 대통령쯤이야 그까짓 거 정도도 안 된다는 다분히 무시의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거기다가 트럼프를 톡톡 쳐보니까 저거 별거 아니라는 것을 김정은이 확신한 것이다. 동시에 바로 이점이 트럼프의 쇼라면 쇼다. 어찌 보면 이건 트럼프의 전략일수도 있다
트럼프는 김정은 적수가 못 된다. 북한 김정은이 연일 핵탄두급 무기를 날리고 있다. 트럼프가 할 수 있는 유일무이의 실력행사는 TV에 나와서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목에 핏대를 올린 채 고개를 약간 삐딱하니 뒤틀고는 얼굴을 무섭게 찡그리고 악을 쓰는 것이 전부다. 아마도 트럼프 생각으로는 이렇게 하면 북한 김정은이 알아서 벌벌 길 줄로 아는가보다. 이쯤 되면 순진한 게 아니라 모자라는 거 아닐까. 트럼프에 대한 동양인의 시각은 대체로 마을에 하나쯤 있을 법한 바보 형 쯤 된다. 트럼프는 오랜 생활을 말만하면 아랫것들이 다해주는 기업가, 그것도 세계적 부호의 부잣집 아들로 살면서 남을 부리는 갑으로 왕처럼 군림하면서 살아온 자다. 그런 그가 어쩌다가 미국의 대통령까지 됐다. 대통령이라고 하는 자리는 행패나 응석을 부리는 부잣집 도련님 자리하고는 분명 다르다. 이를 모르지 않는 트럼프가 저리 된 것은 아마도 트럼프는 대통령으로서의 지혜와 과단성 그리고 관대함의 결여 때문일 것이다. 국제무대는 수틀린다고 소리치며 호통 치는 그런 갑질 회장들의 사무실이 아니다. 옛날 중국 검주(黔州) 마을에는 당나귀가 없었다. 촌로가 당나귀를 데려왔는데 어떻게 키워야할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7일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청와대 영빈관 기자회견장에서 “한반도에서 두 번째 전쟁은 없다”고 천명 했다. 대통령의 입에서 전쟁이란 말이 나올 정도면 분명 거기에는 그만한 뭔가가 있다는 말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옛말에 초윤장산(硝潤張傘)이라 했다. 주춧돌이 젖어 있으면 우산을 펼치라는 말인데 대통령이 저런 말을 했을 정도면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전쟁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마음을 흔들어 사기를 꺾어 이기는 부전승(不戰勝)과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서 말하는 힘의 중심에 결정타격을 가하는 섬멸전(殲滅戰)이다. 분명한 것은 ‘구슬은 빼놓은 채 화려하게 장식된 구슬상자만 사는 매독환주(買櫝還珠)의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전쟁의 진정한 승리는 누군가를 살상하는 하책(下策)의 승리가 아닌 싸우지 않고 이기는 승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不戰 而屈 人之兵 善之善者也> 더 쉽게 말해서 적장(敵將)으로 하여금 전쟁 자체를 꿈도 못꾸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본래 손자병법이라는 책은 손자병법서만 딸랑 읽어서
육군대장 박찬주의 갑질 논란에 부쳐 능마강소(凌摩絳霄)라 하여 곤어(鯤魚)가 봉황(鳳凰)으로 변(變)하면 한번 날개 짓에 구천(九天)에 이르니 이는 곧 사람의 운수(運數)가 바뀐다는 말이다. 대한민국 육군대장(별4개) 박찬주 제2작전사령관의 부끄럽고 쪼잔한, 그러나 상상을 초월한 갑질 논란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더군다나 그의 처 또한 부창부수(夫唱婦隨)하느라 녹각비명(勒碑刻銘돌비에 이름을 새겨 공을 찬양함)은 못할망정 더 날뛴 갑질로 대한민국 군인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 듣자하니 박찬주 대장은 육사 37기로 박정희와 육영수 사이에서 난 자식 파면 대통령 박근혜의 동생 서향희 변호사의 남편 박지만의 동기라 한다. 박지만 이름에는 늘 「뽕」이란 단어가 따라다니는데 동기라는 이유만으로 확대 해석은 위험하나 옛사람은 불택이교반유해의(不擇而交反有害矣)라 했다. 벗을 가리지 않고 사귀면 도리어 해로움이 있다는 말이다. 박찬주 대장 부부가 공관병에게 저지른 짓은 모몰염치(冒沒廉恥염치없는 줄 알면서도 함) 끝판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본시 아내는 여모정렬(女慕貞烈)이라하여 여자(女子)는 정조(貞操)를 굳게 지키고, 행실(行實)을 단정(端正)히 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