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잠 오명선 그리하여 햇살 한 번 쬐지 못하고 여름을 보냈다 긴 장마가 여름을 다 소비한 것 발이 그려놓은 무늬가 신발이 될 때까지 새를 앉힌 말뚝이 허공이 될 때까지, 바닥에 날개를 짓이기며 무르팍으로 키워온 숲이기에 저녁은 새의 둥지를 다 가져도 펴지지 않는 등이다 누가 저 등에 얹힌 단단한 잠을 깨울 것인가 긴 생각을 지우듯, 문득 돌은 잠행하는 침묵이 아니라 앞 장을 읽고 있을 때 이미 뒷장의 결말이 책장을 덮는, 한 권의 소설이라면 온 몸으로 울음을 토해낸 저녁은 깊은 어둠이거나, 설익은 열매일 것이다 새를 물고 가는 노을이 달빛을 완성하는 동안 열리지 않는 계절은 벽으로 기댈 수 있을 거라는 마지막은 아프지 않을 거라는, 살찐 짐승들의 동정을 돼지꼬리표로 묶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대답 없는 봄의 안부를 베고 누워 죽은 새의 깃털을 빗질하는 구름의 시간, 수천 년을 걸어온 발이 한 점 바람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람이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 돌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돌의 무게와 돌의 끈기와 돌의 인내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인간의 무게와 인간의 끈기와 인간의 인내가 얼마나 작고 어설픈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돌 앞에서, 어쩌면 인간은 반성
나의 빈티지 박도희 나쁘지 않은 시 늦가을을 닮고 싶은 의자 배터리가 다 된 시계 죽은 매미들이 새 배터리를 만들고 있다는 상상 장난의 운명을 믿는 헝겊 뼈다귀를 물고 오는 강아지 제 속도감을 즐기는 햇살 50% 세일 아이스크림 각종 펜 사랑 시선이라는 행위 예술을 위하여 막대사탕을 물고 타는 버스 모자란 슬픔 현혹=과제 패, 경, 옥 같은 택배물 늙기로 한 터널 오후 찻잔에 담는 비 기어코 찾으려고 하는 눈물에 관하여 지금 이 순간 나의 몸이 태어난 후 가장 오래된 순간이다. 매순간 우리는 늙어가고,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늙음, 그것은 생의 영역을 확장해가는 일은 아니다. 어느 순간까지 팽팽한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우리의 생이 어느 날부터인가, 몸 어딘가에서 바람이 새듯 빠져 나간다. 하지만, 늙음이 낡음과 동의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몸은 늙었으나 사고(思考)가 낡지 않아야 건강한 삶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
아버지의 마지막 하루 정호승 오늘은 면도를 더 정성껏 해드려야지 손톱도 으깨어진 발톱도 깎아드리고 내가 누구냐고 자꾸 물어보아야지 TV도 켜드리고 드라마도 재미있게 보시라고 창밖에 잠깐 봄눈이 내린다고 새들이 집을 짓기 시작한다고 귀에 대고 더 큰 소리로 말해야지 울지는 말아야지 아버지가 실눈을 떠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시면 활짝 웃어야지 어릴 때 아버지가 내 볼을 꼬집고 웃으셨듯이 아버지의 야윈 볼을 살짝 꼬집고 웃어야지 가시다가 뒤돌아보지 않으셔도 된다고 굳이 손을 흔들지 않으셔도 된다고 가시다가 중국 음식점 앞을 지나가시더라도 짜장면을 너무 드시고 싶어하지 마시라고 아니, 짜장면 한 그릇 잡수시고 가시라고 말해야지 텅 빈 아버지의 입속에 마지막으로 귤 향기가 가득 아버지의 일생을 채우도록 귤 한 조각 넣어드리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기 때문에 죽음이 아픈 것이라고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며칠 전, 정호승 선생님이 시집을 보내주셨다. 아마도 내 두 번째 시집 표4 글을 썼던 인연을 생각하셨으리라. 새벽에 시집을 읽는데, 아버지의 마지막 하루라는 시를 읽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주르륵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닌가. 돌아가신 내
완벽한 불판 이금란 친절하게 고기가 익어갈 때 우리는 젓가락으로 침묵을 만지작거렸네 눈에 까만 연기가 들어온다 연기와 연기와 연기가 불판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읽지 않은 책으로 쌓여가고 젓가락은 여전히 빈 페이지를 넘기고 있네 모든 오해는 시간을 까맣게 태우고 있지 핏방울이 떨어지는 불판 위 고뇌와 고통의 무늬가 다른 사람의 얼굴로 오는 저녁 드디어 골목이 어두워지고 늙은 거리의 누추한 냄새처럼 그곳에 도착했네 맨살을 뒤적이는 손가락은 하나씩 잘려 나가고 있다 어둠이 불빛에 데이듯 시간의 속살을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그들은 영원히 익지 않을 젓가락으로 앉아있네 불 안의 나는 고기처럼 뜨겁고 불 밖의 그들은 서늘해 안과 밖은 다른 나라의 골목으로 여기서 멀어지네 불판은 까맣게 타고 있는데 내 얼굴은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다 ------------------------------------------- 우리는 고기를 구우며 늙어간다. 있는 힘과 정성을 다해 고기를 뒤집으며 능력을 점검한다. 숯처럼, 불이 잘 붙지 않는 중년을 겨우 불사르며, 젓가락 같이 말라간다. 끓는 고기를 앞에 두고.. 박후기 시인
울림을 주는 시 한 편 - 139 종양의 맛 권민경 거대한 물혹과 한쪽 난소를 떼어낸 후 고기를 먹을 때면 뒤적거렸어 동물의 아픈 부분을 씹을까 조심스러워 그게 내 몸 같아서 암센터 건너 늘어선 주택 큰 개 순하게 매여 있네 짖을 타이밍을 잊은 개는 긴 혀를 빼물고 헐떡인다 너의 몸 어디선가 고요하게 자라고 있을 거야 나는 혹부리 여자 계절마다 새로운 혹이 돋고 모르는 새 유행에 민감해졌네 환자복 입고 딸기향 립글로스를 발랐지 향기는 소독되고 주택가를 떠도는 애드벌룬 종양은 부푼다 사람들이 태아를 걱정할 무렵 나는 세상의 작은 혹들이 애틋했네 그런 처녀였지 종양을 잉태한 줄 모르고 손자는 먼 훗날의 이야기 주렁주렁 열린 감자 겨울을 나고 좋은 씨감자 될 거야 품질이 좋고 맛 좋아 퇴원을 축하하며 엄마는 오랫동안 고기를 삶았지 들통을 열어보면 작은 종양을 달고 열심히 꼴을 먹던 소가 떠올라 나는 오랫동안 접시를 뒤적이고 종양 역시 내 몸의 세포가 일부 변형되어 생긴 것이므로 그 역시 내 육신인 것인데, 요즘 들어 할 수 없이 잘라내야 하는 경우가 몇 사람 중 한 명 꼴이란다. 갑자기 우리 몸에 매달리기 시작한 그 많은 종양들은 다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다국적
둘둘치킨 조동범 명동 둘둘치킨 앞에서 애인을 기다린다. 튀김닭 냄새가 자신의 영역을 그리는 둘둘치킨, 앞으로 퇴근하는 사람들 지나간다.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유리 너머의 닭을 바라본다. 오지 않는 애인. 튀김옷을 둘둘 말아 입은 닭들의 천국 안에는 몇 개의 만남과 사소한 시비, 닭들의 죽음이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 서로 넘나드는 일도 없이. 경계는 늘 견고하다. 오지 않는 애인. 둘둘치킨의 네온이 켜진다. 닭들이 분주히 기름으로 들어간다. 몸 안의 수분이 빠져나가기 전에 경쾌하게 튀겨지는 닭, 오지 않는 애인. 나는 둘둘의 경계 밖에서 시계를 본다. 뜨겁게 펼쳐지는 닭들의 천국 둘둘. 그곳으로 한 무리의 양복이 들어간다. 둘둘치킨 안에서 간간이 즐거운 폭죽이 터진다. 나는 둘둘의 경계 밖에 있다. 몇 개의 만남의 사소한 시비, 닭들의 죽음으로부터 비껴 있다. 오지 않는 애인, 을 기다린다. 둘둘 돌아가는 닭들의 천국, 지루한 닭들의 장례 앞에서. 도대체 매일매일 얼마나 많은 닭이 죽어가고 있는 거지? 동네마다 각양각색의 치킨집이 마치 양계장의 케이지처럼 들어앉아 있고, 우리들은 모이를 쪼는 닭들처럼 저녁마다 치킨집 마당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닭의 다리와
올바른 독서 조율 가능하면 나는, 그 남자에게 나를 잃겠습니다. 환불교환 가능한 백화점 영수증 첨부된 비싸지도 싸지도 않은 선물 대신 아무도 사지 않는, 역마살처럼 옮아간 그 남자의 푸르뎅뎅한 사랑, 오래전 이사 온 집의 번지수처럼 아득한, 그 남자 등초본 속 이름 한 권 분양받겠습니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남자라고 읽겠습니다.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접으며 남자 이마에 남모르게 천천히 밑줄을 긋고는 킥킥, 그럼 맘 모르는 그 남자 따라 꺽꺽. 읽을 만큼 읽고 또 지치도록 읽겠습니다. 그 남자 가슴 첫 페이지에서 끝 페이지까지, 진부한 머리말에서 당신도 모르는 호적 간기면까지, 혹은 발톱 거스러미에서 정수리 상처까지 이윽고 남자를 다 읽는 그날이 온다면. 그럼 난 그 남자 손 붙잡고 동인천 후미진 헌책방 셔터 앞 어딘가에 내다 버리거나 아니면 가장 가난한 헌책들만 사는 책방도 뭣도 아닌 것 같은 난쟁이 지붕 집 사립문 열고 들어가 헐값에 팔겠습니다. 먼지 쌓인 감옥에서 누렇게 늙어가는 그 남자, 이제 정말 아무도 사 가지 않는 그 남자, 염소밥으로도 너무 낡아버린 그 남자. 누군가의 한때였던 아련한 표정으로 아침을 맞고. 몸속 은밀한 어딘가에 바싹 말라비틀어진
멸치 칼국수 장인수 관절도 없고 아가미도 없는 저것 홍두깨에 밀어서 다다다닥닥 칼질의 간격을 넘어온 저것 뼈마디도 없는 저것 말랑말랑한 세상으로 왕림하신 저것 여러 가락 뜨겁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저것 눈발이 날리는 추운 날 뜨개질을 하다가 끓여먹는 저것의 국물에는 바다의 거친 은빛 물살에서 파닥이던 저것 죽어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저것 수중 발레를 하며 매혹적인 춤을 추던 저것 그물에 걸렸어도 은빛 점프를 하던 저것 척추동물의 날렵한 몸동작인 저것 깨달음처럼 우려낸 저것 머리부터 꼬리까지 통째로 우려낸 저것 뼛속까지 망명한 저것 멸치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사는 바다 생물이다. 그 먼데서 달려와 기어이 제 한 몸 던져 진한 살신의 국물 맛을 내느니, 생이여 오늘도 나는 멸치 똥만도 못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멸시를 참는다. 박후기 시인
자매 백은선 색색의 조명등이 나에게 여러 개의 그림자를 달아준다 우리 자매는 몇 가지 놀이를 가지고 있다 어떤 날엔 촛농 같은 쿠키를 집어 먹으며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르기로 한다 맹세를 할 때는 맹세만을 생각한다 불어나는 혓바닥처럼 우리는 훈련한다 식탁 밑에 쭈그리고 앉아 우리는 다툼을 꾸며낸다 너는 이제 영영 네가 되어야만 할 거야! 거품이 터지는 소리 물속에 잠겨 있을 때 내가 흉내 내는 동물의 울음소리들 빛은 내 몸을 구석 투성이로 만든다 언니는 오래도록 식탁 아래 남아 헤아린다 접시를 쥐고 하나두울 하나 다시 하나 가느다란 빛이 두 귀를 관통한다 초식동물들의 몸 안에 새겨진 어두운 울음을 생각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리본처럼 풀어지는 혀를 훔치고 싶다 나는 언제부터 동화적 상상력을 잃어버린 걸까? 언제부터, 모든 아름다운 이야기는 동화 속에나 있는 일이며, 동화 속의 그 모든 해피엔딩은 왜 모두 꾸며낸 이야기라고 믿게 된 것일까? 어릴 때, 탁자 아래 혹은 서랍 속의 비밀 주머니에서 우리는 충분히 사랑스럽고 아름다웠으나, 이제는 그 모든 일들이 마치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옆집 아저씨 이야기쯤으로나 듣고 있구나. 자매들은 엄마가 되는 순간 헤어지는구
버리긴 아깝고 박철 일면식이 없는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을 한 뒤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싶어 면지를 북 찢어낸 시집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여차여차하여 버리긴 아깝고 해서 주는 책이니 읽어나 보라고 며칠 뒤 비 오는 날 전화가 왔다 아귀찜을 했는데 양이 많아 버리긴 아깝고 둘은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품에 안은 그런 눈빛을 주고받으며 시인으로 등단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시집 한 권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이 땅에서 시인으로 살아갈 작정을 한 자라면 누구나 이해할 것이다. 시집을 출간하면 다른가? 또 여기저기 곡진하게 감사의 글을 적어 보내주어야 한다. 갑을 관계? 멀리서 찾을 것 없다. 등단 십 수 년에 시집 몇 권에 내로라하는 문학상까지 받은 시인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이름조차 보이지 않는 문단 말석의 시인들을 말해 무엇 하랴. 그래, 식당 아줌마가 유명 평론가보다 맛있게 시를 읽었을 터, 시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읽는 것이기에. 시인도 시집을 버리긴 아깝고 아줌마도 아귀찜을 버리긴 아까웠으니, 둘 다 가슴 밑바닥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잊고 지내던 뜨거움을 확, 불살라버
비가 전하는 소식 귄터 아이히 슬레이트지붕에서 기와지붕으로, 빗방울이 북소리 같이 울리며, 전염병처럼 퍼져, 내게 전하는 소식, 가지고 싶지 않은 자에게 전달되는 밀수품- 벽의 바깥에 창문의 함석조각이 울리고, 자음과 모음들이 달그닥거리며 한데 합치면, 비는 말한다 나밖에는 아무도 알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언어로- 깜짝 놀라 나는 듣는다 절망의 소식을, 빈곤의 소식을, 그리고 비난의 소식을, 이 소식이 내게 전해져 불쾌하다,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나는 소리 높여 외친다, 비도, 비의 고발도, 그리고 그것을 내게 보낸 자도 나는 두렵지 않다고, 적당한 시간에 밖으로 나가 그에게 대답하리라고. 귄터 아이히라니, 이 사람은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거지? 라는 궁금증을 갖고 계시는 여러분! 어느 한 구절에 눈길이 간다면, 그 구절이 이 시의 전부입니다. 누군가의 뒤태에 자꾸 눈길이 간다면, 누군가의 미소가 자꾸 떠오른다면 그것이 당신 마음의 전부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떠오르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느낌을 분석하려 하지 마세요. 사랑을 해석하려 하지 마세요. 꽃이 어디 분석하고 피어나던가요?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
울림을 주는 시 한 편-131 고독한 사람 최영철 말수가 뜸한 사람은 윗입술과 아랫입술 교분이 두터운 사람이다 윗입술과 아랫입술 궁합이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사이를 아무나 함부로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다 정말이지 어쩔 도리가 없어 잠시라도 멀어지면 심심하고 보고 싶어서 입술이 파리해지는 사람이다 잠시 떨어져 헛바람이 둘 사이를 지나가면 금방 침이 말라 죽을지도 모를 사람이다 게으른 사람은 손발과 팔다리의 취미가 고독인 사람이다 소싯적 취미란에 아무 의심 없이 고독이라고 쓴 적이 있는 사람이다 손발과 팔다리가 제 일에 바빠 조금만 흩어져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사람이다 팔다리가 한통속으로 무슨 일을 도모할까 봐 걱정이 태산인 사람이다 보고픈 이도 없고 찾아 나서거나 악수할 이도 하나 없는 사람이다 온 힘을 풀고 손과 발을 허공에 늘어뜨린 채 홀로 묵상하는 척하는 사람이다. 고독은 스스로 얻는 병이다. 생의 저울 위에 올라선 제 무게에 비해 고독은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가볍게 살지 못하는 자들은 삶의 무게 때문에 한없이 가라앉을 뿐이다. 말이 많고 적음이 가볍거나 무거운 것의 기준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고독한 동물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