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림을 주는 시 한 편-56 오동나무 아래서 안주철 오동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으면 누에들이 뽕잎 갉아먹는 소리가 들려 엄마는 아궁이에 반쯤 남은 생을 지펴 밥을 짓고 있어 뽕잎 같은 방을 기어다니던 동생이 어제 누에를 집어먹었어 동생은 얼마지 않아 고치를 짓기 시작할 거야 부뚜막 옆에는 석유풍로가 있어 그 뒤 흙벽엔 그을음 나무가 한 그루 검게 자라고 있지 하루하루 굵어지는 그 나무 이제는 베어버려야 할 것 같아 천장까지 닿아 비가 새거든 하지만 굵은 나무가 쓰러지면서 집을 덮칠까 못 베고 있지 오동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으면 오동잎들이 빗물 뜯어먹는 소리가 들려 늦가을 집을 짓지 못한 누에처럼 오동잎들이 마르고 있어 여름내 비만 내리고, 그리하여 모든 이의 생이 젖은 채로 저물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삽 한 자루와 당신의 미래를 바꾸었다. 당신은 평생 동안 삽질을 할지언정 자식들만큼은 세상에 나가 삽질 하지 마라 말씀하시며 삽 대신 가능성이 무한한 책 보따리를 들게 하셨다. 이쯤에서, 자,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무엇을 쥐어줄 것인가. 아이들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어차피 남겨줄 돈 같은 건 없다. 오래 전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55 어머니 생각 이시영 어머니 앓아누워 도로 아기 되셨을 때 우리 부부 외출할 때나 출근할 때 문간방 안쪽 문고리에 어머니 손목 묶어두고 나갔네 우리 어머니 빈집에 갇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돌아와 문 앞에서 쓸어내렸던 수많은 가슴들이여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자장자장 우리 아가 나 자장가 불러드리며 손목에 묶인 매듭 풀어드리면 장난감처럼 엎질러진 밥그릇이며 국그릇 앞에서 풀린 손 내미시며 방싯방싯 좋아하시던 어머니 하루 종일 이 세상을 혼자 견딘 손목이 빨갛게 부어 있었네 엄마는, 견딘다. 요즘엔 요양원에 누워 치매와 병고를 견디고, 그 전엔 집 떠난 자식 누구 하나 찾지 않는 시골집 누옥에서 홀로 외로움을 견뎠고, 그 전엔 갑자기 세상 등진 남편의 텅 빈자리에 앉아 하루 종일 일만 하며 견뎠고, 그 전엔 요절한 아들 불쌍타 몇 해 밤낮 속으로 울며 견뎠고, 그 전엔 전쟁터에 끌려간 남편 무사하길 기원하며 구구절절 전방에서 날아온 편지를 읽고 또 읽어 견뎠고, 또 그 전엔 매운 시집살이 어린 자식 생글거리는 웃음보며 견뎠고, 그 전엔 집안 열쇠 꿰찬 못된 올케 구박에 시집갈 날만 기다리며 견뎠다던. 그런데 나는, 그렇게 평생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54 간 장 하상만 콩자반을 다 건져 먹은 반찬통을 꺼내 놓는다. 반찬통에는 아직 간장이 남아 있다. 외로울 때 간장을 먹으면 견딜 만하다.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내가 일으키려 할 때 할머니는 간장을 물에 풀어오라고 하였다 나는 들어서 알고 있다. 할머니가 젊었을 때 혼자 먹던 것은 간장이었었다는 것을. 방에서 남편과 시어머니가 한 그릇의 고봉밥을 나누어 먹고 있을 때 부엌에서 할머니는 외로웠다고 했다. 물에 풀어진 간장은 뱃속을 좀 따뜻하게 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운을 주었다. 할머니가 내게 마지막으로 달라고 한 음식은 바로 간장.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할머니는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었다. 수년째 자식들은 찾아오지 않던 그 방 한 구석엔 검은 얼룩을 가진 그릇이 놓여 있었다. 내가 간장을 가지러 간 사이 할머니는 영혼을 놓아버렸다. 물에 떨어진 간장 한 방울이 물속으로 아스라이 번져 가듯 집안은 잠시 검은 빛깔로 변했다. 비로소 나는 할머니의 영혼이 간장 빛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자이므로 간장이 입에 맞았다. 혼자 식사를 해야 했으므로 나는 간장만 남은 반찬통을 꺼내 놓았다. 나도 가끔 숟가락으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53 나 비 4 이 안 나비는 눈이 어두워 구절초 책에 쓰인 글자 하나하나를 혀로 맛보며 읽습니다 어떤 페이지는 어려운 맛에 처음부터 다시 읽기도 하고, 어떤 페이지는 싱겁다 싱겁다 건너뛰기도 하면서 그러다가도 다시 돌아와 싱거운 맛 하나하나에 골똘히 빠져들기도 합니다 볕이 좋은 날은 날개 그늘을 펴고 그 아래서 읽습니다 눈이 더 나빠지면 안 되니까요 윗글에 알맞은 주제는 아니지만,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는 말이 있다. 나비의 단순한 날갯짓이 날씨를 변화시킨다는 이론으로, 일반적으로는 작고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나중에 커다란 효과를 가져 온다는 의미로 쓰인다.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N. 로렌츠가 처음으로 발표했고, 나중에 카오스 이론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령 1930년대의 대공황이 미국의 어느 시골 은행의 부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면, 이것은 나비효과의 한 예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 전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서울 우면산 산사태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혹시, 이번 산사태가 어떤 거대한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52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도 종 환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도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노자(老子) 도덕경 50장에 출생입사(出生入死)란 구절이 나온다. 出生入死. 生之徒十有三, 死之徒十有三. 人之生, 動之死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51 멸 치 전 연 옥 지난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라고 내 몸에 달디단 기름을 발라 구우며 그대는 뜨겁게 속삭이지만 노릇하게 내 살점을 태우려 하지만 까닭 없이 빈 갈비뼈가 안쓰러움은 결코, 이 빠진 접시 위에 오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님을 비틀거리며 쏟아지는 한 종지의 왜간장에 몸을 담그고 목마른 침묵 속에 고단한 내 영혼들이 청빈하게 익어갈 때면 그 어느 것도 가늠할 수 없는 두려움에 쓰라린 무릎을 끌어안고 여기는 에미 애비도 없는 서럽고 슬픈 저녁 나라이더냐 들풀 같은 내 새끼들 서툰 투망질에도 코를 꿰는 시간인데 독처럼 감미로운 양념 냄비 속에 앉아 나는 또 무엇을 잊어버려야 하며 얼마만큼의 진실을 태워야 하는지 권력은 우리에게 자꾸 잊으라고 강요한다. 빅 브라더는 말한다. 너희들의 머릿속까지 들여다보며 감시하고 있으니 행동하지 말고 잊을 건 잊으라고. 역사도 잊고 과거도 잊고 불편한 현재는 더더욱 잊고 살라 말한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아는 게 병이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진실은 불편하다. 불편하다고 그것을 외면하면 입도 뻥끗하지 못하는 세상에 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의 과거가 말해주고 있다. 400번의 구타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50 겨울 이야기 마종기 겨울은 어떻게 오던가. 빈 뜰에 이른 어두움 내리고 빛나던 江물 소리 그치고 그 뺨에는 하얀 성애. 議政府行이었지, 뜻밖에도 눈이 내릴 때 마지막 밤 버스에 흔들리던 요한 啓示錄, 밤새 눈을 맞는 孝婦利川徐氏之墓. 善終하는 老人의 웃음 끝에도 한 줄씩 조용한 눈물. 그 눈물의 速度처럼 아직 겨울은 혼자서 머물고 있다. 6월 모일 인사동 포장마차. 마종기 시인과 함께 둥근 탁자에 서넛이 둘러앉아 한여름 밤에 겨울 이야기를 했다. 1960년대는 겨울만 있었다고. 그때 그는 타의에 의해 이 나라를 떠나야 했다. 2011년 여름에도 그는 며칠 뒤면 플로리다로 간다고 했다. 21쇄를 찍은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건네는 손가락이 뭉툭하다. 의사의 손은 가늘고 여린 줄 알았던 것은 나의 착각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나이를 먹었다는 징표. 그는 의사다. 의사여서 죽음을 그토록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아버지 마해송의 장례식에도 올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죽음에게 미안했을 것이다. 죽어가는 자의 눈 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의 속도, 그것이 우리가 죽을 힘을 다해 주연으로 살아가는 인생이란 단편 영화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49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김 산 무럭무럭 늙던 할머니의 왼편을 바람이 쓰러뜨렸네 시누대처럼 꼬장꼬장한 할머니의 허리가 도루코 날처럼 접혔네 손목이 접히고 입이 뒤틀리고 무릎이 오그라들었네 엉금엉금 할머니는 학교 갔다 온 나에게 엄마, 엄마, 불렀네 배고파, 배고파, 저 년은 밥도 안 주고 서방질만 한다고, 엄마, 엄마, 나물에 고기반찬 좀 해줘, 어린 내게 졸라댔네 나는 양푼 가득 장조림과 콩나물을 비벼 바람의 아가리에 들이부었네 반은 흘리고 반은 바람이 먹고, 반은 흘리고 반은 바람이 마시고, 뚱뚱해진 바람이 가계의 비닐 창마다 숟가락만 한 구멍을 냈네 어느 가을, 학교 갔다 오니 할머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셨네 스테인리스 오강 단지를 타고 지붕을 뚫고 우주로 날아가셨네 나는 요즘도 문득문득 양푼을 들고 바람의 入口를 더듬거리네 이제, 우리들의 할머니는 모두 시골집 아니면 요양원에 계신다. 살아 있어도 살아가는 게 아니고, 죽어도 흙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이란 말은 마땅히 내 몸에 불 들어가기 전까지는~으로 수정 되어야 한다. 아무려면 어떤가. 어차피 살아서도 죽음을 체험하고 계신 우리들의 할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황병승 2층 사는 남자가 창문을 부서져라 닫는다, 그것이 잘 만들어졌는지 보려고 여자가 다시 창문을 소리 나게 열어젖힌다, 그것이 잘 만들어졌다는 걸 알았으니까 서로를 밀쳐내지 못해 안달을 하면서도 왜 악착같이 붙어사는 걸까, 더 큰 집으로 이사 가려고 바퀴벌레 시궁쥐 사마귀 뱀 지렁이 이 친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미움 받고 있는가 알기나 할까, 파티에 초대받은 적이 없어서 아줌마 아저씨들은 야 야 됐어 그런다, 조금 더 살았다고 그러면 다리에 난간은 뭐 하러 있나 입을 꾹 다물고 죽은 노인네에게 밥상은 왜 차려주나 그런 게 위안이 되지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빵 주세요 빵 먹고 싶습니다 배고픈 개들이 주춤 주춤 늙어가는 저녁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난삽하고 배부른 정치에 비하면, 시는 얼마나 간결한 것이냐. 시는 또 얼마나 솔직하게 배고픈 것이냐. 적어도 시는 서로를 밀쳐내지 못해 안달을 하면서도 왜 악착같이 붙어 사는 것을 고백하니까. 적어도 시인은 사랑하기에 떠나신다는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사랑을 느낀 적도 없으면서 내가 사랑해 봐서 아는데, 라고 뻥치지 않으니까. 땅, 땅, 땅, 돈, 돈, 돈! 우리 모두가
신앙 김소월 눈을 감고 잠잠히 생각하라 무거운 짐에 우는 목숨에는 받아가질 안식을 더 하려고 반드시 힘 있는 도움의 손길이 그대들을 위하여 내밀어지리니. 그러나 길은 다하고 날 저무는가, 애처로운 인생이여 종소리는 배 바삐 흔들리고 애꿎은 조가(弔歌)는 비껴 울 때 머리 수그리며 그대 탄식하리. 그러나 꿇어 앉아 고요히 빌라 힘 있게 경건하게, 그대의 맘 가운데 그대를 지키고 있는 아름다운 신을 높이 우러러 경배하라. 멍에는 괴롭고 짐은 무거워도 두드리던 문은 멀지 않아 열릴지니 가슴에 품고 있는 명멸(明滅)의 그 등잔을 부드러운 예지(叡智)의 기름으로 채우고 또 채우라. 그리하면 목숨의 봄 둔덕의 살음을 감사하는 높은 가지 잊었던 진리의 몽우리에 잎은 피며 신앙의 불붙는 고운 잔디 그대의 헐벗은 영(靈)을 싸 덮으리. 어째서 김소월인가? 생각해보니, 내가 소월을 떠난 적이 없다. 맨 처음 사랑 고백을 소월의 시를 가져 와 뛰는 가슴에 손을 얹고 했으니, 이루어지진 않았을지라도 어찌 죽을 때까지 첫사랑을 잊을 것인가. 1980년대 중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실린 「기도」를 듣고 울었다. 문승현이 소월의 「신앙」이란 시에 곡을 붙인 건데, 그냥 먹먹했다
가 나 안 이영광 가나안 교회를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녀는 물었고, 길이 복잡하니 따라오라고 나는 말했다. 마음에 든다는 듯 그녀는 웃었다. 꽃무늬 재킷 전체가 웃었다. 서른이 안 돼 보이는 여자가 마흔이 넘은 나를 내 생애의 어떤 여자보다도 기쁘게 따라왔다. 벚꽃이 지고 있었다. 언덕 밑 자드락길 파밭 지나 골목에 접어들어서도 나는 몰랐다. 놀랐다. 가나안 교회를 얼마나 가야 하니, 반말로 그녀가 다시 물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별안간 블라우스 앞섶을 홱 열어젖히고 맨가슴을 꺼낸 채로 달려들어서, 내 목을 끌어안고 매달려서가 아니었다. 문득 여자의 등 뒤에서 여자를 꼭 닮은 늙은 얼굴이 나타나 깔깔대는 알몸을 철썩철썩 때려가며 옷을 입히고, 사과도 없이 허둥지둥 사라져서가 아니었다. 아, 나는 정신없는 몸 앞에서 정신없이 옷깃을 여미는 인간이구나. 나도 몸이었구나. 하지만,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니. 어떻게 견디지 않을 수 있었니. 벗은 몸이라도 내밀어야 했던 참혹이 있었던가. 다 벗어던지고라도 따라가야 했던 순간이 누구에게는 없었을 것인가. 살 떨리는 그곳이 비록 독과 피가 흐르는 저주의 땅이라고 해도. 레밍이라는 쥐가 있다. 북남미에 있는 작은
예 감 황 규 관 이제 사랑의 노래는 재개발지역 허름한 주점에서 부를 것이다 가난한 평화는 한 블록씩 깨어지고 있다 그 아픔의 마른 냄새를 맡으며 잃어버린 대지를 찾지 않겠다 모든 밥벌이가 단기계약이듯 사랑도 이제 막바지다 새끼들 칭얼거림을 다 듣고 아내의 지친 한숨도 내 것으로 한 다음에야 노래는 터져 나올 것이다 깨어진 기억은 길가에 치워져 있다 천장이 한없이 낮아 일찍 취하는 주점에서 마시고 내린 빈 잔을 가슴에 가득 담을 것이다 사랑은 막바지고 외로움도 좋다 백척간두가 내 힘이다 그러나 다시 노래는 울고 말 것이다 끝내 오고야 말 폐허까지 폐허의, 폐허의 아침까지 천장이 한없이 낮아 일찍 취하는 주점을 알고 있다. 천장이 낮아서 들어오거나 나서는 사람들이 서로 모르는 사이일지라도 머리를 숙여 인사를 나누는 곳, 그래야만 하는 곳이 시내 경안천변 어디쯤에 있다. 막걸리 주전자와 김치찌개를 내어 놓고는 취객이 가거나 말거나 방안에 들어가 텔레비전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주인장 할머니의 쓸쓸한 폐허를 나는 기억한다. 할머니의 폐허보다도 먼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경전철 콘크리트 교각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비 개인 저녁. 할머니와 경전철 선로만 놓고 보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