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위나라 대부 극자성이 이재와 언변에 빼어난 자공에게 말한다.
“군자는 바탕만 갖추고 있으면 될 일이지, 그깟 겉 무늬만 그럴싸하게 꾸민대서야.” 하니 자공이 크게 애석해하면서 짐짓 나무라는 말투로 말한다. “한번 뱉은 말은 그 빠르기가 네 필의 말로도 따를 수가 없거늘 어찌 그런 실언을 하시는가.” 그러면서 답을 말하길 “겉 무늬도 본디 바탕만큼 중요한 것이고 바탕도 무늬만큼 중요한 것이다.”
본래 이문장은 논어 옹야편 6-16문장이 출전으로 공자의 말에서 그 시작이다. 쉽게 풀어쓰면 이렇다. 하루는 공자께서 말씀하신다. 바탕이 무늬보다 나으면 성품은 자칫 얕을 수 있고 무늬가 바탕보다 나으면 성품 또한 모가 날 수 있으니 군자라면 무늬와 바탕이 조화가 있어야한다.
공자께서 말하는 바탕과 무늬는 넓은 의미에서 위정자에게 주는 백성을 향한 정치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곧 조화는 예를 으뜸으로 하여 화목을 귀하게 여긴다고 논어학이편은 말하고 있다. 육덕명은 조화를 일러 위정자의 언어라 규정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백성들을 화목하게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곧 먹을 것을 풍족히 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위정자의 마음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그건 백번도 지당한 백성에게 두어야 한다.”라고, 경전의 가르침은 그러하다. 다만 세상은 꼭 경전의 가르침대로 가지 않는다는 데 그 심각성은 있는 거다. 대학 전 7장은 말한다. “마음에 없다면 본들 그게 보이겠으며, 들은들 그게 들리겠으며, 먹은들 그 맛을 알지 못하나니, 이에 수신을 통해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라고 한다.
고래로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정치가 백성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까닭은 단 하나의 이유만 존재한다. 백성을 돌아보지 않음에서 그 시작이다. 그렇다면 왜 백성을 돌아볼 틈이 없을까. 그냥 고개 한 번 돌려주고 눈길 한번 주면 되는 일이거늘 그게 무슨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으라는 것도 아닌데 이는 곧 그 백성을 사랑하되 말로만 사랑하는 자들이 그 자리에 앉아서다라고 여길밖에 달리 표현이 없다.
이런 정치를 향한 맹자의 가르침은 이렇다. 걸왕과 주왕이 천하를 잃은 것은 백성을 잃어서이며 백성을 잃은 것은 그 마음을 잃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