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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고향을 지키는 마음 …늘 농협과 함께

People| 모현농협 조합장 이태용

농협을 집처럼, 자신의 몸처럼
76년 입사…모현농협의 산 증인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지역의 경제·문화·복지의 중심체인 모현농협을 이끌고 있는 이태용 조합장.

그는 20대의 청년시절인 1976년부터 31년여간을 오직 집과 모현 농협만을 오가며 자신의 열정과 신념을 바친 농촌과 농협발전사의, 지역 발전사의 산증인이다.

아주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를 하게 된 이 조합장은 지난 일들이 꿈같고 새삼 정겹게 느껴진다.

당시는 울면서 일했을 정도로 국가의 경제 여건과 농촌 경제 여건이 열악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다 아름다운 추억일 뿐이다.

“그때는 예금 전체라야 2500만원 정도이고, 대출금 전체라야 2000만원도 안되던 시절이었어요. 현재는 예금 1750억원에 대출금이 1200억원이니 무려 7000배 성장이에요. 이런 비교는 의미가 없다고 봐야죠.”

빛바랜 과거의 장부를 들춰보니 실로 격세지감에 놀랍기만 하다. 당시 200여만원의 흑자를 봤다고 하니 125만배가 성장한 25억원의 흑자를 내는 현실과의 비교는 이 조합장 말대로 의미 없는 일인지 모른다.

# 고향을 지키는 장남

“당시는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장남이 많았어요. 부모와 땅과 고향을 지켜야 하는 의무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가 있었겠어요.”

지금은 작고한 친할아버지는 모현면장을 오래 지내면서 이 조합장에게 농협에 입사할 것을 권유했다.

“당시는 너도 나도 도회지로 나가던 시절이었어요. 딱히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산업화, 근대화의 물결에 따라 농촌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집안 누구라도 한 사람은 고향을 지키고 기관에 다니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장남인 저를 설득했어요.”

고향을 꼿꼿하게 지킨 할아버지로서는 너무 당연한 충고였고, 이 조합장은 할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다.

76년 입사해서 이 조합장이 처음 맡았던 일은 비료 담당이었다. 고생을 엄청 많이 했다.

“울면서 집에 갈 정도였어요. 조별 판매를 했는데 비료가 모자라서 조합원들이 필요로 하는 비료를 판매할 수가 없었어요.”

비료가 충분히 확보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경기도지부에서 정보를 파악해 가평, 여주, 이천 등지를 돌면서 남은 비료를 수거해오는데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 농협에서는 작은 마트를 운영했다. 이 조합장은 시간이 없어 마트에 오갈 수 없는 조합원을 위해 직원 한명과 설탕 비누 칫솔 등 생필품을 차에 싣고 일요일마다 동네를 돌며 판매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진 한 장 존재하지 않는 사라진 농촌의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모현면의 모습을 먼 후대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모현면의 들과 산, 주택과 도로 등 전체적인 모습을 사진에 담아두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말한다. 이런 저런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고 급여 조건도 열악했지만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 이 조합장.

그러나 정말 힘들었던 일은 대출했던 자금을 회수하는 일이었다. 일반자금, 영농자금, 비료, 농약 값 등을 회수하는 일인데 당시 어려웠던 살림살이의 농촌 가정들을 돌며 자금을 회수하기란 마음 아픈 일이었다. 추곡수매 후나, 무 배추 판매 후에 자금을 회수하러 자전거를 타고 돌던 시절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만 농협에 대한 애착은 고된 만큼 이 조합장의 가슴속에 널찍하게 자리하기 시작했다.

# 11년 조합장…손꼽히는 농협으로

“일요일 날 사무실에는 기본으로 왔다가야 집에서 일을 해도 일이 손에 잡혔어요. 사무실에 나왔다가 들어가야 마음이 편했으니까요.”

일산리 집에서 농협까지 걸어서 30분, 오토바이로는 3~4분 거리였다.

자신이 태어난 집, 태어난 방에서 아들 딸 낳고, 지금도 그 방에서 살고 있는 이 조합장은 역시 자신이 입사한 농협 그 자리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키고 있다. 농협과 이 조합장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지금도 우리 아이들은 농협이 제 것인 줄로 안다니까요. 밥 먹고 나면 농협에 가니 아이들은 아빠 농협인줄 아는 거죠. 조카들도 지나가면서 우리 큰아빠 농협이라고 말하죠.”

45세 되던 해 처음 조합장에 출마해 당선했다. 45세라는 나이는 조합장에 출마하기에 이른 나이였지만 애당초부터 조합장이 꿈이었던 그에게는 모든 준비와 각오가 돼 있었다.

열과 성을 다해 열심히 일했고 더 큰 기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출마를 결심했다.

물론 조합원들이 출마할 것을 권유했고, 그만큼 지지자도 많았다.

“할아버지의 덕이 컸어요. 조합원들이 할아버지의 반만 하면 성공한다며 적극 밀어주었지요. 할아버지도 내 반만 하면 널 밀어 주마 하셨구요.”

이 조합장은 당시 71%라는 절대적 지지로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지금까지 11년 조합장을 해오는 동안 조합은 많은 성장을 했다.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꾸준히 성장한 것입니다. 특히 분당신도시 바람이 미친 영향이 컸어요. 인구가 유입되고, 부동산 가격이 오르고, 소비 패턴이 높아지는 등 도시화 추세에 따라 발전하게 된 것이지요.”

이 조합장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겸손해 하지만 지금 모현 농협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농협에 속한다.

2006년 경영지표 시뮬레이션 평가를 보면 1등급 농협으로서, 전국 1200여개의 농협 가운데 경기도에서 3위, 전국에서 9위를 했다.

과거 어려웠던 농협이 지금 전국에서 내로라는 1등급 농협으로 성장한 중심점에는 바로 이 조합장이 있었던 것이다.

# 조합원·지역과 함께

이 조합장이 요즘 가장 주력하는 사업은 조합원 복지 증진이다. 직원 월급만큼 조합원에게 주겠다며 현재 이를 실천하고 있고, 앞으로는 직원 월급보다 더 높게 끌어올리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조합원은 농협 경영의 울타리이며 든든한 후견인입니다.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농협이 어떤 사업 계획을 세워도 추진되고 이뤄질 수 있지요. 조합원은 농협 존재의 근간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환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조합원들도 힘을 얻고 신바람으로 일할 수 있다. 결국 조합원에게 잘 하는 것은 농민 조합원들이 열심히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고, 그럴 때 농협은 더욱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모현농협에서 실시하는 복지 사업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지만 대충 들어보면 너나 없이 조합원이 되고픈 간절함이 생길 듯 싶다.

바로 지난 5월에 모현 지역 어르신 1500명을 초청해 개최한 경로잔치를 비롯해 연초에 모현면 지역 신년인사회, 매년 조합원 하계 휴양소 운영, 각종 주부교실, 봉사활동, 조합원 병원 입원비 보조, 조합원 자녀 대학 입학시 무조건 1인당 장학금 70만원 수여 등 모현면민의 동력의 근원이다.

뿐만 아니라 각 마을 경로당에 연료비를 지원하고, 독감예방 접종은 전 조합원 가족까지 실시하며, 만 61세가 된 조합원의 해외연수 실시 등 모현농협 조합원이 누리는 혜택은 다양하다. 그러다보니 면민들이 서로 조합원에 가입해 조합원 숫자가 계속 늘고 있다.

“어려운 농사를 짓고 있는 조합원 곁에는 늘 농협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싶고,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한 가지 꿈이 있다면 농협을 증축하는 일이다. 문화복지시설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연건평 1400평 정도의 규모로 현 농협 자리에 다시 지으려고 하지만 오염총량제 등으로 일의 추진에 어려움이 많다.

하늘이 내려준 천직. 모현농협을 자기 집처럼, 아니 자신과 한몸처럼 여기며 지내온 이 조합장의 농협 인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소중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