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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조선시대 여성실학자! 용인의 큰 여성!!

이사주당의 생애와 《태교신기》

홍순석(강남대교수,인문대학장)


   
이사주당(李師朱堂)과의 만남은 용인지역의 향토사를 연구해온 내겐 큰 수확이었다. 1995년 12월 언문학자 유희(柳僖)선생의 묘역을 찾아 나섰다가 사주당의 묘소까지 확인하게 된 것이다. 때마침 경기도에서는 사주당을 여성 실학자로 선정하여 선양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용인향토문화연구회에서는‘용인의 큰 여성’으로 부각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주당의 선양사업은 다른 여성실학자에 비해 진작(振作)되지 못하였다.
2000년 6월, 유희선생이‘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면서 다시 사주당에게 관심이 기울여졌다. 방송매체에서는 사주당의 《태교신기(胎敎新記)》에 주목하였다. 이에 힘입어 사주당의 위상을 가늠하려는 학술심포지엄도 개최되었다.
대다수의 조선시대 여인들이 각자의 재능과 학식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사주당은 성리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영역의 책을 탐독하였으며, 《태교신기》를 저술하여 여성 실학자로 인정되었다. 이제는 여성학·한의학·사회학·서지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단편적인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으며, 근래에는 국역서도 몇 종 출간되었다.
필자 역시 여러 차례 <여성 실학자 사주당 이씨>를 특강한 바 있다. 그리고 틈틈이 《태교신기》를 국역해 두었다. 수년 전에 국역을 마치고도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출간하지 않았다. 새삼 출간을 결정한 것은 작년 봄이다. 용인시 공무원연수 과정에서 한 팀의 토론주제로 “아이를 낳고 싶은 도시-용인”이 제기되었다. 이어 연말에는 용인시에서 ‘아이낳기 좋은세상 운동본부’가 출범하였다. 그리고, 지난 달에는 ‘이사주당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다. 더 이상 출간을 미룰 수 없는 좋은 여건이라는 생각에 그동안 서랍 속에 방치하였던 원고를 다시 손질하고,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사주당기념사업회의 첫째사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 이사주당의 생애

사주당 이씨(1739-1821)는 본관이 전주(全州)이며, 태종의 서자인 경영군(敬寧君) 조(?)의 11대 손이다. 조부는 이함보(李咸溥), 부친은 이창식(李昌植)인데, 모두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으므로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다. 모친은 좌랑(佐郞)을 지낸 진주 강씨(晉州姜氏) 덕언(德彦)의 딸이다. 사주당은 기미년(己未年:영조21,1739) 12월 5일 유시(酉時)에 청주 서면(西面) 지동촌(池洞村)에서 출생하였다. 사주당 외에도 ‘희현당(希賢堂)’이라는 당호(堂號)가 또 있었는데 “어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사주당은 “주자(朱子)를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명명한 것이다. 훗날 숙인(淑人)의 작위(爵位)를 받았다.
사주당은 어려서부터 단정하였으며, 옛날의 열녀(烈女)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소학》 《가례》 《여사서》를 길쌈하는 등잔불 밑에서도 거듭 외우고 익혔다고 한다. 부친은 독서에 탐닉하는 사주당을 보고, “옛날 고명한 선비들을 보면 그 어머니가 글에 뛰어나지 않은 분이 없었다.”고 하면서 딸의 학문을 장려하였다. 사주당은 출가 전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섭렵하여 미묘한 이치를 깨우치는 경지에 도달하였으며, 주변의 이씨 문중 선비들도 앞서는 자가 없었다.
또한 사주당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출가 전에는 부친을 위하여 고기를 먹지 않고, 솜옷도 입지 않았으며, 옛 제도를 지켜 행하고 행동마다 예훈(禮訓)을 따랐다. 이러한 행실이 충청도 전체에 널리 퍼져 감탄하여 칭송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때 사주당의 나이 15세였다. 이미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행실이 보통사람을 뛰어 넘는다는 소문이 유한규(柳漢奎)에게까지 전해졌다. 당시(1753년) 유한규는 36세였다. 이미 부인을 세 번이나 잃어 다시 장가갈 뜻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사주당의 행실이 훌륭함을 전해 듣고 “이 사람은 늙으신 내 어머니를 반드시 잘 모실 것이다.”고 생각하여 청혼하였다.
사주당이 진주유씨 가문에 들어왔던 당시에는 시어머니가 연로하여 눈이 어둡고, 자주 격노하여서 곁에서 모시기에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주당은 기꺼이 순종하여 받들어 모셨다. 이를 지켜본 시댁의 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신부는 나이가 어린데도 힘드는 줄도 모르고 성낼 줄도 모른다.”고 칭송하였다. 사주당은 타고난 성품이 엄하고 삼감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예법에 해박하여 주변 사람들이 감히 얕보지 못하였다. 여러 동서들이 문벌 있는 집안 출신이고, 시누이들도 집안이 부귀하고, 또 나이가 두 배 가까이 많았지만 사주당을 존경하고 귀중하게 여기기를 마치 큰손님을 대하는 것 같이 하였다.
남편 유한규는 사주당보다 21세 연상인데도 아내를 귀중하게 여기고 도의(道義)로써 대하였다. 때로는 서로의 감정을 시로 읊으며, 때로는 심오한 학문을 담론하는 등 친분이 각별하였다.
이처럼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독서와 학문을 계속할 수 있게 되자 사주당은 자신의 아이들을 가르칠 만한 내용들을 모아 육아독본(育兒讀本)으로 한 권의 가어(家語)를 저술하였다. 남편이 책이름을《교자집요(敎子輯要)》라 명명하고, 서(序)에 이르기를 “내훈(內訓)과 여범(女範)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격찬하였다. 이 책은 훗날 사주당의 대표적 저술인 《태교신기》의 밑바탕이 되었다.
사주당이 45세 되던 정조7년(1783)에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있던 남편이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남편의 고향인 용인 관청동(觀靑洞)의 당봉에 모셨다. 이후 어린 자녀들을 거느리고 남편의 묘소가 바라다 보이는 모현면 매산리로 이사와서 살았다. 이 당시는 너무나 가난하여 필요한 의식주를 구할 수가 없었던 정도였다. 그럼에도 자녀들의 학업은 중단하지 않았다. 궁핍한 가운데서도 사주당 자신과 네 자식을 깨끗하게 다스리니 원근의 사람들도 신임이 도타웠다.
사주당은 항상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게 살았기 때문에 가산을 점차 늘릴 수 있었다. 절약하여 남는 재물을 별도로 저축하여, 산 아래의 제전(祭田)을 사들였고, 오래되어 허물어진 조상의 묘역을 수리하였다. 모든 일을 맡아 처리함에 무리가 따랐지만 대부분의 일을 혼자 해내었다. 마침내 자녀들이 성장하여 모두 자립하게 되었다.
아들 경(儆:1773~1834)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한데다 넓게 상고(詳考)하여 경사(經史)를 연구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조선후기 실학파에 속하는 유학자이자 음운학자(音韻學者)로서《문통(文通)》 《물명고(物名攷)》 《언문지(諺文志)》  10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큰따님은 병절랑(秉節郞) 이수묵(李守?)에게 출가하였다. 둘째 따님은 진사 이재녕(李在寧)에게 출가하였다. 셋째 따님은 박윤섭(朴胤燮)에게 출가하였다. 모두 부덕(婦德)이 뛰어나다고 칭송받았다. 훗날 《태교신기》가 간행되기에 이르자 아들 유희와 큰딸 둘째딸이 모친 사주당을 사모하는 애절한 글을 발문으로 남겼는데, 그 문장 역시 매우 뛰어났다.
일찍이 사주당이 친가(親家)를 위해서 순리에 따라 집안을 다스리고 후일을 수립하였는데도, 만년에 이르러 후사가 끊어지자 집안 어른들이 삼대(三代)의 신주를 땅에 묻어 버렸다. 이를 목격한 사주당은 애끊는 마음으로 말하기를, “여생이 아직 죽지 못하고 친정의 사당이 헐리는 것을 보고 견디자니 이 역시 상(喪)을 당한 것과 같다.”고 하면서 소복(素服)을 입고 문중의 어른을 두루 찾아 뵌 후에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하였다. 이 사주당의 행동과 마음 씀이 이처럼 경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평생 학문에 정진하고 실천하는 사주당의 처신에 많은 사람들이 흠모하고 찾아와 강학하였다. 노년에는 도정(都正) 이창현(李昌顯)과 세마(洗馬) 강필효(姜必孝), 상사(上舍) 이면눌(李勉訥), 산림(山林) 이상연(李亮淵) 등 식견 있는 사람들이 마루에 올라와 큰절하면서 사주당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사주당의 학문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사주당은 유희의 봉양을 받으면서 지내다가 1821년(순조21:辛未年) 9월 22일(己巳日)에 한강 남쪽 서파(西陂)에서 세상을 마쳤다. 향년 83세이다. 사주당은 유언하기를, 친정 어머니의 편지 1축과 남편 목천공이 저술한 《성리답문》 1축, 자신이 베낀 《격몽요결》1권을 입던 옷과 같이 관에 넣어 달라고 하였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부도(婦道)를 다했음을 이런 데서 알 수 있다. 다음해인 3월 정묘일(丁卯日)에 용인의 관청동 당봉에 장례하고, 목천공과 합장하였다. 사주당의 묘지명을 지은 신작(申綽)은 사주당을 평하여 “평생 말하고 토론하던 것이 주자(朱子)를 본받아 기질이 본연(本然)의 성(性)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인심(人心)이 도심(道心) 밖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근거가 정확하였다.”고 하였다.

▲ 사주당의 학문세계

   
사주당은 오로지 유학 경전에 심취하였으며, 유학에서의 덕목을 실천하기 위한 의례서(儀禮書)에 큰 관심을 보였다. 조선 후기 여성들이 주로 여범(女範) 내훈(內訓)과 같은 필독서 외에 문집류의 서적을 즐겨 읽은 것과 대조적이다. 사주당의 작은 딸은 어머니에` 대해 “대도(大道)에 뜻을 두어 이기성정(理氣性情)의 학문을 넓히시고 속된 책을 읽지 않으시며, 음영을 좋아하지 않으시니 시속(時俗)과 다름이 있으셨으며, 평소 저술 활동에 대하여 옛사람의 찌꺼기에 불과하다면서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술회하였다.
조선후기 여성 지식인들의 학문적 경향을 전제할 때 사주당도 여성으로서의 제한된 범주에서 자녀와 여성 교육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평가는 사주당의 학문세계에서 한 부분을 부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사주당(師朱堂)’을 자신의 호로 삼아 이기성정(理氣性情)의 성리서를 탐독하고 실천하였던 사주당은 여성 실학자, 또는 여군자(女君子)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사대부들이 사주당의 깊은 학문을 흠모하고 찾아와 강학하였다는 사실은 사주당이 유학자로서의 면모를 갖췄음을 시사한다. 경전을 통해 성인의 도리를 깊이 연구한 사주당이기에 여성으로써 행하여야 할 이상적이면서도 모범적인 틀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다른 저술을 모두 버리고 《태교신기》 만 전하라고 한 것도 이같은 시각에서 이해된다.
사주당은 태교의 근본이 성인의 도리를 잘 알고자 함에 있다고 언급하였다. 구체적으로 유학의 인성론, 실천 덕목인 효를 강조하고 있다. 태교를 하는 근본적 이유도 조상을 닮은 효자를 낳기 위함이라 하였다. 인성이 하늘에 근본하며 기질이 부모로부터 타고난다는 사주당의 생각은 유학자들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사주당은 민간에서 행하고 있는 산속(産俗)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무불적(巫佛的)인 관습에서 행해진 행위는 오히려 기(氣)를 거슬리고, 거슬린 기운이 점차 길한 바를 없앨 수 있다고 하였다. 《태교신기》 에서 문헌의 근거가 유교 경전에 국한되었다는 점도 사주당의 학문이 유교 철학적인 인식에서 비롯했음을 증빙한다.

▲ ‘태교신기’의 저술 과정과 내용
《태교신기》 는 여성 실학자로 추앙되는 사주당 이씨(師朱堂李氏)의 저술이다. 태교법을 소개한 단편적인 기록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태교를 집중적으로 다룬 저술은 동서고금을 망라해 《태교신기》 가 처음이다.
사주당은 자녀를 가르치는데 참고하기 위해 《교자집요(敎子輯要)》 를 저술한 바 있다. 훗날 자녀들이 장성하여 이 책이 소용없게 되자 방치하였는데, 우연히 막내딸의 옷상자에서 발견되었다. 사주당은 감회를 느끼며 자신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리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에《교자집요》에서 사소한 것은 버리고, 양태절목(養胎節目)만 취하여 보다 명확하게 설명하고, 《소의(少義)》 《내칙(內側)》 에 빠진 것을 보충하였다. 구체적으로 경전에서의 예법을 기본으로 삼고, 《열녀전(烈女傳)》 《대대례기(大戴禮記)》 에 나오는 태교 이야기와 《황제내경(黃帝內經)》 등의 한의서에 나오는 태교 관련 내용을 참작하여 보충하였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태교에 대한 의혹을 일깨우는데 힘쓰라는 바램에서 ‘태교신기’라 명명하였다.
사주당이 《태교신기》 를 완성한 때는 그가 62세 되던 1800년(정조24)이다. 이 책이 완성된 후 1년 동안 아들 유희가 장(章)과 절(節)로 글귀를 나누고, 주석(註釋)을 붙였으며, 음의(音義)를 언문(諺文)으로 해석하였다. 사주당이 진갑을 맞는 해에 《태교신기》 를 완성하고, 아들 유희를 낳으신 생일날에 언해(諺解)를 마치게 되었는데, 모두들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1801년(순조1)에 유희가 재편집하고 언해한 책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태교신기》 이다.
《태교신기》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빙허각이씨의 《규합총서》(1809)에서부터인 것 같다. 《규합총서》 에도 태교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있는데, 이는 외숙모인 사주당의《태교신기》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근대적 여성교육운동이 일던 1908년에도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에 7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태교신기》가 간행되어 정식으로 보급된 것은 1937년 1월이다. 유희의 현손인 유근영(柳近永)이 석판본으로 《태교신기언해》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사주당이 한문으로 지은 원문(原文)을 유희가 장절(章節)을 나누고, 상세한 주(註)를 붙인 것이다. 2부는 사주당의 묘지명(墓誌銘) 및 발문(跋文)을 모아 수록한 것이다. 3부는 유희가 원문에 한글로 음(音)과 토씨를 단 후, 본문을 언해(諺解)한 것이다.

▲ ‘태교신기’의 내용
《태교신기》는 10장 35절의 태교 이론과 서·발문, 묘지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사주당이 저술한 한문본에는 장절의 구분이 없었는데, 유희가 장절을 구분하고 음의와 언해를 붙여서 원문 26장, 언해 43장, 합 69장으로 다시 엮었다. 번역문에 나오는 모든 한자에는 한글로 음을 달았으며, 다른 언해본들과 마찬가지로 한 문장씩 떼어서 먼저 한글로 토를 달고, 이어서 우리말로 옮기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각 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제1장: 자식의 기질의 병은 부모로부터 연유한다는 것을 태교의 이치로써 밝혔다. ②제2장: 여러 가지 사례를 인용하여 태교의 효험을 설명하였다. ③제3장: 옛사람은 태교를 잘하여 자식이 어질었고 오늘날 사람들은 태교가 부족하여 그 자식들이 불초(不肖)하다는 것을 말하고, 태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④제4장: 태교의 대단(大段)과 목견(目見)·이문(耳聞)·시청(視聽)·거처(居處)·거양(居養)·행립(行立)·침기(寢起) 등 태교의 방법을 설명하였다. ⑤제5장: 태교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태교를 반드시 행하도록 권하였다. ⑥제6장: 태교를 행하지 않으면 해가 있다는 것을 경계하였다. ⑦제7장: 미신·사술(邪術)에 현혹됨을 경계하여 태에 유익함을 주려고 설명하였다. ⑧제8장: 잡다하게 인용하여 태교의 이치를 증명하고, 제2장의 뜻을 거듭 밝혔다. ⑨제9장: 옛사람들이 일찍이 행한 일을 인용하였다. ⑩제10장 : 태교의 근본을 거듭 강조하였다.

▲ ‘태교신기’의 가치
《태교신기》는 사주당 자신이 네 자녀를 양육하면서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직접 살핀 바를 징험하여 저술한 것이다. 직접 체험하고 징험한 결과를 정리한 기록이기에 후대 사람들의 각별한 관심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사주당은 이 책을 통해 태교라는 단일한 주제를 인성의 형성과 가르침이라는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조선시대에 통용되던 태교는 생활 속에서 의식주 등을 삼가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사주당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학자들의 덕목인‘삼감[謹·愼]’의 경지에까지 확대하였다. 사주당에 의해 태교는 하나의 철학으로서 재탄생했으며 여성들도 수신해야 할 존재로 탈바꿈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태교를 여성의 임무로 한정시킨 데 비해 사주당은 《태교신기》 에서 임신부를 대하는 도리를 제시하여 태교의 개념을 온 가족에까지 확장시켜 놓았다. 이 책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1장 2절의 다음 구절이다.

“스승의 십년 가르침이 어머니가 열 달 길러줌만 못하고, 어머니가 열 달 길러줌은 아버지가 하루 낳아줌만 못하다.”

태교에서 임신부의 열 달간 노력보다도 아이를 갖고자 하는 아버지의 하루 마음가짐이 더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사주당의 《태교신기》가 태교서의 효시라는 평가 외에 더욱 각광을 받는 이유가 있다. 사주당은 조선시대의 한 여성이기 이전에 선각자로서 인간에 대한 깊이와 애정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남편인 유한규는 22세나 연상이며, 세 번이나 아내를 잃었고,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그러한 시댁에서 살림을 꾸리면서도 독서와 학문 탐구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와 함께 학문을 토론하였으며, 아내의 저술에 《교자집요》라는 제호를 달아주었다. 훗날 이 책을 보완하여 《태교신기》를 완성하자 아들 유희는 언해와 주석을 달아 보충하였다. 딸들은 어머니의 책에 발문을 써서 감회를 기록하였다. 《태교신기》는 사주당의 가족 모두가 참여하여 엮은 책이다. “태교는 온 집안이 함께 해야 한다.”는 구절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태교신기》는 사주당의 성리학적 식견을 바탕으로 자신의 체험을 정리한 저술이다. 태교를 철학적인 견지에서 여성의 수신의 방안으로 제시하고, 태교의 이론과 실제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