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계 3대 거물을 꼽으라면 보리수 아래 6년 득도 석가모니, 설산 면벽수도 9년 달마, 10년 장좌불와(長坐不臥) 성철 스님이다.
하늘이 성철로 하여금 뼈를 깎는 고행을 10년씩이나 수행하게 한 이유는 뭘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도 십자가에 매달려서 단 하루도 못 버티고 절창(絶唱) 일곱 수만 남겨놓은 채 절명했거늘. 10년이란 세월 동안 등짝을 바닥에 안대고 오로지 엉덩이로만 앉아서 버틴다는 것은 인간의 입으로 논할 대상이 아니다. 눈 쌓인 동굴밖에 꼼짝 않고 서 있다가 한쪽 팔을 잘라 달마에게 바치며 배움을 청한 이조혜가(二祖慧可)는 입설단비(立雪斷臂)라는 이름을 얻었다.
후학인 성철은 그런 조사의 굳은 의지를 가슴에 담은 채 자신의 방을 퇴설당(堆雪堂)이라하고 종신불퇴(終身不退) 네 글자를 더해서 10년 장좌불와를 완성한다. 하늘은 성직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성철을 통해 말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부처님 오신 날을 전 후해서 세 가지 불편한 진실을 접하게 된다. 첫째, 여의도 순복음 교회 창업주 조용기 목사의 새벽예배 도중 교인들에게 느닷없이 큰 절 올려 용서를 구한 사건. 둘째, 역삼동 충현교회 창업주 김창인 목사의 뜬금없는 공개 회개 사건.
셋째, 전남 장성관광호텔 승려들 도박판 몰카 사건. 세 사건의 이면에는 모두 돈이 깔려있다. 성직자라면 주머니에 돈이 있어서도 안 되고 입으로 돈을 말해도 안 된다. 돈을 말하고 싶으면 성직을 떠나라. 성직자들은 돈에서 ㄴ을 빼야한다. 스님들은 돈에서 ㄴ은 뺐는데 일부 승려는 닦으라는 도는 안 닦고 도박을 했다.
물론 이것도 큰 스님 되는 수행과정이려니 하면 간단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인들이 성직자의 말에 머리를 숙이는 것은 그들보다 못 나서도 못 배워서도 아니다. 그들이 자신만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뼈를 깎는 고통을 참으며 쌓아온 가공 할 수 없는 도덕률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교회는 돈이 필요했나? 회개든 용서든 거기엔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한다.(누가복음 3:8) 내가 이깟 보리쌀 찌김이 두어 말 때문에 너 같은 것들에게 머리 숙이랴. 도연명의 낙향기(落鄕記) 귀거래사다. 훗날 자식들은 바보 천치가 됐고 늑막에 굶어 죽었다. 분명한 것은 성직자보다 더 높은 도덕률임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