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고다이바 부인은 11세기 영국의 코벤트리 시(Coventry)의 영주(領主)인 레오프릭(Leofric)백작의 부인이었다. 어느 날 백작 부인은 영주의 혹독한 세금징수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사실을 알고 백작에게 몇 번씩이나 세금을 감면해 주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백작은 “당신이 알몸뚱이로 말을 타고 코벤트리 시내 거리를 한바퀴 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야!”라고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백작 부인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공중의 행복을 위하는 일이라면” 알몸으로 말을 탄들 어떠랴 하는 심정으로 말을 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코벤트리 시의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부인이 말을 타고 거리를 돌 때에는 누구도 창문을 굳게 닫고 내다보지 않기로 결의를 하였다.
고다이바 부인은 긴 머리카락으로 앞을 가린 다음 알몸으로 말을 타고 시내 거리를 돌기 시작했다. 시민들도 약속대로 말을 타고 거리를 누비는 고다이바 부인을 창틈으로라도 엿보는 사람하나 없는 듯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호기심 많은 재단사 톰(Tom)이라는 사나이만은 시민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창문 틈으로 그 부인의 알몸을 엿보았다. 그 순간 그 톰이라는 사나이는 그만 두 눈이 멀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더러는 전설로 더러는 사실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러나 그 진위(眞僞)와는 관계없이 고다이바 부인의 용기와 자비심은 그 뒤 그림으로 시로 화폐로 동상으로 기념되어 왔다.
말하자면 고다이바 부인은 “백성의 행복을 위한 숭고한 행동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일화의 주인공”이 되었고 양복 재단사 톰은 자신의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한 죄로 졸지에 “엿보는 톰(Peeping Tom)”이 되어 영원히 “관음증이나 호색한”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얘기다.
인간은 애초에 순결하게 태어났으나 죄를 짓고부터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서양사상에 비추어 보면 옷을 입는다는 것은 수치를 감춘다는 뜻이요, 벌거벗는 다는 것은 어떤 수치(羞恥)도 감출 것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고사(故事)가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우선 사람들은 누구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옷을 입는다. 그러나 고다이바 부인은 알몸을 공개했다. 알몸은 지순한 순결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이의 공개는 순진무구한 무한 봉사를 상징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공인(公人)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 고다이바 부인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공직에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수치스러움도 없는 알몸으로 나서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어떤 수치도 옷으로 가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요즈음의 국회에서 공직 취임 예정자를 앞에 앉혀 놓고 그 너울을 사정없이 벗겨 내는 것도 그 일환이라 할 것이다. 자신의 수치스러움을 겹겹의 옷으로 감싸고 있어서는 공직에 취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중의 행복추구가 사명일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만은 버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톰이라는 사나이가 부인의 알몸을 문틈으로 엿본 행위로 인해 하늘의 벌을 받았다는 뜻은 또 무엇일까? “엿본 톰”은 호색한의 대명사처럼 쓰고 있지만 호색한이기 때문에 하늘의 벌을 받았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그가 벌 받은 것은 ‘신의성실(信義誠實)’이라는 법률의 기본 철칙을 어겼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법률의 대원칙을 어기고서야 어찌 벌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주민들 간의 약속이 바로 법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법을 교묘히 어길 수 있는 사람이 언제나 유능한 사람이 되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화려한 옷으로 잘도 감싸 안은 사람이 출세하는 사회에 대한 경종이 바로 고다이바 부인에 대한 얘기가 아닌가 싶다. 고다이바 정신이 요구 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