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기원전 4세기는 현자들의 전성기다. 그야말로 일국의 군주를 상대로 언어가 주는 포장의 기술을 논하는 말의 향연이 꽃피던 시기다. 그들은 왕의 초청을 받아 지혜의 한수로 담론을 폈으며 그런 현자를 군주들은 왕사王師로 대우했다.
양혜왕과 맹자와의 관계도 그중 하나다. 살아남기 위해선 안할 짓도 못할 짓도 없다던 사내가 양혜왕이었다면 오로지 세 치의 혀 하나만으로 천하를 들었다 놨다하는 사내는 맹자다. 맹자는 공자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거칠 것이 없는 직선<直>의 사내다. 반면에 양혜왕은 일국의 군주답게 나라가 부국강병이 될 수만 있다면 굽은들 무슨 상관이며 꺽어진들 무슨 대수랴 싶은 곡선<枉>의 사내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척점對蹠點은 패도정치냐 왕도정치냐에 달렸다. 당시 위나라 양혜왕은 동쪽으로는 제齊나라 손빈 대장군이 이끄는 마릉馬陵전투에 패해 양혜왕측의 대장 방연은 자살하고, 그의 아들 태자신은 사지가 찢겨죽었으며<東敗於齊長子死焉> 서쪽으로 진나라에 700리 河西·上郡지역 15현을 빼앗겼으며<西喪地於秦七百里> 남쪽으로 초나라와의 양릉襄陵전투에서 패해서 8읍을 빼앗기는 모욕을 당했고<南辱於楚> 더군다나 진秦나라의 잦은 침략으로 인해 위나라는 점점 더 줄어들어 수도를 지금의 개봉부인 대량大梁으로 옮기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혜왕을 위나라 군주 위혜왕이 아닌 대량의 도시 시장격인 양혜왕이라 격을 낮춰 불렀다. 다분히 비아냥거리는 속내가 묻어난다. 이 치욕을 설복하고자 하여 맹자를 청빙했던 것이다<如之何則可>. 여기서 나온 말이 역장유이리오국호亦將有以利吾國乎엿고, 이에 대한 답변이 하필왈리何必曰利였던 것이다. 국정을 묻기 위해 모신 현자를 양혜왕은 이익수단이나 챙기는 이따위로 대우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이익의 끝이 백성이 아닌 자신을 향함에 있음이라는데 그 심각성이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정을 운영하는 자들의 첫 번째 과제는 백성, 곧 국민이다. 국민을 잘 먹고 잘살게 해주는 것이 저들이 하는 일이다.
지난 6월1일부로 국민에게 선택받은 300명의 당선인은 국회의원신분이 됐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마치 권력인양 또 그것을 권리인양 나대지 말고 국민에게 부여받은 4년의 임기를 오로지 국민을 위해서 국민을 배신하지 않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