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장면 1
현종 12년(1671) 함경도 관찰사 약천 남구만은 기근이 들어 민초들이 굶어 죽게 되자 조정에 장계를 올려 임금의 윤허를 받아 강원도·평안도의 곡식과 영남지방의 쌀을 얻어다 구제했다. 또한 변방의 궁벽한 곳의 성과 보루를 두루 돌며 정비하고 이를 손수 지도로 제작했다. 약천 선생이 임기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온 뒤, 함경도 백성들이 약천 선생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생사당(生祠堂)을 세웠으며, 1711년 세상을 떠났을 때는 함경도 백성 7000여 명이 함흥에 모여 통곡하였다.
#장면 2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으로 영의정이 되어 조정으로 복귀한 약천 선생은 일본의 간교한 울릉도와 독도 침탈 계략을 간파하고 “왜인들이 울릉도에 거주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강토를 어떻게 남에게 줄 수가 있겠습니까?”고 건의하여 숙종의 명으로 ‘울릉도와 독도는 엄연히 조선 땅이므로 다시는 이곳에 귀국 사람들이 침범하지 말라’는 강경한 서계를 써 보냈다. 이듬해 대마도 도주는 다시 서계를 고쳐 달라고 청해왔으나, 약천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지난 11월 27일 ‘2021 약천 남구만 문학제’를 마쳤다. 용인문학회는 2009년부터 약천 선생의 문학세계를 조명하고 그의 뜻을 계승하고자 해마다 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약천, 새로운 시대를 꿈꾸다’ 제하로 문학특강과 시낭송, 음악공연 및 제4회 남구만 신인문학상 시상식을 열었다.
약천 남구만은 900여 편의 시를 남긴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지만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한미한 집안에서 몸을 일으켜 우국애민과 성실함, 공명정대함과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간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네 번의 유배형에 처할 정도로 부침했지만 원칙을 잃지 않았다. 이런 약천에 대해 명곡 최석정은 ‘박학다식하여 진실로 대적할 사람이 없는 불세출의 영웅호걸’이라고 평가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당쟁 이후로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이 편파적으로 기울었지만, 약천 선생만은 공정성과 뚜렷한 소신을 갖고 일을 처리하여 나라의 명맥을 보호하였고, 끝내 청렴과 절개로서 생애를 마친 ‘불세출의 위인’으로 선생이 남긴 상소문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으며, 다산 자신도 약천 선생을 우러러 사모한다고 했다.
정조는 ‘남구만의 상소문은 관각의 나침반’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상소문 등 관각문학에 뛰어난 대문장가였고, 역사에도 해박하여 「동사변증(東史辨證)」을 남겼으며,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안진경(顔眞卿)체에 뛰어났다.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고, 손수 지도를 제작했으며, 병조판서(국방장관)를 맡아 국방을 튼튼히 하는 등 그의 안목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실로 ‘약천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약천 선생이 용인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조부 남식과 부친 남일성의 묘소를 용인 화곡에 쓰고 부터이다. 이후 58세(1686)부터 비파담에 머물기 시작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20년 넘게 용인에 거주하였다. 용인 땅에 잠든지 300여 년이 넘었고, 후손들도 이곳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용인은 약천 선생과 깊은 관계에 있는 것이다.
약천 남구만 선생이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소신, 당파보다는 나라를 우선시하고, 민중의 삶을 정치와 행정의 최우선으로 두며 실천적 정의를 구현하는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문학작품도 음풍농월이 아닌 민중의 고단한 삶과 함께 하고 국토수호의 의지를 그린 시가 많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그러므로 혼탁한 이 시대에 민생과 나라사랑에 앞장 선 약천 남구만이 그립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