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전래동화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옛날이야기를 말한다. 우리 옛이야기를 기록한 최초의 3대 동화집은 『조선동화집』(조선총독부, 1924), 『조선동화대집』(심의린, 1926), 『조선전래동화집』(박영만, 1940)이다. 『조선동화집』은 최초의 기록이긴 하지만 당대 일본인의 시각에서 편집되었다. 『조선동화대집』은 한국어로 기록된 최초의 전래동화집이지만 근대적인 문물이 등장해 옛이야기인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조선전래동화집』은 박명만이 채록한 이야기 75편이 실려 있다. 도서는 저술 동기와 저자 소개로 시작되어 75편의 이야기가 소개되며 마지막 부분에는 원문 영인본을 싣고 있다. 우리 이야기인데도 번역자가 필요한 이유는 오래 전 기록된 문헌이 현대인이 이해하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야기마다 채록한 지역 이름을 기록하기도 하고 저자가 자신의 기억을 참고했다고 적기도 한다. 60여 편의 이야기들은 북한의 옛이야기이다. 어떤 이야기는 근원적인 인간의 마음 탐구에 대한 열정이 드러나며 언어적인 측면에서도 구술하는 현장감을 살려 표현했다. 민담이 갖는 특유의 재미를 찾는 즐거움도 있다. 전래동화의 변화무쌍한 변화를 관찰하게 되는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기도 하
[용인신문]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유학자이자 실학자였다. 남인 출신으로 성호 이익의 영향을 받았으며 정조 재위 당시 과학자의 면모도 보였다. 이 때 관심을 갖게 된 천주교로 인해 19년의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유배는 거대한 저술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필자는 다산이 예순에 이르러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기 위해 적은 글을 엮어낸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살고도 예순에 “자신을 잃은 자”라고 적고 있는 다산의 글귀를 인용하며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길을 탐구해 보는 책이다. 다산의 습관은 삶 속에 습관이 된 관성을 버려야 한다고 요구한다. 좋은 생각과 좋은 행동만큼 거리가 먼 것이 없다는 배움의 이야기는 독자의 지금을 살피게 할 것이다.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하는 것이 어른이라는 말은 어른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재능을 발휘하는 데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니 꾸준함을 유지하라는 말은 정권이 바뀌는 시기에 다시 곱씹어야 할 말이기도 하다. 말은 무겁고 울림은 크다. 다산의 습관에 관한 조언들은 어찌보면 자기계발서에서 익히 발견했던 것들과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말이 자신의 삶으로부터 비롯되
[용인신문]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가난했던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다.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던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겨우 프랑스 기자협회의 공인을 받은 저널리즘 부문의 그랑제콜을 졸업하고 기자가 되었다. 30년간의 기자생활 후 은퇴한 그는 실크로드를 걷기로 마음먹고 봄부터 가을까지 길을 걷는다. 그 과정을 적은 책이 『나는 걷는다』이다. 세 권으로 출간된 책의 인세는 쇠이유(Seuil)라는 비영리재단의 재원으로 쓰이고 있으며, 재단은 프랑스 비행청소년이 2000km 걷기에 참여해서 성취감과 자존감을 스스로 갖고 바람직한 시민으로 편입할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나는 걷는다』는 다른 여행 에세이와 달리 사진이 없다. 편집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길만이 중요할 뿐이며, (중략) 길이란 게 걷는 사람의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가 세계에-그리고 자신에게-부여하는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시선이 물질화된 것임을 알고 있다. 이를 인식하는 데에는 말만으로도 충분하다.”(8쪽) 60세라는 나이는 은퇴 후 풍요와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기였다. 여정엔 인간이나 자연에서 오는 위협도 존재했다. 하지만 저자는 마르코폴로가
[용인신문]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라는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폭풍우) 에서 차용해 왔다. 템페스트에는 미란다라는 여성인물이 ‘아름다운 세계’라고 하는 말이 나온다. 동생에게 쫓겨난 아버지와 외딴 섬에서 살던 미란다는 난파선에서 내린 사람들을 보며 아름답다(Brave New World)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해치려고 했던 인물들이니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다. 멋진 신세계도 제목과 내용이 아이러니한 관계에 있다.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인간적인 가치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작품속에서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세계관은 “공동체, 동일성, 안정성”이다. 이를 위해 개별성이나 다양성이 무시되고 인공수정과 교육을 통해 계급을 유지한다. 충만한 사랑으로 태어나야 할 아이들을 공장에서 생산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야만으로 치부한다. 소설에서 아이들이 꽃과 책을 증오하게 만드는 훈련과정은 주도면밀하다. 지배계급을 만드는 과정 역시 정교하게 설계되어 오랜기간 빈틈없이 진행된다. 효율이 중요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이든 수단으로 쓸 수 있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 궁극적으로 멋지지 않은 상황이다. 이 모든 것을 보여준
[용인신문] 메타버스는 닐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이라는 미국의 SF작가가 쓴 소설 『스노우 크래시(Snow crash)』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으로 가상세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소설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원』(2018)은 ‘오아시스’라고 하는 가상세계를 실감나게 보여 주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메타버스라는 개념은 더욱 중요한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저자는 메타버스를 ‘나를 대변하는 아바타가 생산적인 활동을 영위하는 새로운 디지털 지구’(38쪽)라고 말하며 메타버스의 세계관을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필자는 메타버스의 특징을 다음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가상과 현실의 기억과 정보가 연결되고, VR혹은 AR 등의 기기를 이용해 실재감을 끌어올린다. 가상의 아이템을 구매하기 위한 화폐는 현실과 상호 연관되며, 여러 사용자가 동시 접속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메타버스가 현실 경제에 미칠 영향이다. 메타버스에 시중은행이 가상점포를 열기 시작했다는 것은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게임은 이미 메타버스의 개념을 구현하고 있다. 넷플릭스 등과 같은
[용인신문] 『동물농장』, 『1984』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조지 오웰의 산문집 『코끼리를 쏘다』는 오래 전에 출간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앞의 현실을 살피게 하는 도서이다. 전체주의도 폭군도 거의 사라졌지만 여전히 민주주의는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 다섯 부에 걸쳐 소개되는 조지 오웰의 산문은 식민통치에 대한 환멸과 도시에 사는 약자들의 모습, 그의 문학에 담긴 정치성, 유럽 문학에 대한 조지 오웰의 생각 등이 포함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뭔가 글을 열심히 적은 조지 오웰은 일찍부터 자신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소명의식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글을 쓴 동기를 크게 네 가지로 소개한다. 작가로 살고자 하는 염원과 예술가로서 미학적 성취를 이루려는 목적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 · 정치적 충동에서 비롯된 글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지 오웰은 자기 자신에게 냉철했다. “나의 작품을 돌이켜보건대, 정치적 목적이 결여 된 곳에서 내가 한결같이 화려한 문체, 의미 없는 문장, 쓸모없는 장식적 형용사 등에 유혹당한 생명 없는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90쪽)고 말하며 자신의 글을 반추하기도 했을 정도다. 산문집은 소설과 달리 작가 내면의 실체
[용인신문] 덴마크 출신의 작가 안데르센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은 2년에 한 번씩 선정된다. 이 상은 작가의 특정 작품이 아닌 전반적인 작품을 검토해서 선정하기 때문에 받기가 매우 어려운 상이다. 그런 상을 우리 이수지 작가가 받았다. 이수지 작가의 약력을 보면 그의 글로벌 역량이 아주 오래 전부터 발휘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수상은 한국 문화가 이루어낸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의 최근 작품 중 『여름이 온다』는 2022년도 볼로냐에서 열린 아동도서전에서 라가치상을 받았다. 『여름이 온다』는 이수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그림책이다. 음악은 이수지의 상상을 자극하는 또 다른 길이었다. 가족들과 여름날 마당에서 했던 물놀이의 추억이 음악과 어우러져 한 판 마당놀이를 하듯 그림책에 펼쳐진다. 비발디의 ≪사계≫중 여름은 현악기들의 연주에 의해 지면에서 화창한 여름날과 보슬비와 비 바람 천둥 번개와 같은 것들로 변신한다. 거친 선이 주는 비바람이나 독특한 색이 주는 싱그러움이 돋보이기도 한다. 음악에 흠뻑 젖은 등장인물은 여름날 물과 비와 놀이가 하나되어 한판 마당놀이를 보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림책은 글과 그림의 리듬
[용인신문] 김숨은 1974년 울산에서 태어나 바지런히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다수의 수상경력(허균문학작가상,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은 그 노고의 결과물일 것이다. 대선과 강원지역 산불로 나라가 들썩이는 시간에 우리가 잊은 것은 무엇일까? 김숨의 『듣기 시간』을 들여다보며 3월을 생각한다. 이 작품은 일제 강점기에 위인부였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조사하는 과정을 소설로 썼다. 문제는 피해자들의 증언 녹취에 구체적인 언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정확한 기록을 위해 증언을 녹음했다. 녹화된 테이프의 재생시간은 60분이지만 그 시간 내내 녹음이 되어 있는 말은 인터뷰를 하러 간 사람의 말이 대부분이고 정작 피해자의 말은 없다. 침묵을 녹음했을 뿐이다. 자신의 말을 지우고 싶지만 “그럼 내 목소리와 함께 녹음된 그녀의 침묵도 지워지니까, 내 말보다 그녀의 침묵이 중요하니까, 그녀의 침묵은 발화되지 못한 말이기도 하니까.”(9쪽) 지울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의 시간관념에선 일제강점기가 과거의 일이지만 소설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현재는 여전히 과거의 고통이 머물러 있다. 『듣기 시간』은 작은 숨소리조차도 이야기로 엮어내는 작가
[용인신문] “얼마나 힘들어야 웃음으로 고통을 포장하게 될까”(208쪽) 10대의 이야기 이지만 지금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올해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을 받은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이야기를 드라마처럼 펼쳐놓는다. 등장인물은 자신의 트라우마 때문에 가족에게 더욱 집착하기도 하고, 반대로 그것 때문에 가족과 철저하게 거리두기를 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마찬가지다. 곪은 상처는 걷어내야 새 살이 나듯이 과거의 사건과 감정으로부터 얽힌 상처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 결국 맺힌 감정의 응어리들을 훌훌 풀어내고 단단한 딱지를 만들어낸다. 이제 곧 새 살을 약속하는 딱지이다. 청소년소설에서 가족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는 흔한 편인데 『훌훌』은 소재 면에서 독특하다. 소설은 주인공 유리의 복잡한 상황을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하며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있다. 다소 신파적인 할아버지의 상황을 개성 있게 만드는 건 할아버지의 단순 명료한 대사 때문이다. 유리가 서정희씨라고 부르는 엄마의 생애를 ‘나쁜 사람’으로 일갈하지 않는 작가의 마무리도 훌륭하다. 진지함과 가벼움을 넘나드는 고등학생들의 묘사도 치밀하다. 단숨에 읽히는
[용인신문] 일제강점기가 끝난지 오래지만 여전히 친일청산이 문제인 상황에서 어김없이 3·1절이 돌아왔다. 폭력의 세기를 살던 과거의 인물들은 날카로운 역사의 평가 위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고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배신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지만 그러한 딜레마가 우리 앞에 닥친다면 우리는 다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의 만행을 목격한 입장에서 스텔라의 딜레마를 가볍게 보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과거에 있기때문이기도 하다. 『스텔라』는 과거 독일과 유대인 사이에 있었던 불행한 일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재판과 연이들의 사랑이야기와 독일과 유대인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들이 사슬처럼 엮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 이 작품은 우리 정서에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다. 게다가 이 이야기가 먼 나라에서 그것도 과거의 일인데도 지금 우리에게 유효한 까닭은 여전히 어떤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차선이 없는 상태에서의 선택 말이다. 스텔라는 무엇보다 외로웠다고 고백한다. 선택은 지독히도 개인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전개방식도 독특하다. 보통의 다른 소설처럼 연애 이야기가 소개된다. 1942년 일어난 사건이 뼈대를
[용인신문] 필자 노리나 허츠는 화려한 이력을 가진 필자이다. 그가 다닌 학교, 재직했던 회사, 연단이나 저술 등을 보면 경제 석학이라 불려도 무리가 없을 만큼 화려하다. 책날개에서 『고립의 시대』는 “21세기에 만연한 외로움과 그 사회적 비용을 밀도 있게 분석한 책”으로 소개된다. 필자는 21세기 외로움의 위기가 코로나19가 유행하기 훨씬 이전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외로움의 근본적 원인이 자유를 가장 우선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고립된 생쥐가 친구들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외로운 개인은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정치적으로 극단적으로 흐를 경향이 있음을 경고한다. 대개 코로나19 사태로 외로움이 극대화되었다고 하지만 필자는 잘못된 시각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정부가 개인의 건강한 삶에 관심을 가지고 사태에 적극 개입하기 때문에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대안 역시 이와 맥을 같이한다. ‘보이지 않는 손’을 말했던 애덤 스미스조차도 공동체와 다원주의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처럼 협력적 자본주의 시대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평등과 온정의 관계를 거래의 관계로 바꿨다면 기업과 금융권의 정서가
[용인신문] 어떤 이는 노인이라는 말을 슬픈 단어라고 생각하지만 주인공 카퓌신은 다르게 생각한다. 소설은 카퓌신이 고등학생 신분으로 벨레르 요양원에서 인턴을 하는 기간 동안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작품은 두 가지 면에서 따뜻한 이야기다. 하나는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의 갈등과 해소를 관찰하는 데 있다. 대체로 우리 사회에서 요양원에 간다는 사실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나이 들며 잃어가는 기억만큼이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지위를 잃은 노인들의 이야기는 어쩐지 국가를 뛰어넘는 서글픔이 전해진다. 하지만 노인들에게도 생에 대한 기쁨과 욕망이 있으며, 나름의 행복을 찾거나 나름의 삶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살며시 미소가 피어오르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고등학생 카퓌신과 요양사들이 살아내는 치열함과 배려에서 생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라는 요양사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카퓌신은 생각보다 가까이 어른들에게 다가간다. 카퓌신은 자신의 가발 속에 숨겼던 아픈 기억들을 인턴과정을 수행하면서 소화해 내고 삶의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프랑스에서 청소년을 위해 쓴 저작물들에서 관찰되는 것은 이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