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여왕이 죽었다. 많은 나라의 수장이 여왕을 추모하기 위해 모였고, 어떤 이는 여왕의 죽음에 춤을 추기도 했다. 장례식은 죽은 자를 위한 마지막 의식이기도 하지만 산 자들이 죽은 이의 존재감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오늘 소개할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장례식 이야기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7쪽) 이 얼마나 모순적인 발언인가. 아버지가 죽었다면 상실감과 슬픔으로 가득해야 마땅하겠지만 고아리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어쩐지 덤덤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버지는 너무 진지했고 오히려 그래서 사람들은 웃었다. 빨치산이었던, 사회주의자였던, 감옥에 갔던, 감시받던 아버지. 죽은 아버지와 조문객을 위해 떡을 비롯해 전을 부치고 국을 끓이고 밥을 차린다. 찾아온 이들은 밥을 먹으며 죽은 이를 추억하고 남은 이야기를 한다. 가장의 자리가 부실했던 가족 이야기나 평생 아버지와 원수로 지낸 작은 아버지의 이야기, 아버지의 담배 친구 혹은 술친구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장례식은 애도를 거쳐 축제의 분위기가 된다. 그리고 아버지는 빨치산에서 아버지가 된다. 그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진지하고 무거웠다면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언어는 독
[용인신문]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호모가 되지 마세요.” 라고 쓴 화장실의 낙서는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예수가 사람들을 조건없이 사랑한 것처럼 누구든 수용할 수 있지만 ‘누구든’에 어떤 조건이 생기면 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배척의 의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화장실 벽에 쓴 낙서』는 배척의 조건을 가진 인물 애덤의 이야기이다. 애덤은 조현병을 앓고 있다. 애덤의 곁에는 어떤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해 애덤에게 뭔가를 이야기 한다. 함께 점심을 먹는 드와이트, 길 가다가 갑자기 수영장에 뛰어드는 마야. 알몸으로 찾아오는 제이슨 등 애덤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이들이 보이고 애덤에게 말을 걸어온다. 애덤은 끊임없이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이 실재인지 환각인지 구분해내야 한다. 사람들이 조현병 발작을 혐오하니 애덤은 자신만 보고 듣는 세계를 숨겨야 하고 그래서 애덤은 외로울 수 밖에 없다. 보편적인 조현병 환자들과 달리 애덤은 일상을 소화해 내며 사람들 속에 어울리며 지낸다. 애덤의 상담과정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조현병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는 것 외에도 자신으로 사는 것이 외로운 이들에게 위로를 준다. 남들보다 더 큰 책임을 맡은
[용인신문] 수원의 세 모녀의 비극에 대한 뉴스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막을 수 있었던 비극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오래 전 신화에도 있었다. 메데이아가 이아손의 배신때문에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죽인 이야기다. 토니 모리슨은 『타인의 기원』에서 살해의 이유가 자식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타인이 되어버린 존재들이 차별과 혐오 속에서 기초적인 존엄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러한 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비정한 결정을 한 이유가 사랑이라는 논리가 과연 정당한 것일까? 『타인의 기원』은 절대로 자녀살해가 정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의 죽음은 차별과 혐오에서 시작된다. 차별의 시작은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인간성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고 하는데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들은 자기 집단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이들을 ‘타자’로 정하고 이들을 비난한다. 또한 자신들의 행위를 ‘낭만적’인 태도로 묘사하여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도덕성이나 정당성을 망각하도록 한다고 말한다. 이들이 정치세력이 되어 미디어와 결합하는 경우
[용인신문] ‘우리’라는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 가져야 할 태도는 사실 도덕 교과서에서나 찾아낼 유물이 된 듯 하다. 문제는 많지만 그것을 직시하기에는 삶의 과제들이 우리 앞에 산재한 까닭이다. 효율을 신처럼 떠받드는 사회에서 후아르트가 말하는 ‘산책’을 잃은 지 오래다. 산책을 한다고는 하지만 겨우 걷기 운동을 할 뿐이다. 필자의 말을 빌자면 “이 단순한 운동을 하면서,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살피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68쪽)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만이 산책자가 되어 자신의 시간과 청춘을 잃어버릴 줄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산책이라는 단순한 운동을 하면서 주변을 들여다보고, 살피고, 목소리를 들으라고 말하는 대신 그것을 하지 않는 인간들의 행태를 비판한다. 또, 완벽한 산책자가 되기 위해서 그에 맞는 심장과 다리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주로 예술가를 지칭하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비유일 뿐이다. 다각도로 산책자를 정의하는 후아르트. 보는 것을 탐닉하는 것은 진정한 산책일까? 무엇이든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머무는 것은 산책일까? 도대체 산책은 언제 해야 하는걸까? 산책은 누구와 해야 할까? 왜 해야할까? 무엇을 보고 무엇
[용인신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인물이 화제다. 드라마에서 자폐증을 가진 우영우의 천재성이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통쾌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작품의 인기만큼이나 걱정되는 것이 자폐에 대한 대중의 인지가 왜곡될 수도 있다는 면이다. 우영우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를 읽어보길 권한다. 자폐증은 사람마다 증상이 다르게 나타나지만 비교적 의사소통과 사회 상호작용에 어려움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와 같은 증상을 1942년 9월 8일에 카너라는 의사가 도널드의 부모에게 쓴 편지에서 처음으로 질병으로 기록한다. 카너는 도널드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을 진료한 후 도널드의 증상이 그간의 조현병과 전혀 다른 양상임을 확인하고 새로운 진단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내용을 도널드의 부모에게 편지로 전달하며 ‘자폐’라는 말을 쓴 것인데 이 편지는 무려 65년 후에 존스홉킨스 병원 문서실에서 발견되었다. 자폐의 원인을 다방면으로 찾아보았지만, 지금까지 어느 것 하나 확증한 것은 없다. 자폐아를 자녀로 둔 부모들은 엄청난 무게의 책임감 속에서 지내야 했으며, 자폐아를 자녀로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받았다. 책 내용은 특이한 아이들을 구경거
[용인신문]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을 대표한다는 믿음이 사회를 지배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풍요가 인류의 복지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풍요’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무엇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위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소소하지만 날카로운 시각을 가진 소설이 있으니 바로 『순례주택』이다. 건물주 순례 씨는 “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99쪽)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순례자처럼 살겠다는 생각에 이름을 순례(巡禮)로 개명하고 이를 몸소 실천하며 사는 순례 씨. 힘들게 돈을 벌어 건물주가 되었지만, 그가 마련한 주택은 세입자들에게 몸의 보금자리뿐 아니라 마음의 보금자리가 되어준다.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유는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순례 씨의 집과 마을을 우습게 본다. 그들은 오래전 카프카의 『변신』에서 읽었던 그레고르의 가족과 묘하게 닮았다. 세입자들과 가족 간의 묘한 밀당도 이야기의 재미를 더한다. 오수림과 오미림은 핵심세력을 대표하는 대적점 역할을 한다. 소설은 누가 이기고 지는 스토리가 아니다. 순례주택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모두가 이웃이 되는
[용인신문] 사람들은 대개 복잡한 문제를 싫어한다. 해결 과정이 복잡하고 권력기관이나 이익이 관련된 경우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문제들을 단순화해서 생각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아예 그 문제에 순응하며 살기도 한다. 애초에 문제라고 생각지도 않으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이도 있다. 그래서 좌절하는 이에게 소설 속 인물은 ‘그럼 시스템대로 움직이지 말고 시스템을 뛰어넘어 버리라’(57쪽)고 혹은 ‘위험을 감수하고 실험을 두려워하지 말라’(28쪽)고도 한다. 도덕책에나 나올 법한 말이지만 어떤 이에겐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 시스템, 자동화된 사고에 의해 움직이는 구조. 『레슨 인 캐미스트리』는 그 속에서 ‘나’로 살면서 고독했으나 지독한 사랑을 한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960년대 “일도 하고 아이도 갖는 건 명확히 남자에게만 주어진 기회”(35쪽)라는 통념이 시스템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런 시대에 엘리자베스 조토는 화학자였지만 요리 프로그램의 MC를 맡은 인물이다. 방송 특성상 여성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들을 거부한 인물. 화장이나 몸에 붙는 의상, 심지어 방송을 위해 준비된 소도구까지 방청객에게 다 나눠줘 버리고 자신의 방식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용인신문] 3년을 채워가는 전염병 사태가 다시 우리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침체된 경기, 높아만 가는 물가와 금리. 어느 것 하나 가볍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인지라 마음 밑바닥에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려버리고 안전하게 있고 싶은 욕구가 생기곤 한다. 오래전 마녀들이 생긴 이유가 그러했다. 논리적인 일 처리는 머리도 복잡하고 절차도 복잡했다. 마녀에게 책임을 물으면 사람들의 시선은 두려운 존재로부터 멀어졌다. 결국, 문제해결도 요원해 졌다. 『마녀사냥』은 그러한 사람들의 두려움이 작은 마을에서 어떤 일로 번지는지 보여준다. 에스벤은 마녀사냥에 엄마가 화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도망친 에스벤을 구해준 한스는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나약하다”고 말하지만 어린 에스벤은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한스의 말은 독자에게 하는 말이 아닐까? 한스는 에스벤에게 또 말한다. 힘이 있는 사람은 진리를 발견했다고 믿으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며 그렇게 되면 멈추는 거라고, 그리고 그들이 믿는 진리라는 것을 조심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거듭 부탁한다. “건전한 의심”을 하라고. 몇 가지 숫자들이 뉴스를 어두운 분위기로 만들고 있다. 전염병 확진자가
[용인신문] 크리스퍼(CRISPR)는 세균의 유전체에서 발견되는 염기서열을 뜻하는 말이니 ‘크리스퍼 드래곤 레시피’라는 제목은 유전자를 이용한 용을 만드는 방법 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용을 만들겠다니 이런 이상한 선언이 어디 있을까? 용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흥미롭다. 필자는 용과 신체 특징이 인접한 동물들의 유전체를 탐구한다. 이야기 속의 용은 계략을 쓰니까 머리도 좋아야 한다. 그러니 뇌에 관한 연구는 필수다. 불을 뿜기 위해 화학반응을 연구한다. 무거운 용이 자유롭게 날기 위해서는 생물의 신체 구조를 해박하게 알아야 하며, 항공 분야의 지식도 동원된다. 물론 실험 중에 용이 불을 뿜어서 언제든 목숨을 잃을 각오도 필요하다. 세계 역사에서 용의 등장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신화와 문화를 아우른다. 물론 한국의 용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용이 나와서 아쉬운 감이 있다. 그러나 저자가 미국 사람이고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과학자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흠은 눈감아 줘도 될 법 하다.(책 날개에 저자를 2013년 줄기세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에 선정되었다고 소개한다.) 오래전 토머스 트웨이츠의 <염소가 된 인간>이라는 책이 이그노벨상을 탄 바
[용인신문] 우리가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은 우리에게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불확실하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만약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일까?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멸망을 예언했으나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던 저주받은 예언 능력을 가진 공주였다. 문제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 신화의 카산드라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속에서도 여전히 물과 기름처럼 사람들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있다. 테러가 일어나 사상자가 일어날 것을 예언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겨우 네 사람을 설득했는데 이들은 시립 쓰레기 매립장에서 스스로 “인간폐기물”이라 칭하는 이들이다. 카산드라의 설득으로 테러를 막았으나 이들의 영웅적인 행보는 뉴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주인공조차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자신과 친구들에게 오히려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설에서 카산드라의 능력을 알아본 집시 노인은 “우리는 사람들이 미래를 나갈 수 있게끔 그들에게 청사진을 제시해 주고, 그들을 프로그래밍해 주는 사람들”(390쪽)이니 점술가를 찾은 손님에게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제시해 주라고 말한다. 결국 점성가조차
[용인신문] 9년간의 사이를 두고 김영하의 소설이 나왔다. 소설은 이야기의 힘이나 인간 존재, 인공지능 등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딜레마를 소환하면서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더 깊은 사유로의 여정을 떠난다. 소설의 전반부는 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모호해진 등장인물의 방황이 중심이다. 호기심이든 필요에 의해서든 휴머노이드를 이용하는 지구의 미래는 어둡다. 자의식을 가진 기계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인간과 반목하는 장면은 낯설지 않지만 그들의 논쟁은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라드라고 불리는 철이. 그를 만든 최진수 박사. 이들은 종을 뛰어넘는 관계를 가질 수 있을 듯 보였지만 근본적인 존재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철이가 만난 휴머노이드 달마는 이름처럼 인공지능의 사유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상상하게 만든다. 이 외에도 철이와 민이, 철이와 인공지능 로봇 달마의 관계도 이 소설의 다른 축을 담당한다. 철이와 철이를 만든 최진우 그리고 민이가 보여주는 결말을 통해 작가는 개별성이 갖는 가치와 현재의 아름다움을 말해준다. 올해로 5회째를 맞는 ACM FAccT(ACM Conference on Fairness, Accountability, an
[용인신문] 작가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목적은 신변잡기를 적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글을 써 가면서 이야기의 흐름은 어린이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작가의 직업이 어린이와 관련된 탓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무의식에 어린이라는 존재가 자리잡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완성된 도서는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한껏 반영되었다. 2020년 나온 책이지만 꾸준한 사랑을 받아 리커버 한정판이 나와 다시 읽어본다. 무서워하는 것이 많은 어린이. 저자는 어른의 역할은 무서운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앨리베이터 혼자 타기가 무섭다면 함께 타 주고 혼자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 같은 일 말이다. 어린이날이 다가오면 보호자들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어린이날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 방향을 제시한다. 어린이날은 어린이라는 세대를 발견하고 보호하고 일으켜 세우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TV에서는 어린이에게 맞춘 뉴스가 나오고, 모든 사람이 어린이를 존중한다는 새싹 뱃지를 다는 식으로 어린이를 위한 날로 만들자는 주장도 이어간다. 하나같이 작은 일이지만 일상에서 쉽게 간과하는 배려들이다.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