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바름을 해치는 자는 반드시 다른 이를 사악한 자로 몰고, 자신은 바르다고 자처한다. 나아가 동류를 불러 모아서 숨을 모아 산을 날리고 모깃소리를 모아 우레 소리를 낸다. 이 말은 조선말 문인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의 인정人政 권2 측인문測人門2에 나오는 말이다. 인정이란 제하의 책은 일종의 정치 평론서다. 정치하는 자가 어떻게 사람을 선별해서 등용할 것인가에 대한 서설을 적어 놓은 글인데 사람에 대한 본질을 꿰뚫는 번득이는 통찰은 상당한 내공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예나 지금이나 몹쓸 것들이 자기만 바르다고 설레발 치는 통에 백성들은 늘 숨이 컥컥 막힌다. 물론 사람에게는 누구를 무론하고 자기 편한대로 자신에게 이득이 있는 쪽으로 행동하고 몸을 움직이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지나치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데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이상은 이를 살풍경殺風景이라 했다. 그는 유미파唯美派 시인으로 알려진 인물인데 되도 못 한 것들이 그야말로 깜도 안되는 그런 것들이 닭 볏만도 못한 벼슬 한자리 꿰찼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에 치를 떨었던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의 시詩들이 대체로 조금은 난해한 면이 적지 않다. 그가 잡찬雜纂이라는 책을 내면
[용인신문] 나라에 망조가 들면 희한한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주나라 유왕幽王 때 일이다. 유왕에겐 포사褒姒라는 절세가인이 있었는데 문제는 이 애비愛妃가 입궁 3년 되도록 웃음이 없다는 것이다. 애가 탄 유왕은 포사의 붉은 입술과 새하얀 이빨인 단순호치丹脣皓齒를 보고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궁녀의 실수로 비단 옷자락이 찢어지는 소리가 정청각을 울렸다. 이 소리에 포사가 살짝 미소를 띠자 유왕은 포사의 웃음을 보고자 궁 안에 있는 모든 비단을 끌어와 찢어댔고 저자거리에 있는 비단까지 깡그리 끌어다 찢어댔지만 그걸로 끝이다. 포사는 여전히 웃음이 없다. 어느 날 봉화대 병사의 실수로 잘못 봉화가 올라 주변의 제후들이 전쟁이 난 줄 알고 부랴부랴 달려온 일이 있었는데 포사는 정청각루에서 이 모습을 보고는 가슴을 움켜쥐며 크게 웃는 것이 아닌가. 이 상황을 읽어낸 간신 괵석보虢石父는 유왕에게 봉화 올릴 것을 제의하니 유왕은 포사의 웃음을 볼 욕심에 장난으로 봉화를 올리도록 명한다. 이 일로 포사가 크게 웃었으니 유왕은 괵석보의 공을 치하하며 그에게 상으로 천금을 내렸다. 천금매소千金買笑라는 사자성어가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천금을 주고 웃음을
[용인신문] 두보杜甫가 사천성 동쪽 기주 골변으로 낙배하여 이듬해 쯤인가 벗의 아들인 소혜가 두보가 있는 곳으로 적소된다. 청운만리의 꿈을 안고 등과했거늘 시대를 잘못 만나 유배를 살자니 낙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에 엄살 좀 작작 떨라며 두보가 군불견간소혜君不見簡蘇徯 제하의 격서 일수를 인편으로 보내는데 장부개관사시정丈夫蓋棺事始定으로 시작되는 후단 초두가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쨘하게 한다. “장부는 관 뚜껑을 덮어봐야 모든 일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남자는 죽기 전까지는 끝나도 끝난 게 아니”라는 말로 “장부일생이란 한번 떠난 사람과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멀어진다.”는 거자일소去者日疏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文選雜詩>. 거자일소로 끝나지 않겠다며 몸부림치며 산 인생이 유향이고, 그가 쓴 책이 전국책인데 중국 동주東周 후기인 전국시대戰國時代 240년간의 열두 나라 동주東周, 서주西周, 진秦, 제齊, 초楚, 연燕, 조趙, 위魏, 한韓, 송宋, 위衛, 중산中山 나라의 흥망성쇠를 장장 460장으로 정리해서 전국책이라 이름한 것이 그것이다. 훗날 원元나라 오사도吳師道가 전국책교주戰國策校注를 내면서 전국책의 키워드를 두 마디
[용인신문] 기원전 4세기는 현자들의 전성기다. 그야말로 일국의 군주를 상대로 언어가 주는 포장의 기술을 논하는 말의 향연이 꽃피던 시기다. 그들은 왕의 초청을 받아 지혜의 한수로 담론을 폈으며 그런 현자를 군주들은 왕사王師로 대우했다. 양혜왕과 맹자와의 관계도 그중 하나다. 살아남기 위해선 안할 짓도 못할 짓도 없다던 사내가 양혜왕이었다면 오로지 세 치의 혀 하나만으로 천하를 들었다 놨다하는 사내는 맹자다. 맹자는 공자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거칠 것이 없는 직선<直>의 사내다. 반면에 양혜왕은 일국의 군주답게 나라가 부국강병이 될 수만 있다면 굽은들 무슨 상관이며 꺽어진들 무슨 대수랴 싶은 곡선<枉>의 사내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척점對蹠點은 패도정치냐 왕도정치냐에 달렸다. 당시 위나라 양혜왕은 동쪽으로는 제齊나라 손빈 대장군이 이끄는 마릉馬陵전투에 패해 양혜왕측의 대장 방연은 자살하고, 그의 아들 태자신은 사지가 찢겨죽었으며<東敗於齊長子死焉> 서쪽으로 진나라에 700리 河西·上郡지역 15현을 빼앗겼으며<西喪地於秦七百里> 남쪽으로 초나라와의 양릉襄陵전투에서 패해서 8읍을 빼앗기는 모욕을 당했고<南辱於楚>
[용인신문] ‘고은苦恩’이라는 말이 있다. ‘쓴맛의 은혜’라는 말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의 학자 단옥재段玉裁가 허신의 설문해자를 장장 30권 주석을 마치면서 했다는 말인데 함께 설문해자 주석에 참여했던 제자들이 주석의 완결을 뿌듯해하며 우쭐했던 모양이다. 이에 단옥재가 기자불립企者不立 과자불행跨者不行이라는 노자 도덕경 24장의 경구를 말해준다. “발끝으로 서는 사람은 바르게 서지 못하며, 가랑이를 벌린 채로 걷는 자는 멀리 가지 못한다”는 것이 자구의 해석이지만 속뜻은 조금 다르다. 기자불립은 자신을 높이려 하는 것에 대한 것이고, 계요 과자불행은 자신을 드러냄에 대한 계다. 이를 송사련宋祀連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불서수숙不恕受孰이라는 말로 압축해 준다. 이 말은 상당히 직설적인데 누군가에게라도 용서받지 않는 삶을 살라는 말로,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는 지난한 삶을 살아왔던 아버지로서의 뼈아픈 고백이 담겨있는 경계의 잠箴인셈이다. 사련의 삶은 그야말로 질풍노도다. 역사의 공과를 떠나 그에게는 일정량의 스토리가 있는데 경기5악이라는 송악 감악 심악 북악 관악을 바라보는 거북바위 위에서 안당정승댁 서고모庶姑母의 아들 노총각 송사련은 낮잠을 자다 청룡과 황룡이 품으로
[용인신문] 안지추가 거친 청춘을 보낸데는 9세 때 부모를 여읜 탓<便丁>도 있으리라. 인성교육에는 가초檟楚가 절대적이다. 공부를 게을리하면 개오동나무<檟>로 만든 회초리를 들어 훈계하고 예의가 없으면 가시나무<楚>로 만든 회초리를 들어 가르친다는 말인데 문제는 부모 없이 자란 형이 동생의 인성교육까지 감당하기란 무리였다. 그럼에도 형은 동생을 위해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논어 학이편 1-4문장 증자의 말. “나는 매일 하루에 세 번씩이나 반성한다”는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등의 문장을 귀동냥해서 동생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이들 형제들이 살던 시대는 한가로이 경전구절이나 외워도 되는 넉넉한 세상이 아닌 격변의 시대였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하필왈리何必曰利를 묻고 따지던 전국시대의 맹주로 군림하던 위魏나라 대량大梁의 시대가 아득한 세월로 지난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를 거쳐 수隋나라로 통일되면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야말로 다섯 나라를 거치면서 살아남은 자가 안지추다. 그가 험한 시대를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를 도와주면 거기에는 반드시 콩고물이 떨어진다는 인정을 터득했던 것이다. 형은 이 부분에서 반대를
[용인신문] 삼손이 헌헌장부의 때 다시 올 수 없는 아름다운 시절에는 델릴라에게 빠져 영안이 흐렸으며 눈을 떴을 땐 낙타 턱뼈로 삼천 명을 쳐 죽였으며 그가 눈을 감았을 땐 신전을 무너뜨려 그 안에 모든 사람을 깡그리 죽였다. 그는 행운아다. 눈이 멀어 괴물이 된 자신을 보지 못했으니까. 삼손을 신전에 묶지 않고 그냥 보내 줬더라면 모두가 살지 않았을까. 어둠을 많이 본 사람은 눈이 먼다<마6:22-23>. 삶이란 가끔이지만 살아온 순간들이 나를 정의할 때도 있다. 이 점이 인간이 종교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종교의 가르침은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에서 시작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눅9:18>’는 예수의 돌연한 물음은 삶의 표층이 아닌 깊이다. 그 중심에 실천으로서의 기독교가 있다. 가장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막12:31>.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며<마5:39>,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이다. 이 숨 막히고도 절대 불가능한 명제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용인신문] 기원전 369년 전 일이다. 여러 날을 굶주린 장주가 위나라 문후文侯 감하후監河候를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말하며 당장 먹을 끼니를 구걸했다. 이에 감하후는 그런 일은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문무백관들과 회의를 거친 후 백성들에게 세금을 공표해서 그때 걷어진 세금으로 300금씩이나 주겠다고 한다. 그때가 언제쯤 되냐고 되물으니 “아마도 올해 안에 이뤄지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장주 왈, 내가 감하후를 만나러 오는 길에 수레바퀴에 패여 생긴 웅덩이에 물고기가 있었다고 한다. 물이 점점 말라가자 물고기가 내게 도움을 청한다. “물이 말라 죽어가고 있으니, 물 좀 달라”고 해서 내가 동해에 가서 물을 잔뜩 퍼다가 주겠다 하니 물고기가 절규한다. “나는 당장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 모금의 물만 필요합니다.”라고. 여기서 나온 고사가 학철부어涸轍鮒魚이다. 장자 외물 편에 나오는 말이다. 그로부터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나라 안 국민은 중국 우한발 코로나 19로 인해 그야말로 풍비박산 일로에 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에게 4인 가족 기준 100만 원씩 긴급재난지원금을 주겠다고 한다. 여기에 맞물려 치러진 게 4월 15일 21대 국
[용인신문] 초나라 임금은 어려서 형명학을 익힌 법가 출신 소왕召王인데 법에 밝기가 가차 없었다. 누구든지 법을 어기면 무덤까지 파내서 매질을 해서라도 벌을 준다. 그런 연유로 초나라에서는 감히 누구도 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소왕의 아들 혜공惠公과 며느리 혜미비惠美妃와 사돈댁이 집을 짓는 재료인 목재와 땅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농간이 심했고, 그 이득이 상당했다. 그렇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뭔 배짱으로 토를 달랴마는 그저 속으로 분을 삼키는 게 백성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소왕의 법이 남에게는 가혹하고 철저했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와 사돈댁에 대해서는 마피아 총대로 잰 고무줄 잣대였던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법을 쥔 자들의 문제는 남에게는 가혹한데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래서 법가는 “정치를 하면 안된다.”는 범수의 말이 유효한지도 모른다. 진효공 영거량을 도와 진을 천하제국으로 이끈 위나라 출신 법가 상앙은 사지가 찢겨 죽었고 영거량의 4대손 진나라 시황제를 도와 천하통일을 일궈낸 이사는 저자거리에서 아들과 함께 허리가 잘려 죽는다. 그의 꿈은 갓 쉰나이인 오십 줄에 아들과 손자와 함께 누렁이 개 한 마
[용인신문] 왕이 말하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민유방본民惟邦本>, 먹는 것이 백성의 하늘이다<식위민천食爲民天>.” -중략- “만약에 한 명의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다면如有一民飢死者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이 모두 교서를 위반한 것으로써 죄를 논할 것이다竝以敎旨不從論.” 세종실록 3권 1419년 세종 1년 2월 12일 정해 4번째 기사다. 민유방본民惟邦本 식위민천食爲民天은 서경書經 출전인데 세종의 인용인 셈이다. 나라가 비록 수한풍박<水旱風雹 홍수, 가뭄, 폭풍, 우박>은 아니어도 코로나19로 인한 나라 안 서민의 경제는 그야말로 파탄일로다. 그 와중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당선인들의 책임이 막중하다 하겠다. 국회의원이란 자리는 민의를 대변하는 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간의 국회의원들은 물론 일부이겠지만 어떤 국회의원은 탄핵 대통령 박근혜를 구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눈물로 사죄하는가 하면 어떤 국회의원은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충성(지키겠다며)하겠다며 혈서를 쓰기도 했다. 이를 지켜본 국민들의 시선은 경악, 그 자체다. 국민을 제대로 섬기지 못함을 죄송해야 하고 국민을 위해서 혈서를 써도
[용인신문]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서 공자孔子는 자솔이정子帥以正 숙감부정孰敢不正이라 했다. “내가 먼저 바르게 행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는가”라는 말이다. 이 문장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던 이가 곡성현감을 지낸 김사원金士元이다. 그의 아들이 급汲인데 중용을 지은 공자의 손자 자사와 음이 같다 하여 당시 사대부 사이에서 꽤나 맘고생을 했던 이름이다. 왜냐면 성현의 이름은 후학이 함부로 따라 지으면 안 되는 기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곧 성현의 이름과 같은 음으로 이름을 지었다 가정할 때 그 아이가 자라서 성현처럼 훌륭한 인물이 못 된다면 되려 성현의 이름을 욕보이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감히 성현과 같은 이름을 짓는 무모한 모험을 하는 후학은 없는 것이다. 이를 모르지 않을 그가 아들이 이름을 공자의 손자와 같은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그 나름의 야망 이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자식의 명운을 놓고 가문을 위한 도박을 한 셈이다. 종횡가의 비조라 불리는 귀곡자의 글에 보면 독특한 문장 하나가 나오는데 이대동자성현명二代同字聖賢名이면 지우삼대필현달至于三代必顯達이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자식 대에 이르러<二代> 이름이 성현들과 같다면
[용인신문] 구경팔조九經八條라는 말이 있다. 대학의 팔조목과 중용中庸 20장의 정치를 묻는 애공哀公에게 공자가 제시한 구경九經, 곧 나라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벼리다. 그 벼리란 것이 치국의 요결로 수신修身·존현尊賢·친친親親·경대신敬大臣·체군신體群臣·자서민子庶民·내백공來百工·유원인柔遠人·회제후懷諸侯의 9경으로 대학의 8조목은 표가 되고, 중용의 구경은 리가 되어 표리치보表裏治寶라 불리는 서로 대구對句를 이루는 요결要訣이다. 경전주석사에서 대학 8조목은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大學衍義라는 제하의 글에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풀어놨다. 문제는 치국평천하의 조목을 밝히지 못하고 붓을 놓았다는 것. 이유가 무척이나 겸손했는데 “군주가 된 적이 없어서 신하가 어찌 감히 치국을 논하랴.”였다. 물론 이는 표면상의 이유이고…. 존 칼빈이 성경주석 전권을 토씨 하나도 안 빠트리고 주석을 달았는데 유독 요한계시록 3장까지만 풀고 책을 덮은 일과 유사하다. 존 칼빈은 자존심이 센 인물로 누구의 말도 안 듣고 나만 옳다는 인물인데 그런 그가 “요한계시록 3장 이후는 인간이 함부로 다룰 일이 아니다” 라며 주 달기를 멈췄을 때는 칼빈 만이 아는 감당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