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조 송용탁 매일 억수비가 내렸다 빗물을 받는 작은 두 손 바다를 넘치게 할거야 수면의 눈금이 흔들렸다 홀로 남은 아버지의 고무장화는 치매처럼 깜깜하고 여전히 벗기 힘들었다 발목이 잡힌 것처럼, 바다의 모든 소리가 집으로 향한다 - 쉬, 아버지가 밀물처럼 밀항 중이라니까 나는 맞이 해야 한다 삼가 양손을 대고 싶다 붉은 물 냄새가 마당 가득 자작할 때 연체된 슬픔으로 나의 부채가 구겨진다 누구의 밑을 닦아야 하나 누구의 밑이어야 하나 끔찍하도록 먼바다 질투하기도 하였는데 <송용탁> 용인문학회 회원 2022 작은시집 [섹스를 하다 딴생각을 했어] (리디북스) 2020 제3회 남구만신인문학상 2021 518문학상 신인상 2023 심훈문학상
가을의 각도 정연희 산수책 손에 쥔 적 없는 어머니는 숫자나 도형의 각도는 모르지만 가을의 각도는 달달 외운다 뒤로 젖힌 목 15도와 125도로 굽혀야 하는 허리 따거나 찾을 수 있는 각도에 익숙하다 벌어진 각도를 벗어난 작은 산밤을 금세 한 움큼 찾아낸다 알밤 두세 개 주워 들고 좋아하던 유년의 나만큼 작아진 어머니 동그랗게 키를 말고 푸른빛 설가신 질경이 잎 사이사이를 더듬고 있다 도둑 풀 사이에서도 하나 개미취나물 사이에서도 하나, 가을보다 먼저 노랗게 변해버린 이름 모를 풀숲을 빼놓지 않고 곁을 트며 가신다 벌써, 밤묵 내놓으실 생각에 이마의 주름이 출렁댄다 자식들 얼레던 오래된 기울기와 무량대수로 쏟았던 모정의 숫자에 앞산이 벌겋게 타오르고 어머니는 지금 작아진 엉덩이로 파랗게 질린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정연희 약력 전남 보성 출생 201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귀촌」 당선 201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잔등노을」당선 2017년 경기문화재단 창작기금 2023년 용인문화재단 출간기금 용인문학회 회원, 동서문학상 수상자 모임 회원
유리의 시간 박진형 단단해 보이지만 폐허를 품고 산다 살갗은 빙벽처럼 서서히 녹고 있는데 문제는 속도라던가 고요로 버틴다 무엇이 진짜일까 불안을 감출뿐 내가 나를 잊은 채 한없이 가벼워질 때 환상이 만들어낸다 오늘만은 믿는다 들키지 않는 감촉보다 숨결을 더 믿는 나 내 몸에 잠긴 시간 아슬하게 끌어당겨 나라는 투명한 세계 끊임없이 바꾼다 [프로필] 2016년 계간 시에로 등단. 201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용인문화재단 문화예술공모지원사업 선정(2022),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지원사업 선정(2022). 시조집 『어디까지 희망입니까』.
종이컵 양석 나의 DNA는 나무 조직이 견고한 질긴 침엽수 고향은 북반구 아한대 눈과 바람만이 나의 친구 더위라는 말조차 생경했던 내가 뜨거운 사랑을 품을 줄이야 가벼운 만남 뜨거운 입맞춤 짧은 키스가 끝나면 쉽게 버려질 사랑 [프로필] 2020 계간 『문학·선』 등단 시집 《행복 증후군》 용인문학, 한국작가회의 회원
모자 구혜숙 사람들이 무덤을 이고 갑니다 사라지는 것들 산안개가 흩어집니다 엄마처럼 뒷산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내 젖줄은 강이 되어 바다로 갔습니다 수장 된 그리움은 몇 도나 될까 한겨울 온실같은 체감 순정의 나른함이 밀려옵니다 구혜숙 문학박사 저서: <이시영 시의 서정성과 역사성> 용인문학회 고문
타인의 도시 이원오 그대의 발자국을 새겨줄 흙이 남아 있지 않다 한강의 그 많은 모래는 어디로 갔을까 범람하던 강의 시름이 깊어지면 무심한 모래는 물을 머금어 고층 숲을 만들어 낸다 흙으로 돌아가려면 근 팔십 여년의 대기표를 찢어야 하고 변두리란 이름을 거머쥔 도시의 끝자락 자기 건사할 땅 한 평 없는 유민들 비좁은 땅, 이 도시에 사랑의 간선도로는 어디쯤 내야 할까 당신과의 밀월장소는 어느 곳에 굴설해야 하나 밀집된 곳에는 기댈 영혼이 넘쳐나 비상구는 늘 열릴 준비를 해야 한다 매달 마감 날에 붐비는 환상의 야경은 늘 무심해지는 타인처럼 군다 반지하 자취방에 밤새 불이 켜진다 밤새 다진 흙을 밟기 직전이다 이원오|2014년 계간《시와소금》등단 시집으로『시간의 유배』가 있음. 용인문학회 회장.
거미와 사마귀 김어영 둘 다 상대의 주검을 먹고 살아가는 곤충이다 활 모양의 비닐하우스 대에 비닐은 없다 호박 넝쿨이 친구가 되어준다 거미가 대 사이에 쳐 놓은 그물망 앞으로 위로 뭘 사냥하다 걸려들었을까 오르려고만 하는 사마귀는 거미줄에 점점 빠져든다 신기함에 빠져 곤충 하나의 죽음을 방조했다 거미는 모처럼 걸려든 먹잇감을 보고 있을 것이다 약한 것이 먹히는 자연의 섭리가 이런 것일까 날개는 물론 다리도 움직임이 없다 한낮의 태양은 아는지 모르는지 공평하다며 햇살을 보내고 있다 김어영|2006년 《용인문학》 신인상 수상. 한국방송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시집으로 『청춘이 밟고 간 꽃길』이 있음. 용인문학회 고문.
러브 버그 윤경예 훔칠 수 있다고 아무거나 훔치진 않아요 비행은 날개가 아니라 떨림이 요구되니까요 있잖아요 그릇된 일은 빛이 드는 쪽을 피해 꺾이는 모가지거나 오직 결함으로 발견하는 장소 같은 거 울어야 생기는 것이 웃을 일이라는데 태도로만 남을 장면을 박멸할 필요까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왜 험담은 붙기도 떼어놓기도 좋을 딱 그만큼 눈도 안 생긴 사람한테 항복하듯 달려들까요 살아있다고 믿기 위해 각기 다른 무덤을 파거나 무덤이 되어가는 중인데 말이죠 좋다 말았단 소린 붙어있긴 그만이겠지만 안 봐도 될 얼굴까지 들춰보진 않겠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앞날이 창창한 문이고 틈이니까요 징그럽다 못해 매혹적이기까지 한 저 몸 그릇 곧 도착한다는 기별처럼 들릴 때 당신, 그만 연주해도 되겠습니까 윤경예 2018년 제1회 남구만신인문학상 수상. 여수해양문학상 목포문학상 등 수상. 시집으로『감출 때 가장 빛나는 흰빛처럼』이 있음. 2021년 문학나눔 도서 선정.
구두 수선소 송남순 사거리 도로 가장자리에 고장 난 신호등처럼 매일 불이 환한 곳 입구도 출구도 하나인 수선소 창문이 없어 계절이 미처 찾아오지 못하는 곳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는 사람들 돋보기 아래 한 땀, 한 땀 발자국을 수선하는 노인 젊은 날 오전 한때를 다른 사람의 발자국을 빌려 걸어 보기도 한다 망치 소리가 끝나면 한 사람씩 기울어진 문을 빠져나가고 도시의 발목처럼 단단한 가로수 그들의 뒤를 바람 소리가 쫓는다 2020년 공직 문학상 수상 2022년 경기문화재단 국가문화예술지원 생애 첫 시집 공모 선정 저서: 시집『너에게, 첫』(시인 시작)
달팽이 최지안 내 껍데기는 아직 더 써도 될 듯하여 조금 더 입고 있기로 했다 가벼운 영혼은 어디에 버릴까 궁리하다가 당신 가슴에 슬쩍 던져두고 왔다 상추를 씻다가 본 빈 달팽이 껍데기 그가 아삭하게 파먹었을 푸른 상추 같은 세상 그 또한 무엇엔가 속을 파 먹힌 집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바삭하게 부서질 투명한 집의 내부를 들여다본다 영혼이 들어앉은 텅 빈 집 고요란 이런 것이다 입이 꼬리를 물고 꼬리는 다시 투명해진다 나는 달팽이처럼 투명해진다 제4회 남구만 신인문학상 수상 2022년 아르코 창작기금 선정 저서: 수필집『비로소 나는 누군가의 저녁이 되었다』(아르코 우수도서 나눔 선정) 등
거리 김삼주 정해진 거리는 반칙을 시도한다 밤을 먹어버린 바닷가를 응시한다 너와 만나는 길을 찾아 나섰다 바람이 물어다 주는 비린내를 삼킨다 비릿한 냄새가 내 안에 흐를 때 내가 물이 되어 너에게 간다면...... 잔잔하게 접다 펴는 연습을 하던 파도 태도를 바꾼다 뒤틀린 내장을 쏟아내듯 내동댕이친다 눈물이 거품을 품고 흩어진다 너의 그 거리와 나의 거리는 바람만이 잴 수 있다 남원 출생 2004년 「문학21」 등단 시집<마당에 풀어진 하늘>
노루실 사람들 한정우 무너미고개를 넘는 사람들 무너미고개 너머 노루가 모여 살던 마을 오백 년 나이테를 두른 느티나무 아래 노루 궁뎅이를 닮은 늙은 여인들이 궁뎅이를 맞대고 살고 있다 오백 년 옹이 박힌 손등마다 새순을 띄우며 살고 있다 노루실 사람들은 무너미 하늘을 바라보며 밤바다 흰 노루 꿈을 꾼다 -춘천출생 2019년 남구만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우아한 일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