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김혜자
책상을 가졌습니다 식탁이 늘 내 책상이었는데 올 가을엔 작은 방 창가에 따로 책상을 두었다니까요 칠순엔 꼭 내 책상을 하나 갖겠다고 별렀는데 칠순 지난지도 여러해 이제서야
나도 나를 만나고 싶을 때 그리움이 차오를 땐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어 볼게요
창밖엔 감나무와 모감주나무와 목련나무가 있어 바람부는 날은 제 창문을 두드리기도 하죠 까치와 까마귀가 주인 같지만 이름 모를 철새들도 제법 놀다 가곤 한답니다 시끄러운건 질색인데 이때만은 제 귀도 순해집니다
모감주나무꽃이 필 때는 붕붕거리는 벌들의 날갯짓소리도 들려요 지금은 갈색 꽈리봉지에 싸인 열매가 까맣게 단단해 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어느 불자의 손에 어여삐 감싸쥔 염주로 태어나 닳아질 때까지 기도에 동참하겠지요 주홍빛 커다란 감이 서른개도 넘게 달렸었지요 가을 내 새들은 제 몸 내어준 감을 쪼아 먹으며 사리 몇개씩은 품었을거예요
봄, 잎새가 나기도 전에 저홀로 피는 흰목련이나 수줍게 비밀을 내보이는 감꽃도 그려 보셔요 꽃과 향기가 제 창에 스며들고 푸른 잎새들이 허공에 악보를 그리고 연주하는 모습도요 쏴아아 파도소리 내며 잎새들이 우는 날은 피치 못할 어떤 이별이 있음을 기억할게요
첫눈이 내립니다 가을에게 괜찮다 괜찮다 다독이며 마른나무 가지에 스며듭니다 말 없이 귀 기울여 주시는 당신 어눌해도 시를 쓰고 싶은 까닭입니다 이 책상에서 자꾸 써볼게요 어느 날인가 작은 들꽃같은 시를 당신께 배달할 수 있을런지요
용인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