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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용인신문]
태평양전쟁 희생된 조선인들 죽음… 그 슬픈 넋을 기리다

일본 수필가 ‘구로다 후쿠미’

 

[용인신문]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연합군 함대에 자행한 비행기 자폭 테러 전술. 이를 위해 조직한 특공대가 신풍(神風) 또는 가미카제(カミカゼ)다. 국가가 군인에게 자살을 명령한 이 사건은 개인의 인명을 극단적으로 경시한 최악의 행위였다다. 이때 강제 투입된 비행사 중에는 소수의 조선인도 있었다. 그로부터 80여 년이 흘렀다. 일본인 구로다 후쿠미 씨는 전쟁 희생양이 된 조선인 청년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귀향기원비’를 건립했다. 하지만, 한국 내 일부 진보단체와 광복회 등의 반발로 현재까지 위령탑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용인신문이 창간 31주년을 기념해 귀향기원비 건립을 추진해 온 구로다 후쿠미 씨를 인터뷰했다.

<편집자 주>

 

영화 ‘호타루’ 실제 주인공 탁경현 ‘가미카제’ 출격 죽음
틈틈이 야스쿠니 신사 찾아 관련 자료 찾다 위령탑 숙명
일제에 의해 끌려가 희생된 수많은 조선인 ‘귀향기원비’
한국 땅에 건립위해 ‘동분서주’… 여전히 ‘미완의 숙제’ 

 

#용인 원삼면 ‘법륜사’를 찾다

일본인 여배우이자 수필가인 ‘구로다 후쿠미(黑田福美‧67세)’ 씨. 구구절(중양절)을 맞아 3박 4일간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그녀를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 있는 법륜사(法輪寺‧주지 현암)에서 만났다. 음력 9월 9일에 무자식 조상 혹은 생사 확인이 안 되거나 불쌍하게 객사한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찰 의식을 구구절 또는 중양절이라고 한다.

 

 

지난달 23일 오전, 기자가 법륜사에 도착했을 땐 극락보전에서 구구절 법요식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불자들이 법당 안을 가득 메었지만, 후쿠미 씨의 환한 얼굴은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첫 만남이지만, 2년 전에 ‘귀향기원비’ 기사를 썼던지라 왠지 낯익어 보였다.

 

법요식이 끝나고 점심 공양을 마친 후쿠미 씨와 마주 앉았다. 해마다 구구절에 법륜사를 방문한다는 후쿠미 씨는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3년 만의 방문이라고 했다. 현암 스님으로부터 ‘향심(香心)’이라는 법명까지 받은 후쿠미 씨는 승복을 입고 있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젠 너무 자연스러워서 전생에 한국의 스님이었을 것이란 말까지 듣는다고 했다.

 

오랜만에 한국에 왔더니 한국말이 줄었다고 농을 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따듯한 진심을 느낄수 있었다. 후쿠미 씨는 한국 사회에 팽배했던 반일 감정과 함께 한일 관계가 순탄치 않았던 80년대부터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NHK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한국어 강좌를 들으며, 혼자 한국말을 배우기도 했다. 2002년 한일 공동 월드컵을 계기로 ‘서울의 달인’ 등 여러가지의 책을 내면서 일본 연예계에서 대표적인 ‘한국통’이자 ‘친한파’로 알려졌다. 일찌감치 자타가 공인해온 한류 전도사였다.

 

# 우여곡절 많았던 ‘귀향기원비’ 참배

후쿠미 씨가 매년 법륜사를 찾는 이유는 태평양전쟁에 희생된 조선인 청년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귀향기원비(歸鄕祈願碑)’ 참배를 위해서다.

 

그런데, 처음엔 경남 사천시에 세워졌던 ‘귀향기원비’가 어떻게 이곳 법륜사까지 오게 되었을까? 후쿠미 씨가 자비로 건립한 ‘귀향기원비’는 위령탑 겸 추모비로 3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쿠미 씨는 여배우로 전성기를 누리던 1991년 여름, 일본의 남쪽 섬을 여행하던 중 어느 청년이 꿈속에 나타나 “저는 말이죠. 여기서 죽었답니다. 자위대 조종사였지요.(…) 단 한가지 아쉬운 게 있습니다. 그건 나는 조선 사람인데 일본 사람으로, ‘일본 이름’인 채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라는 말이 너무 생생해서 잊혀지지 않았다. 이후 후쿠미 씨는 직접 답사와 취재를 통해 가고시마현 지란 육군 특공기지에 조선인 특공대 병사들이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꿈속에 나타났던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 조선인 탁경현(卓庚鉉) 씨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그녀의 긴 여정이 시작됐다.

 

후쿠미 씨는 이때부터 바쁜 와중에도 탁경현의 친인척을 수소문했고, 그의 고향인 사천까지 방문했다. 그 과정에서 사천에만도 수많은 전쟁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군인으로 전사한 조선인은 6178명, 군속은 1만 4명으로 총 2만 2182명의 조선인이 일본 ‘군인‧군속’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것이 탁경현을 비롯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귀향기원비’ 건립을 결심한 계기다.

 

후쿠미 씨는 처음 위령탑 건립 예정부지였던 사천 지역에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일화를 소개하는 동안 마음의 상처가 깊었음을 보여줬다. 위령탑 건립 추진과정 내내 한국인들의 다양한 선의가 결국은 돈과 명예, 보수와 진보세력의 정치적 대결로 비화 됐음을 몹시 씁쓸해했다.

 

후쿠미 씨는 2018년 『그래도 나는 포기 하지 않는다』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귀향기원비’ 건립 과정을 기록으로 상세하게 남겼다.

 

# 하루 아침에 갈 곳 잃은 ‘귀향기원비’

후쿠미 씨는 꿈속에서 만났던 청년의 실체를 찾기 위해 바쁜 배우 활동 중에도 틈틈이 야스쿠니 신사를 비롯해 자료를 찾아 나섰다. 탁경현의 친인척을 수소문하면서 한국을 수차례 방문하는 등 이 문제를 자신의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긴 세월, 한국을 오가며 만난 지인들이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업확장을 제안하거나 직간접적으로 금전을 요구하는 등 후쿠미 씨의 순수한 뜻과는 동떨어진 행동에 실망도 많았다. 다행히 뜻있는 일본인 후원자 도움 등에 힘을 얻어 ‘귀향기원비’는 당초 취지대로 만들어졌다.

 

그즈음, 여러 사람의 도움 덕분도 있었지만 당시 사천시장으로부터 위령탑 건립부지와 제막식 행사까지 전폭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귀향기원비’가 설치되고, 제막식을 하기 직전에 전면 백지화 통보를 받았다. 건립 예정지는 원래 녹지 660㎡(약 200평)였으나 사천시장이 1만여㎡(약 3000여 평)에 달하는 사천체육공원 부지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누군가는 18만여㎡(6만평)를 제공하겠다는 제안까지 해오는 등 후쿠미 씨는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제막식 직전 한국의 진보 정치단체와 광복회 등의 강력한 반대와 압력을 못 견딘 사천시장이 일방적으로 전면 백지화 선언을 하고 말았다. 이미 뜻있는 일본인들과 언론들까지 제막식 참석과 취재차 사천에 도착한 상태였다.

 

 

# 용인 법륜사로 옮겨왔지만 수난 여전

2008년, 우여곡절 끝에 추진된 ‘귀향기원비’는 건립과 동시에 철거되었다. 이후 사천 용화사에 보관하다가 2009년 10월 26일 용인시 소재 법륜사로 옮겨와 세워졌다. 하지만 수난은 계속됐다. 2012년 당시 법륜사에 있던 위령탑이 언론 보도로 알려지면서 광복회 등 시민단체들이 또다시 철거를 요구하고 나섰다. 항의집회는 물론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위령비를 땅에 묻으라는 압박을 가했다. 결국, 법륜사 측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굴착기로 해체 작업을 했다. 기원비와 삼족오 석물을 분리해 삼족오 형상만 세워놓고, 비석은 땅속에 눕혀 나무판자로 덮었다. 여론이 잠잠해지자 눕혀 있는 비문을 다시 청소하고, 세웠다가 또다시 눕혀지기를 반복했다. 현재 모습은 눕혀져 있는 상황이다.

 

 

후쿠미 씨는 그의 저서에서 “오키나와 전투 희생자만 약 24만 명이고, 이중 오키나와 출신이 약15만 명, 나머지 8만 명은 외국인”이라며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 중엔 미국 1만 4009명, 영국 82명, 타이완 34명, 북한 82명, 한국 365명”(2016년 6월 현재)이라고 설명했다. 오키나와는 종전 50주년 기념으로 희생자들의 이름(모국어 표기)을 지역별, 국가별로 석비에 새긴 뒤 ‘평화의 초석’이란 평화기념공원을 만들어 추모하고 있다.

 

후쿠미 씨는 “아무 인연도 연고도 없는 머나먼 땅끝의 들녘에서 쓰러지고, 절망 속에서 목숨을 잃어가는 것이 얼마나 쓸쓸했을까. 그 얼마나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했을까를 떠올리면, 저절로 가슴이 아파 왔다”고 말했다.

 

사천시 측이 일본의 민간인이 세운 위령탑을 놓고, 정치(반일감정과 이데올로기)적으로 왈가불가하는 것에 마음 아파 했다. 현재 법륜사에 있는 ‘귀향기원비’의 온전한 복원을 기대하면서 내심 걱정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위령탑 건립은 당초 탁경현을 염두에 두고 시작됐지만, 이후 조선의 수많은 전쟁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확실하다.

 

“태평양전쟁 때/ 한국의 많은 분들이/ 만리타국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분들의 영혼이나마/ 그리워하던 고향 산하로 돌아와/ 편안하게 잠드시기를/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2009년 10월 26일 구로다 후쿠미-

아직도 눕혀져 있어 보이지 않지만, 비문 뒷면에 새겨진 문구다.

 

# 위령비 원래 모습대로 세워질까?

2001년 개봉한 일본 영화 ‘호타루(반딧불이)’의 실제 주인공 탁경현. 하지만 그를 비롯한 수많은 전쟁 희생자들의 영혼이 종전 80년이 다가오고 있지만, 여전히 조국에 안착하지 못하고 있다.

 

탁경현이 부른 조선의 노래는 ‘아리랑’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 하지만 1945년 4~7월까지 4개월 동안 가미카제 희생자는 3800명이 넘는다. 이중 조선인 희생자는 탁경현을 포함한 11명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친일이라는 잣대를 들이민 사회단체의 반발과 사회 분위기 때문에 2023년이 저물어가는 현재까지 위령탑조차 온전히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법륜사 주지 현암 스님은 “내년에는 여건이 되는대로 반드시 위령비를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겠다.”면서 “전쟁 희생양이 된 영혼을 위로하는 것조차 친일 논란으로 몰아가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또 후쿠미 씨는 “내년 구구절에도 법륜사를 방문해 ‘귀향기원비’를 참배하고, 불쌍한 영혼들을 위로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글·사진: 본지 발행인 김종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