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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이름없는 산들 다 이름을 얻고…’

삶의 뿌리를 찾아서 / 향토 ‘산수(山水)꾼’ 이제학씨
용인의 산 구석구석…도랑물의 사연까지

   
 
글·조선일보 배한진 기자

탤런트 시험을 보는 친구를 따라 갔다가 친구는 떨어지고 자신이 합격했다는 연예인도 있다. 처음에 의도 했던 발명품을 개발하다가 엉뚱한 결과로 더 큰 발명품이 나오기도 하고, 길을 잘 못 들어선 탐험가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고대 유적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생의 ‘우연’을 설명하는 사례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연이란 건 곧 필연이다.
친구를 따라 갔다가 탤런트가 됐더라도 타고난 기질이 없으면 불가능한 얘기다. 엉뚱한 결과로 얻어진 발명품이라도 그간의 과정에 엄청난 노력이 들어갔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연히 고대 유적을 만났더라도 고고학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그게 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에 만난 사람 청해당 이제학(57)씨가 그렇다. 그는 용인의 대표적인 향토 ‘산수(山水)꾼’이다. 용인의 이름 없는 산 구석구석에서부터 수 천년을 쉼 없이 흘렀을 시골의 도랑물까지 그의 발자취가 닫지 않은 곳은 드물다. 게다가 어디라고 이름만 대면 그곳에 대한 유래와 전설까지 줄줄이 쏟아져 나오니 그는 참으로 귀하고 또 귀한 사람이다.

# ‘용인 산수이야기’ 탄생
그가 용인의 산수꾼이 된 것은 친구 따라갔다 탤런트가 된 것만큼이나 ‘우연 같은 필연’이었다.
1990년대 초반 어느 날, 그는 누구에겐가 “지세가 좋은 용인의 산 곳곳에 일제가 쇠말뚝을 박아 놓았다”는 말을 들었다. 평소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격, 게다가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던 그는 곧장 쇠말뚝을 찾아 나서기로 맘먹었다.

그런 계획을 당시 용인의 지역신문인 성산신문(용인신문 전신)에 밝히니 “기왕이면 멋진 답사기도 부탁한다”는 원고청탁까지 들어왔다.

지역에 박힌 일제의 쇠말뚝을 찾고 이를 지역 언론에 생생히 알리는 것, 목표는 정해졌다. ‘일제의 민족 정기 단절 현장을 찾다’라는 정도의 타이틀까지 구상을 했다.

광교산(수지구), 형제봉(운학동), 시궁산(이동면), 노고봉(모현면), 오봉산(양지면) 등을 미친 사람처럼 헤맸다. 한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엔 산길을 찾아 들어가기 어려웠으니, 주변의 지세가 눈에 익을 때까지, 여러 번을 반복해서 올라갔다.

그러다 보니 해당 지형에 대해서는 눈 감고 찾을 정도로 익숙해졌지만, 쇠말뚝은 없었다.
“부질없는 짓을 했나 보다” 하고 산행을 접으려 하니, 성산신문에서 “쇠말뚝은 없어도 그간 다닌 지역의 산 이야기를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래서 그간 다닌 산 5곳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그랬더니 “반응이 좋다”며 “다른 산들에 대해서도 계속 연재 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그것이 이제학씨가 용인의 산수와 인연을 맺은 계기다. ‘용인의 산’이라는 주제로 3년간 연재를 했다.

일제의 쇠말뚝을 찾아 보겠다는 발상이 그를 용인의 산수 전문가로 만든 것이다. 친구 따라 나섰다 탤런트가 된 상황이다. 그러나 탤런트 되기가 우연이 아니듯, 그에게도 산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속에는 누구보다도 산에 미치고 산을 사랑할 수 있는 기질이 숨어 있던 것이다.

성산신문 연재를 끝내고 나니 당시 용인에 살던 소설가 박범신씨가 책을 만들어 보라는 권유를 했다. 그래서 1994년 ‘용인 산수이야기’라는 책이 탄생한다. 책이름도 책의 발문도 박범신씨에게서 얻었다.

책에는 산 뿐 아니라 하천, 고개, 약수터 등 그가 3년간 신문 연재를 위해 답사한 용인 구석구석에 대한 얘기가 담겼다. 용인군지(龍仁郡誌)와 문화원 자료, 지도, 도서관 역사 자료, 동네 노인들의 구술기록 등을 통해 지역의 역사와 지형, 전설 등을 총망라한 그 책은 3000권이 만들어졌다. 1000권은 사겠다는 곳에 팔렸고, 2000권은 여기저기 기증이 됐다. 현재 이제학씨는 이 책을 2권만 가지고 있다. 얼마전까지는 3권이었는데, 인천 산악모임에서 한 권을 보내달라고 해서 줬단다. 이젠 희귀본인 셈이다.

# 유래와 전설이 음율을 타고
“용인에 무슨 산이 있다고?”라며 회의를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몇 년 전까지는 그랬다.
나는 아버지의 후배인 이제학씨를 ‘삼촌’이라고 부른다.

2003년 어느 날 나는 “삼촌! 큰 인물이 되려면 명산의 정기를 받아야 한다던 데요. 그래서 지리산이며 팔공산(대구), 유달산(목포), 가야산(합천) 등지에서 큰 인물이 많이 난다잖아요. 용인엔 그런 산이 없으니 저는 큰 인물은 안될 것 같아요.”라고 우스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랬더니 “아냐. 넌 오봉산(양지면) 정기 받은 거야. 처갓집이 원삼이니 문수봉 정기도 있는 것이고. 용인에도 좋은 산 많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뒤 난 한동안 주말이면 그를 따라 다니며 ‘용인에도 좋은 산이 많다’는 말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첩첩 산중 움 패인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이동면 시궁산 능선코스는 지리산 종주의 기분을 느끼게 했고, 모현면 노고봉은 규모는 작지만 그 울창함이 어느 명산에도 빠지지 않았다.

백암면 조비산과 동백지구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성산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 또한 용인에서는 상상도 못하던 것이었다.

“박기남씨라고 정수리 사람인데, 초등학교 때 정수리에서 양지로 산을 넘어 학교를 다녔다는 거야. 그러다 집안이 하도 못살아 무작정 서울로 가서 유리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일본이 패망하면서 공장 사장이던 일본사람이 박기남씨한테 공장을 통째로 주고 본국으로 갔다는 거야. 사람이 하도 성실했기 때문이라지. 그 후에 박씨는 돈을 아주 많이 벌었다는데, 어릴 때 고개를 넘어 학교 다니던 힘든 기억을 잊을 수 없어 그 고개에 길을 내주겠다고 나섰지. 당시엔 보기도 힘든 포크레인을 동네에 보냈다고 하니 당시 동아일보에도 크게 보도가 됐다고 해”

대대리에서 아시아나CC를 거쳐 양지로 통하는 고개, ‘기남이 고개’에 얽힌 유래다. 그와 다니면 이런 식의 유래와 전설이 쉬지 않고 계속 쏟아져 나온다.

# 세상에 딱 3권뿐인 시집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은유, 운율, 감탄, 뭐 이런 것들이 상당부분 자연스럽게 도입된(?) 간단히 말하면 그의 이런 설명들은 다분히 ‘문학적’이다.
산이 좋다/물이 좋다/숲 속에/바위가 보이는/산속에서/만나는 사람이 좋다/용인 산에서/아는 사람을 만나면/반가워서/더욱 좋다

‘산에서’라는 시(詩), 이제학씨가 지은 것이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꿈꾸어 온 문학을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돼서도 수줍게 품고 있다.

얼마 전 ‘우리 것 용인’이라는 시집을 냈는데 딱 3권만 발행했단다. 2권은 친분 있는 사람에게 주고, 한 권은 본인이 소장하고 있다. 세상에서 딱 3권뿐인 시집이다. 청년기이던 1974년에도 친구와 함께 ‘우리들만이’라는 시집을 낸 적이 있는데 이땐 40권을 만들었단다.

그는 “시 쓰는 건 청년시절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단지 내 시를 읽으면 즐거워서 시 쓰기를 계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소탈하고 자유로운 모습이다.

# 퇴직할 나이에 취직(?)
소탈과 자유. 그가 그간 용인에서 살아온 흔적을 보면 그 두 가지 단어가 더욱 와 닿는다.
1950년 용인 출생이다. 용인초등학교 용인중·고등학교를 나와 성균관대학교 화공과(70학번)를 나왔다.

왜 공대를 갔느냐고 물었더니 “초등학교 때부터 고1때까지 축구선수를 했는데, 수학엔 흥미가 있었지만 영어는 운동하느라 단어 외울 시간이 없었다”며 “그래서 공대엘 지망했다”고 말했다. 남들 같으면 거창하게 설명할 것도 그는 아주 해학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축구는 센터포드로 활약을 했지만 작은 키(지금도 160㎝)때문에 중도포기를 했다고 한다.

얽매이길 싫어하는 성격 탓에 그는 “직장생활과는 잘 맞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엘 내려와 20대 후반의 나이에 용인 최초 양식당 ‘갈채 경양식’이란 걸 냈다. 1950년도부터 용인에서 농기계 공장을 운영해 오신 부친 이정용(87)옹의 공장 터 한 켠에 식당을 차린 것이다.

“용인 최초 양식집이었는데, 그 땐 스프만 먹고 돈 내고 가는 사람도 많았어. 한번도 양식을 먹어보지 않았으니 스프가 전부인줄 알았던 것이지. 돈까스, 함박스테이크, 스테이크 등이 메뉴였는데 용인서 제대로 양식 먹을 줄 아는 사람은 태성학교 강창희 선생님 등 몇 분 안됐지. 3군사령부 장교들도 많이 왔는데 사령관도 와서 식사 하기도 했지.”

그렇게 3년간 양식집을 하다 그는 찻집도 해봤고, 아파트관리소장도 했고, 군의원에 출마하기도 했고, 정치인을 보좌하기도 했고, 지금은 광고기획사를 하고 있다.

그는 최근 용인시내 한 웨딩홀 뷔페의 상무로 영입이 됐다. 그는 “남들은 퇴직을 할 무렵에 취직을 한 셈”이라며 “그래서인지 이제야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계획을 물었다.

역시 “돈 같은 건 관심이 없고, 이 세상에 꼭 있어야 할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소탈한 답이 돌아 왔다.
산 이야기로 출발한 인터뷰가 어느새 인생이야기로 흘렀다. 이런 저런 얘기가 오고 갔지만, 그의 빛 바랜 사진첩에 끼워져 있던 자작 시 한편이 그의 모든 것을 대신할 듯 하다.

시 제목은 ‘잘걸리’. ‘막걸리’가 막 거른 술이라면 잘걸리는 잘 거른 술이란다.
어깨늘여 정 안은 초막/누룩 울킨 잘걸리 있다/흰뜬물 세월 담궈/울렁넘친 빛바랜 솔사발/입가 손털이 풍류니라/시큼한 술지개미 냄새/두부 모 싼 신김치 늘어진 콩나물/둥근 술상 물방아 돌고/나직한 노랫가락 흥실켜/니내 넘나드는 느짖한 홀정/주모 슬쩍 감춘 앞가슴/바람끼 핀 눈웃음/헤프긴 해도 진 안주라/벌컥 벌컥 파아/사나이/술이 켄다/주욱/사나이 빈가슴에 술이 찬다.

사진·김호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