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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김이환 관장과 故 박생광 화백의 ‘아름다운 인연’

People| 이영미술관장 김이환
1977년부터 8년 동안 박생광화백 예술 활동 도와
‘명성황후’가 돌아온 날 밤낮으로 보고 또 보고

   
 
돼지 축사를 미술관으로 변신 시킨 것으로 유명한 김이환 이영미술관장.
김 관장은 최근 이영미술관이 택지개발지구에 포함되면서 바로 인근에 미술관 부지를 마련, 새로운 터로 미술관을 옮겨 짓기 위해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김 관장이 운영하던 영재농장을 모태로 태어난 이영미술관은 부인 신영숙 여사와 이름 한자씩을 따서 명명됐다. 이영미술관은 대지 8000여평에 3000여두의 돼지를 기르던 1100여평의 축사 규모를 갖고 있었다.
이영미술관. 우리나라 미술사에 하나의 획을 긋는 공간으로 유명했던 이영미술관은 그 소장 작품으로 인해 더 더욱 진가를 발휘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 관장은 그곳에 민족혼을 그린 대화가 박생광 화백(1904~1985)의 작품을 중심으로 해서, 한국화단의 대표적 서양화가 전혁림, 국내에서보다 파리에서 더 잘 알려진 추상화가 정상화, 오랫동안 뉴욕에서 활동해온 조각가 한용진 등의 작품을 소장 전시 했다.

그러나 정작 김 관장의 진면목은 이 같은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다.
노화가 박생광과 나눴던 두 사람의 아름다운 관계는 세상의 어느 가치보다 높은 곳에 있음을 알게 된다.

#미술관이 된 돼지 농장
스무해 넘게 공직에 있다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제4기획조정관을 마지막으로 공직생활을 마무리한 김이환. 그는 그후 효성그룹 효성개발(주), 원미섬유(주) 사장, 럭키금성그룹 희성관광개발(주)(현LG레저) 사장을 하면서 돼지 농장을 경영했다.

김이환과 돼지의 인연.
1935년 경남 고성에서 돼지해에 태어난 그는 돼지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다. 특히 어머니가 구정물을 거둬다가 돼지를 키워 자신의 학비를 대준 것을 생각하면 돼지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고마운 동물이었다.
“어머니는 자귀1)도 안내고 돼지를 잘 키우셨어요. 새끼도 많이 났구요. 어머니는 돼지 키우는 기술이 좋았어요.”

유년시절부터 돼지에 대한 친근감을 가져온 그는 돼지가 노후에 자신을 편안히 살게 해 줄 짐승이라는 믿음으로 기흥 영덕리에서 돼지 농장을 시작했다.

CEO를 할 때이니 출근 전 이른 아침과 퇴근 후의 늦은 시간을 이용해 돼지를 돌봤다. 당시 그는 CEO 월급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돼지농장을 해서 입지가 굳어진 거죠. 돼지농장을 해서 저의 오늘이 있게 한 박생광 선생을 지원도 할 수 있었고 미술관도 할 수 있던 거에요.”

돼지를 발로 차고 때리는 직원들을 쫓았다. 늘 돼지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돼지가 혹 죽더라도 영재농장에서는 절대 돼지를 잡는 일이 없었다. 그는 돼지를 쓰다듬어주면서 키웠다. 그는 충북의 한 농장서 한 달간 목부생활을 하며 자돈, 임신, 분만, 비육돈사를 모두 돌며 배웠던 지식을 토대로 정성들여 농장을 짓고 경영을 했다.

“돼지는 워낙 깨끗한 동물인데 사람이 돼지를 더럽게 키우는 것이에요. 돼지는 신선한 공기를 좋아해요.”
그는 돼지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베풀며 영재농장을 ‘아름다운 건축물’로 남도록 정성들여 지었고, 결국 잘 지은 돈사가 미술관으로 변신했으니 돼지가 미술과의 인연을 결실로 맺어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환갑에 와세다 유학길 올라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속에서 한 인간과 한 인간이 자아내고 있는 관계의 아름다움이 더욱 존재를 뚜렷하게 한다. 박생광 없이 김이환을 생각할 수 없고 김이환 없이 박생광을 생각할 수 없다.”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아름다움을 찾아서’ 중에서. 삶과 꿈 발간. 2002년 10월)

미술관 인가는 그가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가기 전인 1992년에 받았다.
그러나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미술사와 미술경영을 공부하기 위해 1995년 유학길에 올랐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한 박생광을 연구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도 아랑곳 않고 일본행을 결심했다.

박생광에 대한 집착과 애정은 실로 놀라운 일을 벌이게 한 것이다.
김이환은 와세다대학원 문학연구과 예술학 미술사전공 연수생으로 동양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불교미술사의 세계적 권위자로 알려진 요시무라 교수를 지도교수로 신청했다.

요시무라 교수는 김 관장의 사정을 이해하고 그에게 도움을 줬다. 반백의 그는 학교 근처 반 지하방에서 자취를 하며 박생광을 연구했다. 김이환은 박생광을 제대로 알려면 일본미술은 알아야하고 동양미술은 개관은 할 수 있어야겠기에 석사과정 강의뿐만 아니라 학부 3, 4학년 미술사 강의를 거의 다 청강하기로 했다.

한편으로 미술관 경영을 염두에 두고 게이오대학의 미술관 경영학 과정에 등록을 했다. 그것으로 부족해 야간에는 가쿠슈인(學習院) 대학의 미술관학 과정, 곧 학예원 코스도 신청했다. 빈 틈 없이 빽빽하게 짜여진 시간표에 맞춰 그는 뛰는 게 일이었다. 와세다에서 강의가 끝나면 딱 15분 동안 점심을 해결하고 지하철로 게이오대학으로 달려갔다. 박생광 작고 후,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인 이경성씨의 말에 의해 미술관 씨앗 하나 가슴에 품었을 무렵, 회사일로 자주 드나들던 일본 출장시 이삼년 동안 개인미술관과 기념관을 샅샅이 찾아 다닐 때처럼 유학시절에도 일본의 미술관과 도서관, 역사 유적지까지 모조리 훑었다.

그는 1년 반 동안 혼을 사르며 공부하고 96년 귀국했다.
용인 영덕리 이영미술관은 6년여 동안의 정리 정돈과 개수를 거쳐 2001년 늦가을 개관했다. 그가 미술관 인가를 받은 때로부터 9년, 긴 세월의 준비작업을 거쳐서.
어쩌면 미술관까지는 생각 않았는지 모른다.

그가 박생광을 돌보며 소장했던 작품들을 국립현대미술관에 내놓으려고 할 때 수장고에 잠재워지는 것이 싫어 망설이던 그를 향해 이경성 관장이 했던 말 한마디 “그러지 말고 작은 미술관이라도 하나 꾸려보면 어떠합니까”가 불씨를 당기기 전까지는.

#수유리 가는 길
김이환 인생을 바꿔놓은 내고 박생광과의 인연. 그가 마흔 셋이던 1977년 한창의 나이로 칠순을 넘긴 말년의 박생광 화백을 수유리 그의 집에서 처음 만났다.

미술과의 인연. 김이환은 부산에서 공무원 하던 시절 집 근처 표구사 입구에 놓인 그림들을 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어느날 주인의 권유로 황매산의 매화 작품을 사면서 미술과 제대로 된 첫 인연을 맺었다고 할까.
임지가 서울로 옮겨졌을 때 그는 친구가 하는 인사동 가게를 출입하면서 내고 이야기를 들었다. 진주 사람이고 진주농업학교 선배인 내고의 흑모란이 좋다고 했다.

그 후 몇 년 세월이 지난 1977년 효자동에서 내고의 첫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진 화랑을 찾았다. 전시회가 끝나고 화랑에 들러 흑모란을 사겠다고 했으나 좋은 모란은 다 팔린 뒤라 수유리 가는 길은 그렇게 열리게 됐다.
가난이 인테리어가 된 세평 남짓한 방에서 무르팍과 엉덩이가 늘어진 바지의 허리춤을 배배꼬인 넥타이로 묶은 그 노인은 ‘기리고’있었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노화가에 대한 연민.

그 후 일요일마다 아내와 함께한 수유리길은 빠짐없이 이어졌다. 어느 일요일, 내고가 수줍은 듯 망설이며 말했다.
“김 선생. 내가 인자부터 기리고 싶은 기림이 있소. 후학들이 그 기림을 좀 봐야해. 그랄라믄 전시회도 해야 하고, 날 좀 도와주겠나?”
김이환은 그때부터 1985년 박생광이 세상을 뜰 때까지 8년 동안 예술 활동을 물심으로 지원했다.

“작은 거인 내고 박생광의 존재가 자칫 뒷전에 밀릴 뻔한 것을 역사의 무대 위에 끌어들인 사람이 김이환이다. 그는 박생광을 발견하고 그의 가치를 인정하고부터는 온갖 힘을 기울여 그를 음과 양으로 도와서 많은 그림을 그리게 했고 생활을 도와서 생명을 잇게 했다.”(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김이환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미술사에 위대한 업적으로 남는 박생광 말년의 명작들은 태어나지 못했지 모른다.

“80고령에서 실현시키고 있는 박생광의 예술세계는 그가 걸어온 전 생애의 경험과 지혜와 모험을 건 창조 작업으로 이런 그의 작업속에 새로운 한국화의 탄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한국의 원시회화와 무속도, 종교화 등의 새로운 기법과 정신을 펴내 보여 한국 현대회화에 있어 새로운 미의 전형을 발굴해냈다. 이처럼 한국화의 맥을 찾아 채색화로 이뤄놓은 박생광의 만년 작품은 자칫 잃어버릴 뻔한 우리 회화사의 또 하나의 맥을 이어가는 역사적인 업적이다.”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김이환은 작품전의 기획을 도와 미술 평단의 외곽에 머물던 박생광을 평단의 중앙으로 진입시킨 것은 물론 그가 평생 가보고 싶어 하던 인도나 프랑스 미술 여행의 길을 열어줬다.
아내와 함께 평소 내고를 모시고 다닌 그는 내고가 ‘경주 남산전’을 계획했을 때, 80 노인인 내고를 등에 업고 남산 칠불암을 올랐다. 박생광 작고 직전 김이환은 박생광을 모시고 그가 그렇게도 가고 싶어 하던 대만도 다녀왔다.

박생광은 김이환 내외 덕에 오로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박생광은 김이환의 아내에게 “내가 기리줄게”하며 소품을 그려주곤 했다. 또 김이환에게 늘 그림을 주고 싶어했다. “이거 좋제” “이거 주까”라고. 그러나 김이환은 몇몇 작품을 수줍게 받았을 뿐이다.
1985년 작고 3일전 김이환 내외를 수유리로 부른 박생광은 “고맙네, 오늘이 있기까지. 두 사람한테는 어떤 말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야 좋을 지 모르겄다. 내가 이승에서 빚을 많이 지고 간다. 다 못 갚은 빚은 저승 가서라도 갚을게”라고 했다.

박생광은 1984년 진흥원전의 대대적인 성황후 작품 관리에 대한 전권을 김이환에게 넘기려고 했으나 마음을 번복해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관리 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박생광의 작품 값이 오르자 김이환이가 그림을 많이 챙겨 “떼돈 벌었다”는 가슴 아픈 소리만 했다. 그는 견디기 어려웠지만 참아야했다.
그 전에도 사람들은 김이환을 내고 그림의 거간쯤으로 알았던 거북스런 짐작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내고의 그림은 화랑 거래가 전무하다시피 해 시세랄 것도 없었다.

“나는 내고 작품에 대한 어떠한 권한도 없었고 그저 그가 하자는 일의 뒷배를 봐드리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소임의 전부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내고가 작품 판매까지 만사를 김이환과 의논하니 그런 소문이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고 김이환은 생각했다.

내고가 떠난 뒤 마음 한 구석에 휑한 구멍이 뚫린 김이환은 누구도 모르는 내고의 초상을 혼자 간직하고 은밀히 기꺼워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생전 내고가 준 몇몇 작품을 집안에 두고 보기에 아까왔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박생광실을 마련해보고자 했지만 뜻대로 안됐다. 결국 김이환은 자신이 소장했던 작품과 박생광 사후 사들인 작품을 더해 이영미술관을 열었다.

사후에 수집한 작품 중에서도 대작 명성황후가 김이환에게 들어온 날을 그는 잊지 못한다. 마지막 1984년 진흥원 전시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으나 팔리지 못한 명성황후. 5년만에야 그의 품으로 돌아오자 400호 병풍을 집 마루에 세우고 펼치는데 극락이 따로 있을까 싶었다고 회상 한다. 밤낮없이 보고 또 봤다.

그는 2003년 6월 스페인 바로셀로나 몬타나 거리의 한켠, 피카소 미술관에서 도보로 삼분 정도 거리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 문화센터에서 박생광 특별전을 열었다.

자유자재한 원색의 구사로 화면 가득히 열기가 이글거리는 박생광의 작품과 거기 매료된 미술애호가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그 중심에 명성황후가 있었다.

박생광은 생전에 피카소의 조국 스페인에서 피카소의 ‘케르니카’와 자신의 ‘명성황후’를 견줘보고 싶어 했었다. 김이환은 사후에도 박생광의 꿈을 이뤄주었다.

김이환은 9점을 선보이는 전시회를 준비하며 감개무량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내고의 작품은 개막식 참석자들의 넋을 강렬히 사로잡았다. 천의무봉한 붓끝으로 오방색을 구사해 구현한 찬란한 동양의 세계 앞에 바르셀로나 예술 애호가들이 들떴다. 특히 가우디가 설계한 성 가족 성당에서 조각을 하고 있는 슈비라체는 그 인연으로 방한해 이영미술관을 두 번이나 방문, 내고의 작품을 봤다. 바르셀로나에서 박생광전을 기념하는 새로운 착상의 작품을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김이환은 내고 박생광과의 인연을 엮은 ‘수유리 가는 길’을 책으로 엮었다.
“박생광이라는 화가의 세계가 아리땁게 만개하던 만 십년 쯤을 꽤 지근 거리에서 살필 기회를 가졌던 사람으로 그의 불우한 인생속에 선혈처럼 예술의 결실이 맺히던 정황을 내 기억으로 촘촘히 챙겨 남기고자 했을 뿐입니다. 기록을 하는 동안 몇 번이고 누를 수 없는 감회로 글의 맥을 끊어야 했지요. 그와 만남으로써 다른 회로로 접어든 내 인생에 대한 감상주의적 반추 때문이었습니다. 줄여 한마디로 말한다면 나와 내 아내는 내고와의 만남으로 삶이 바뀌었고 우리는 그 바뀜에 감사합니다.”

화성연구회 이사장이기도 한 김이환. 처음 내고를 만났을 때의 그 나이가 된 김이환은 지금 경기도박물관협의회 상임대표를 맡아 사립 박물관 미술관 진흥에 앞장서면서 동분서주 혼신의 열정을 바치고 있다. 영원히 박생광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