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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아흔 살 시인의 ‘망향의 노래’

People| ‘통일시인’ 이기형(90)
믿기지 않을 정도의 민족애와 창작열정

   
 
# 10년 만의 인터뷰
꼭 10년 만에 그를 다시 인터뷰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가 그의 나이 80세. 그러니 10년 뒤에 그를 다시 인터뷰할 수 있다는 것은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올해로 만 90세를 맞이한 원로시인 이기형. 그를 만나보니 80세 때 보다 더 강렬한 창작열정과 더욱 뜨거워진 민족애가 절로 느껴졌다. 솔직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백발이 성성한 원로 시인의 9번째 시집 <해연이 날아온다>(실천문학사)가 발간되자 문단은 물론 언론에서도 깜짝 놀라 그를 주목했다.

4년 전 시집 <봄은 왜 오지 않는가>를 발간했을 때도 그랬는데. 어쩜 그의 마지막 시집이 될 지도 몰랐을 그 때의 시집보다 더욱 농익은 <해연이 날아온다>에서는 통일에 대한, 민족에 대한 그의 염원이 더욱 뜨겁고 진지하게 느껴진다.

다만 10년 세월속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맞벌이 부부인 교수 아들 때문에 거처를 한적한 용인에서 복잡한 서울로 옮겼다는 것과 법률회사에 다니는 변호사 며느리를 맞아 예쁜 두 손녀딸을 보아 식구가 늘었다는 점이다.

또 남북관계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몇 차례 고향인 북한을 방문했고, 아직도 남북한 작가를 통틀어 최고령 통일시인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진보진영의 큰나무 같은 정신적 지도자로 남게 됐다는 것이다.

요즘엔 많은 시간을 손녀딸들을 돌보는데 할애하면서도 시상이 떠오르면 재빨리 서재로 뛰어가 메모를 한다. 그리고 새벽녘에 조용히 앉아 원고지에 두 손으로 시를 옮겨 쓰는 힘겨운 작업을 한다.

아흔의 고령에도 아직 안경 없이 신문을 보지만, 글을 쓸 때는 손이 떨려 두 손으로 펜을 잡는다. 그래도 다리 거동이 불편한 부인을 대신해서 힘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한다. 항상 신바람이 나는 모습으로…. 그럼에도 마냥 즐거워하시는 원로시인을 보고 있노라면 분명 청년의 힘이 느껴진다. 건강상태만 들어보면 20대 청년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자신만만하시니 10년 전이나 정말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 통일을 염원하는 원로시인
“두류산 깊은 골/ 저 물이 핏물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상수리 잎의 흔들림이/ 못다한 넋의 한풀이 춤인 줄은/ 더욱 몰랐습니다/ 뒷산 두견새 울음은/ 무슨 사연일까요/ 그날 고랑포를 건너/ 가신 임은/ 백발에도 돌아오질 않아/ 이별보다 슬픈 분단/ 그날 이별 아리랑은 열두 굽이였건만/ 오늘 분단 아리랑은 천 굽이런가/ 발 굴러 웁니다// 청사초롱에 불 밝혀라/ 임 맞으러 가자/ 흐응~흥~흥”(<분단 아리랑)전문>

그가 쓰고 있는 시의 주제는 여전히 분단조국이다. 66세에 <망향>이라는 첫 시집으로 등단한 이 시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역사의 산증인으로, 통일을 염원하며 분단조국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문단에서는 좌파 원로 시인이라는 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그래도 그에겐 화려한 시적 장치가 사치에 불과하다. 오로지 시를 쓰는 목적은 ‘분단과 통일’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10년 전보다 분단의 세월이 더욱 길어져 올해로 만 60년이 됐으니 통일에 대한 염원은 더더욱 강해졌으리라.

1980년 광주사태 이후 이기형 시인과 인연을 맺은 문병란 시인은 ‘불꽃같은 시혼으로 쓴 통일 염원시’라는 제목으로 <해연이 날아 온다>의 발문을 썼다.

문 시인은 “그 누구도 이 함경도 출신 노 시인의 부모 자식과의 생이별 60년의 통곡을 외면하지 못하리라. 핏물을 잉크 삼아 쓴 노시인의 유언시(?)에 귀 기울인다면 한반도에서 자행되는 분단이 얼마나 큰 범죄인가를 알 것이며, 그 미래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세상만사가 덧없이 변하고 있지만, 민족통일에 대한 시인의 뜨거운 열정만큼은 전혀 변한 게 없어 보이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 야학에서 반일사상 싹터
1917년 11월 11일(음력 9월 26일) 함경남도 함주군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난 이기형은 생후 13개월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그때 부친의 나이가 21세. 젊은 아버지는 자신의 임종을 앞두고 퉁소를 구슬프게 불었다고 한다. 그나마 60년 전 어머니와 가족들까지 모두 북에 두고 내려온 노 시인이기에 가족사에 대한 애통함과 그리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아흔의 백발 노 시인이 지금도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퉁소라는 시에 담아냈다고 한다.

가정 형편은 어려웠지만, 외삼촌 덕분에 마을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야학을 다니던 12세 때에 반일사상과 독립운동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기형은 이때 반일사상을 담은 내용을 가지고 강연대회에 나가 2등을 하기도 했다. 함흥고보 졸업 후에는 도쿄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서 2년간 문학을 수학했다.

일본까지 가서 어렵게 문학을 공부한 이유는 독립운동을 위해서였고, 귀국 후엔 ‘지하협동단 사건’ ‘학병 거부사건’으로 피검되기도 했으니 젊은 시절부터 일찌감치 역사의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한 셈이다.

한때 함흥시청에서 공무원 생활까지 했던 이기형의 삶을 뒤바꿔 놓은 것은 청년시절 벌어진 두 가지 사건 때문이다. 첫째는 야학을 통해 의식 속에 싹터왔던 반일 사상이었고, 또 하나는 질곡의 현대사에 젊음을 내던지게 만들었던 몽양 여운형 선생과의 만남이다.

# 청년시절 여운형, 한용운, 이광수 만나
그는 카프 작가 한설야의 소개로 독립운동을 하던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난다. 그때가 1938년이니까 이기형의 나이 고작 만 20세에 불과했다.

몽양을 가까이 모시면서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이 고취됐다. 청년 이기형은 그 무렵 3명의 귀인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 인생의 가치관과 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영원한 정신적 스승인 몽양 선생을 비롯해 만해 한용운과 춘원 이광수가 그들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즐거운 회상’이다.

이기형은 당대를 풍미했던 소설가 춘원 이광수를 3일간 만나 이틀간 문학이야기를 했고, 하루는 일제의 내선일체를 따졌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이광수 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고 회고했다. 또 만해 한용운을 만났을 때는 “조선 청년은 조선 역사를 공부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들과의 만남이야말로 청년 이기형의 삶에 귀중한 교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기형은 그들 외에도 마르크스주의로 우리역사를 처음 썼던 문석준과도 각별하게 교유했다. 그는 문석준이 1945년 1월 감옥에서 별세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이기영·임화·박세영 등 카프 출신 문인과 이태준·안회남·지하련 등 훗날의 월북 문인들과도 어울렸다. 요즘말로 치면 좌파 지식인들이지만, 당대엔 최고의 젊은 문인들이다.

# 여운형 서거하자 월북
10년 만의 인터뷰를 통해 달라진 게 있다면 이기형의 숨겨진 이력들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공식 경력에 의하면 1947년 몽양 여운형 선생의 암살 후 1980년까지 33년 동안 “일체의 공적 사회활동을 중지하고 서울 뒷골목에서 칩거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엔 사라진 33년간의 이력 중 6.25전쟁을 전후한 그의 청장년 시절이 구체적으로 확인됐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직후인 10월초부터 이듬해까지는 동신일보와 중외신보에서 사회부와 정치부 기자를 거쳤다. 그리고 1947년 여운형이 암살 당한 후 월북해 ‘민주조선’과 ‘노동자 신문’등에서 사회부 기자 활동을 했었다는 새로운 경력을 털어놨다.

“세월이 이만큼 흘렀는데 이젠 괜찮겠지 뭐! 그리고 해방직후엔 좌우(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아니었어. 애국과 비애국의 대립이었지.”

“따지고 보면 일제시대 때의 매국노들이 우익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서 활동을 했던 것이야. 물론 김구 선생 같은 분은 예외였지”라고 해방 후의 사회적 분위기를 회상했다.

# 전쟁취재 나왔다 빨치산 체류
이기형은 1950년 6.25 전쟁이 나자 후방 취재를 위해 북한에서 농민동맹을 따라 남한의 여수, 곡성 등까지 내려와 취재활동을 벌인다. 그때가 여름이었기 때문에 이기형은 와이셔츠 한 장 입고, 북한의 가족들에게 두 달 정도 있다가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종군기자 역할을 자임했다.

그러던 중 전세가 뒤바뀌자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무려 1년 반 동안 하게 된다.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체포 투옥되면서 지금까지 남한에 체류하게 된 것이다.

분명 비극이었지만, 이기형은 어쩔 수 없는 이산가족 전체의 공통된 비극이라고 위안한다. 이후 분단체제 하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했고, 30여 년 동안 학원 강사 생활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번역, 사설학원 운영 등의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학원을 운영하던 중 지금의 부인 방현주(만83세)씨를 만나 남한에서의 보금자리를 꾸리게 된 것이다.

이기형은 북한에 있었을 때 2편의 시를 썼고, 평론으로 카프작가 이태준론과 월북작가 황건론과 김상호론을 썼다. 물론 원고는 북에 두고 왔다. 이기형은 젊은 시절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서정성이 많았다고 평했다. 지금도 여력이 된다면 김규동과 남정현에 대한 작가론을 쓰고 싶다고 귀뜸한다.

여운형 암살 후 사실상 절필선언을 했던 그가 본격적인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후반부터다. 분단 조국하에서는 글을 쓰지 않겠다던 그의 마음이 변한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 80년대 초 다시 문학을
이기형은 80년대 초 시인 김규동, 작가 남정현 등을 통해 시인 이시영 · 시인 신경림 · 문학평론가 백낙청 등을 만난다. 이때 신경림이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이기형을 알아보고, 두 번에 걸쳐 몽양 여운형 선생의 전기를 써 보라고 권유한다.

“처음엔 망설이다가 막상 써보니 정작 몽양 여운형 선생을 나보다 더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그래서 쓰게 된 것이 여운형 평전(전기)이야. 80년대엔 대학 지하서클에서 교재로도 쓰였다는 얘기를 들었어”

이렇게 당시를 회상한 이기형은 그때가 바로 이 땅의 진보적 민족문학 진영에서 공적활동을 재개한 시점이다. 1989년 7월엔 시집 ‘지리산’ 필화사건으로 발행인이 구속되고 자신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1년, 집행유예 2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노구임을 감안한 처사였으나 이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며 사면됐다.

이후에도 재야 민주화, 통일운동에 적극 참여한 공으로 1999년 ‘4월 혁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금도 민족문학작가회의 등 각종 재야 단체에서 고문을 맡아 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요구하는 등 여전히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재야단체가 주최하는 행사에 참여해 낭독한 행사시(자작시)만도 이미 200여 편이 넘는다고 말한다.

# 평양 ‘6·15민족작가대회’ 참가
아흔 살을 목전에 두었을 무렵 시인에게는 또 다시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2005년 여름 평양에서 열린 ‘6·15민족작가대회’다. 남북한 참가 문인 중 최고령이기도 했지만, 무려 1세기를 관통한 민족문학의 산증인인 이기형에게는 의미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백두산에 올라서서 쏟아지는 눈물을 어찌 막을 수 있었으랴.

언론을 통해 알려졌듯이 이기형과는 반대로 남한에 가족을 두고 월북했던 오재영 시인과 손을 맞잡고 백두산 정상에서 울먹이던 모습은 아직도 국민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분단 60년!/ 어머니도 아내도 자식도 못 만났다/ 네가 진정 시인일진대/ 어찌 통곡하지 않겠느냐/ 천지에서 치올라오는 맵찬 바람 속에서/ 북쪽 계관시인 오영재를 만나/ 뜨겁게 손을 맞잡았다/ 그는 나와 처지가 반대다/ 그는 어머니를 남쪽에 두고 북상했고/ 나는 어머니를 북쪽에 두고 남하했다/ 내 설명을 듣고/ 그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백두 성산에 올라>부분)

그의 시는 다르다. 관념이나 언어의 유희는 찾아볼 수 없는 간절한 소망이 숨어있다. 한 세기 가까이 살아온 연륜임에도, 그는 아직도 치열하게 몸짓으로 시를 쓰고 있다.

문병란 시인은 “식민시대에 태어나 간난신고(艱難辛苦)의 분단시대를 살아온 노시인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자못 비장스럽다”고 말했다.

시인 김명수는 “뜨거운 감개로 민족 모순을 설파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노시인의 음역은 유약한 오늘의 시단을 압도하며 제국주의의 중심부로 힘차게 메아리쳐 간다. 구순의 당당한 현역 시인! 우리 시단의 자랑이 이기형 시인이다!”고 평했다.

홍일선 시인도 “선생의 시에는 만고풍상의 길을 헤쳐온 고단한 발자국들로 역력하다. 상처받은 역사야말로 시인들에게는 지극한 우둥불이라고 강변하는 구십 노구의 시인 앞에 무릎 꿇어야 할 때 많았다”고 고백한다.

# “난 아직도 20대 열정이야”
여기에 화답이라도 하듯 구순의 당당한 시인은 인터뷰 중에 “내 시는 손끝이나 재주나 입술로 쓴 시는 하나도 없어. 전부 몸으로 쓰는 것이야. 그리고 난 아직도 20대 시절의 열정이 남아 있어”라고 말한다.

그는 인터뷰 내내 폭발적인 에너지를 분출하면서 자신의 작품세계와 분단조국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인이 죽고, 언론이 죽은 이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문인들에게 쩌렁쩌렁 목소리로 엄숙하게 주문을 한다.

“우리 젊은 시인들에게 권고한다. 그 알량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시를 쓰지 말고 만해의 「님의 침묵」, 소월의 「초혼」,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임화의 「현해탄」과 같은 자주통일 지향적 리얼리즘시를 쓰라고 말이야.”

그는 또 “이 시집이 마지막 시집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너무 욕심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시집 한권 분량이 넘는 작품이 준비돼 있다니 10번째 시집은 무난할 것 같다.
아흔이라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근력 같으면 10년 후 100세가 된다 해도 인터뷰가 가능하리라. 부디 10년 후 통일조국에서 또 다시 민족문학의 산증인으로 세 번째 인터뷰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이기형
1917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났다. 함흥고보를 졸업하고 도쿄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47년 정신적 지도자로 모셔온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이후 33년간 일체의 공적인 사회생활을 중단하고 칩거 생활을 하다가, 1980년 시인 신경림, 문학평론가 백낙청, 시인 이시영 등을 만나 분단 조국하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던 생각을 바꿔 시작 활동을 결심하였다. 1980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재야 민주화 통일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89년 시집 『지리산』필화사건으로 발행인은 구속되고, 자신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대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시집으로『망향』,『설제』,『지리산』,『꽃섬』,『삼천리통일공화국』,『별꿈』,『산하단심』,『봄은 왜 오지 않는가』등이 있고, 전기 『몽양 여운형』, 『도산 안창호』, 기행서『시인의 고향』, 통일명시 100선 감상 『그날의 아름다운 만남』등을 펴냈다.

사진/김호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