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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격동의 세월에 핀 ‘목화사랑’

21세기의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개척한 카라반 ‘김윤식’
Ceo & Company | (주)신동에너콤 김윤식 사장

   
 
# 철의 장막을 뚫고 만난 우즈벡
1990년, 구 소련연방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선언하면서 극도의 혼란상태가 이어졌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은 결국 소연방에 가려진 철의 장막을 거뒀지만, 그 과정은 무정부 상태를 방불케했다.

속칭 러시아 마피아라 불리는 주먹들은 공산당 간부들과 KGB, 신흥재벌들의 노골적인 옹호를 받으며 사회의 주류층으로 자리 잡을 정도였다. 구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면서 러시아 초대 대통령으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던 고르바초프 정권도 어쩔 수 없었다. 서방에서 온 기업인들이 한 달에 무려 200여 명이나 러시아 마피아들에게 피살됐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였으니, 구 소련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런데 1991년 1월, 소연방이 해체되기 직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선언만 믿고 모스코바 행 비행기를 탔던 한국의 40대 중반 중소기업 대표가 있었다. 그가 바로 경기도 용인(을) 선거구에서 제16대 국회의원을 지낸바 있는 신동에너콤의 김윤식(60)사장이다. 지금 생각하면 목숨을 건 무모한 행동이었다.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수도가 타쉬켄트이고, 이곳이 바로 중앙아시아 면화 생산의 집산지라는 것조차 몰랐던 김윤식 사장.

그는 “1937년 스탈린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서 강제로 이송된 한민족이 무려 25만 명이나 살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었고, 1963년엔 대지진으로 인해 약 30만 명이 죽었다는 사실도 몰랐었다”고 말한다. 오로지 질 좋은 목화를 수입하겠다는 의욕만 앞섰던 것이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 쓴 모스크바행은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그는 바이칼 호수처럼 푸르고 영롱한 인생역정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그가 처음 도착한 모스크바 세레메티에보2 국제공항, 상상했던 것과는 모두 달랐다. 사회주의의 탁월한 문화와 예술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중무장한 국경 경비대의 검색만이 그를 반겼다. 그리고 교통과 통신망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공항에 나오기로 했던 S그룹 상사 주재원인 안내인도 만나지 못했다. 그는 간신히 렌트카를 타고 예약된 호텔 방을 찾아갔지만, 그곳에 상주하는 마피아에게 웃돈을 주고 방을 얻어야만 했다. 그렇게 낯선 모스크바의 첫날 밤을 맞이했다.

# 실크로드 심장부에서 문익점 되다.
김윤식 사장은 천신만고 끝에 한국의 대기업 관계자를 만났고, 목화 집산지인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타쉬켄트를 찾아가게 된다.

유목민의 실크로드 심장부이면서 8000미터 급 파미르 고원과 대사막이 펼쳐지는 신비의 고장 중앙아시아. 최근엔 한국의 골퍼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을 만큼 개혁과 개방이 급진전된 곳이다. 그러나 우즈벡과 카자흐, 키르키스, 타지크, 투르크멘 등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가끔 축구 때문에 몇몇 공화국의 이름을 듣게 될뿐 일반인들에게는 아직까지도 낯설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지혜로 척박한 자연과 투쟁해 일궈 논 문명의 산물. 비단, 금, 은, 종이, 소금, 보석, 도자기 등을 모래사막 폭풍과 고지대의 희박한 공기를 뚫고 낙타에 실어 운반하던 곳,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실크로드다. 물론 실크로드는 비단길의 풍요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크로드는 죽음을 각오해야만 만들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이기도 하다.

타쉬켄트에 도착한 그는 어렵사리 면화부 관리들을 만나 인간적인 관계를 쌓아 나갔다. 천우신조랄까. 그는 우즈벡 면화부와 목화 5000톤을 수입한다는 첫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더군다나 목화 대금은 현찰이 아닌 한국산 신제품 20인치 컬러 TV와의 바터무역이 전제 조건이었다.

이때부터 신동에너콤은 한국산 20인치 컬러TV를 싼값에 사서 수출을 겸하게 된다. 관세 혜택 등을 따지면 꿩 먹고 알 먹는 셈이었다. 당시 세계 시장에서는 목화가 파운드당 60센트에 거래됐고, 미국의 작황이 좋지 않아 가격 상승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결과적으로 신동에너콤은 바타무역으로 목화를 10센트 이상 싼값에 매입할 수 있었다. 한국 업체에도 목화를 싸게 공급할 수 있어 좋았고, 신동에너콤이나 우즈벡 정부 또한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여기에 과다경쟁으로 재고가 쌓이고 가격이 급락해 골머리를 앓고 있던 TV회사들까지 수출의 문이 열렸으니 1석 4조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목화 수입국은 미국에서 우즈벡으로 바뀌었고, 이를 주도한 김윤식 사장은 21세기의 ‘문익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엔 우즈벡 현지에 TV조립공장까지 설립했다. 또 목화 수입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목화를 묶는 스틸밴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스틸밴드는 연간 2만6000톤이 소비됐고, 톤당 가격이 1500달러였으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거대시장이었다.

김윤식 사장은 한국의 금속업체를 수소문해 기존의 독일 업체보다 스틸밴드를 훨씬 싼 값에 제작 공급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한국의 생산 공장에서 톤당 1100달러에 들여와서 우즈벡에 톤당 1300달러에 납품했다. 독일 업체보다 무려 200달러가 쌌지만, 품질 또한 훨씬 좋았기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때부터 우즈벡의 면화부 관리들은 김윤식 사장을 전격적으로 신뢰하게 됐다. 신동에너콤은 처음에 무역업과 함께 산업용 모터 에너지 절약기를 생산하는 업체였다.

그러나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즈벡 시장을 개척해 TV공장과 스포츠니트 공장까지 설립했다. 뿐만 아니라 우즈벡의 상수도 교체공사에 참여하는 등 전도유망(前途有望)한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 정작 무서운 적은 한국기업이다
신동에너콤이 우즈벡에 세운 스포츠 니트 공장은 처음엔 적자운영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고가지만 품질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먼저 찾기 시작했다. 결국엔 모든 생산라인을 다 가동해도 없어서 못 팔정도였다. 김윤식 사장의 뚝심과 예견이 적중했던 것이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지난 10년을 되돌아볼 때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잔인한 러시아 마피아들도, 동족인 고려인의 배신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진출했던 대기업의 횡포가 문제였다. 물론 지금은 해체된 기업이지만 무려 8년간이나 집요하게 중소기업 신동에너콤을 짓밟았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독립국가연합(CIS) 전역에 퍼져있던 마피아는 김윤식 사장의 숙소에 폭탄까지 터뜨리며 위협했다. 신동에너콤의 영업 이익 중 무려 20%를 세금으로 요구했던 것이다. 김윤식 사장은 또 우즈벡 현지인이면서 한국말을 잘하는 고려인 두 명을 사업파트너로 고용했다. 그들을 의형제처럼 철석같이 믿었고, 사업 인감까지 맡기고 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이 회사 전체를 KGB출신의 마피아에게 팔아먹는 배신을 했던 것이다. 결국 몇 년씩 고생해서 그들을 잡았지만, 이미 사업체에 남아있던 재고품과 현금은 한 푼도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막판에 중범죄를 저지른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으니, 예사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아직까지도 가슴 한쪽엔 큰 상처를 남겨두고 있다. 다름 아닌 D그룹의 횡포였다. 그의 자서전 ‘사랑보다 먼 길’을 보면 당시의 고통을 자세하게 술회하고 있다. D그룹은 자동차 공장 유치를 미끼로 우즈벡 정부는 물론 먼저 진출한 신동에너콤을 압박해왔다. 스틸밴드를 톤당 1100달러에 덤핑판매 하는가 하면, 철도 노선을 독점하면서까지 신동에너콤을 압박했고, 결국 국가적인 망신까지 자초했다. 그리고 IMF라는 빙하기를 거치면서 거대공룡 D그룹은 해체라는 죽음을 맞이했다.

# Force Majeur-위기는 기회였다.
김윤식 사장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즈벡 정부가 갑자기 ‘포스메이져(Force Majeur)를 발동했던 것이다. 포스메이져란 불가항력적인 사태로 인해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는 일종의 국가 부도사태를 의미한다.

“우즈벡에서 사업가가 겪어야 할 난관은 다 겪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즈벡 정부가 느닷없이 포스메이져를 발동했던 것이다. 나는 이미 목화 계약 대금의 50%인 1000만 달러를 우즈벡에 예치한 상태였다. 또 우즈벡 정부의 신용을 얻어 바터무역외에도 현금거래를 병행했었다. 그런데 목화 흉작으로 가격이 폭등하자 이 같은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목화 수입업자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 없었다.”

역사상 목화사업의 최대 위기는 미국의 남북전쟁 때였다. 전쟁 때문에 목화 공급을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1983년 포스메이져 사태를 경험했던 김윤식 사장은 사태의 파장을 알고 있었기에 딜레마에 빠졌다. 지금도 큰돈이지만, 그때1000만 달러면 천문학적인 단위다. 오죽했으면 1983년 일본의 세계적인 재벌그룹인 이또쥬 상사가 포스메이져 때문에 면화사업부의 문을 닫았단 말인가. 공교롭게도 이또쥬 상사가 입은 피해액은 신동에너콤의 피해액 1000만 달러와 같았다. 환율은 틀리겠지만, 1000만 달러면 대기업도 휘청거릴 수 있는 거액이었다.
그럼에도 김윤식 사장은 자신을 통해 이미 계약금을 지불했던 한국의 중소 방직업체들을 생각했다. 천문학적인 돈 액수도 문제였지만, 그들과의 신용 때문에 괴로웠다.

“포스메이져 때문에 1000만 달러의 계약금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국제소송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그러나 나는 국제소송을 포기했다. 예치금 1000만 달러를 포기한 것이다. 나는 한국업체와의 신용을 지켰고,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우즈벡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1000만 달러를 휴지처럼 버려야 하는 아픔은 매우 컸지만, 우즈벡에서 그만큼 벌었으니 우즈벡이 어려울 때 투자했다고 생각돼 마음이 편했다고 회고한다.

결국 우즈벡 목화를 기존 가격보다 배 이상에 사다가 한국의 업체들에게 정상적으로 공급을 했던 것이다.
만약 그때 신동에너콤을 못살게 굴던 한국의 D그룹이 포스메이져를 당했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궁금해진다. 아마 다른 나라의 목화 수입업자들과 마찬가지로 소송을 했을 것이고, 결국엔 국내 계약업체들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포스메이져라는 잔인한 사막 폭풍이 지나간 후 김윤식 사장은 우즈벡 카리모프 대통령과 오히려 막역한 사이가 됐다. 카리모프 대통령이 그를 패밀리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우즈벡 면화부 관리들도 그에게는 미안해하면서도 더욱 신뢰를 보냈다.

그래서인지 신동에너콤은 현재까지 우즈벡에서 적잖은 사업망을 펼치고 있다. 이젠 목화사업 외에도 제조업, 건설업, 부동산과 레저에 이르기까지 각종 사업을 진행 중이다. 아울러 반도체 등의 원자제로 쓰이는 규사(실리콘)를 우즈벡 정부와 독점 계약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 자원대국 우즈벡 새로운 실크로드로 급부상
올해로 14년째 한·우즈벡 친선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윤식 사장. 이젠 정계를 떠났지만, 아직도 민간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김윤식 사장은 “1991년 9월 우즈베키스탄은 독립이후 한국을 제1의 경제협력파트너 국가로 정하고, 한국의 투자유치와 기술협력을 증진시켜왔다”면서 “그 결과 현재 대 우즈벡 투자진출은 한국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카리모프 대통령은 물론 국민들도 한국을 좋아하고 동경한다”고 전했다.

그는 또 “현재 우즈벡 인구의 약 1%에 해당하는 25만명의 고려인이 우즈벡에 살고 있다. 고려인들은 머리가 좋아 어딜 가도 부책임자급의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중앙아시아 허브국가이면서 쾌적한 4계절 기후와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우즈벡은 세계 5대 면화 생산국이며, 세계 6대 천연가스 보유국이기도 하다. 최근엔 아랄해의 유전개발에 한국이 주요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카리모프 대통령은 우즈벡에서 신규 발굴된 구리와 아연 광산 개발권을 한국에 제공하겠다고 밝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우즈벡은 한류 열풍이 가득하다. 국영 TV에서 겨울연가를 4번이나 앙코르 방송했고, 대장금이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우즈벡 국민들은 겨울연가 주연배우 배용준과 최지우가 우즈벡을 방문해주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 같은 한류 열풍은 초등학교부터 한글을 배우게 만들었고, 한국어 배우기 열풍까지 일으켰다.

우즈벡은 비록 개방이 늦었지만, 최근 사유화를 선언한 이후 경제 여건이 좋아지고 있다. 능력범위 내에서 사업 확장도 가능하다. 신동에너콤의 경우 이미 오래전부터 우즈벡 경찰 절반이상에게 고급 메리야스를 공급하고 있다. 다른 제품에 비해서 값은 비싸지만, 품질이 좋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신동에너콤이 우즈벡에 진출한 시간은 우즈벡의 독립역사보다 더 길다. 그리고 그 나라에는 우리와 한민족인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그래서 우즈벡은 멀지만 가까운 나라일수밖에 없다.

# 국회의원에서 사업가로의 다양한 변신
기자가 김윤식 사장을 처음 만났던 것은 2000년도였다. 그는 정계진출을 위해 4·13총선에 출마했고, 당선됐다. 1995년부터 용인시 기흥단지에 살고 있었지만, 세계무대를 뛰고 있던 그를 지역주민들은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국회의원 김윤식’과 첫 만남을 가졌던 용인시민들은 아직도 그를 성실하고 진실한 국회의원으로 기억하고 있다.

기자도 처음엔 그가 국회의원 출마에 즈음해 발간했던 자서전 ‘사랑보다 먼길’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감동이 있을 리 없었다. 단순한 정치적 수사라는 색안경도 한몫을 했으니까.
그런데 수년이 흐른 후 정치인 김윤식이 아닌 자연인(기업인) 김윤식을 만났다. 드라마틱한 그의 인생역정이 상상 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여의도 중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느낀 점은 “또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는 순례자”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는 2000년부터 2004년까지 국회의원으로서 기업경험을 바탕으로 한 경제전문가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용인지역의 교통난 해결과 국가 전체를 위한 일까지 초선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중책을 거듭 소화해냈다.
마지막으로 용인발전 구상이 있냐고 묻자 교육관련 플랜을 줄줄이 쏟아낸다.

“용인을 생각하면 항상 빚진 마음이 가득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갚겠다.”
그는 현장 정치인의 길에서는 비껴있지만, 지금도 국가를 위한 민간외교관으로서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항상 도전적이면서도 건강한 기업정신을 보여주는 그의 모습은 이제 한국중소기업의 신화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정치사를 주로 다루는 MBC 라디오 드라마 ‘격동 50년’은 이례적으로 ‘중소기업 하청에서 선도기업으로’라는 제목으로 김윤식 사장을 집중 조명한 바 있다. 논픽션으로 무려 15회에 걸쳐 그가 닦아 놓은 실크로드가 ‘고난의 길’이었음을 보여줬다. 신동에너콤은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을 거슬러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사막에 나무를 심는 마음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6.25 때문에 부모님 고향인 공주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녔던 소년 김윤식. 어렸을 때부터 유독 영어를 좋아했던 그는 그때부터 세계를 자신의 활동무대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후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삼성그룹 공채 6기로 입사했지만, ROTC 장교를 제대한 후 삼성을 떠나 독자적인 기업경영을 준비했다. 20대 중반이 넘어 무역회사에 입사한 청년 김윤식은 1978년 신동무역을 창업, 목화를 수입해 방직회사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초기엔 미국에서 수입했지만, 수입선을 다변화시키다가 미국의 곡물회사들도 철수를 시작한 구 소련연방에 ‘할 수 있다’는 용기하나 짊어지고 뛰어들었다. 면화야말로 국가 경제의 초기 동력사업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방직사업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12년 전 용인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줄곧 서울에만 살았던 기업인 김윤식. 그는 전 세계를 떠돌며 한국인의 정신을 심고 돌아다녔다. 결코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그는 또 20여년 넘게 우리나라 전역에 나무를 심었다. 항상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사막을 가르며 실크로드를 개척해온 카라반 김윤식. 그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