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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고즈넉한 산사에서 낮아짐의 진리를

Cover Story | 용인시사암연합회장 성효스님
“사찰은 문화산업시대의 가장 우수한 자원”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출가 결심하게 돼

   
 
“낮아져야죠.”
1300년의 전통을 간직한 용덕사 주지로 있는 성효 스님(용인시사암연합회장)이 던진 첫 마디는 낮아짐이었다.
낮아짐!
낮아진다는 것은 탐욕과 오만으로 병들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화두다.

# 고즈넉한 산사의 주인
용인 이동면 성륜산에 위치한 용덕사.
산 아래를 굽어보면 탁 트인 시야 속으로 푸른 하늘과 겹겹의 산들이 구름처럼 흘러가고 일순간 모든 번뇌 망상이 사라진다.
성효 스님은 고즈넉한 산사에서 세상 아래를 내려다 본다.
높은 경지에 있기에 더욱 낮아질 수 있는 세상의 진리.
성효 스님은 늘 낮은 곳으로 임한다.
성큼 속세로 내려와 활발한 사회 활동과 불교의 진리전파를 통해 세상을 상생과 조화의 터전으로 바꿔 나가고 있다. 1998년 이곳 용덕사 주지로 취임한 그는 중앙 조계종단의 일은 물론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다양한 활동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용인사암연합회장을 비롯 용인경찰서 인권위원, 경기경찰청 경승위원으로 포교활동을 통해 불교의 위상을 정립하는 것은 물론 재소자 교화 등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아픔을 덜어준다.
“이동면에 공간을 마련하고 여성 재소자의 아이들을 돌봐오고 있어요. 아이들이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해외로 나가지 않도록 돕는거죠. 출소해 당장 갈 곳이 없는 여성 재소자들도 이곳에 와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게 해요. 심성이 바뀌지요. 순화가 되는 거에요. 사회 적응도 하구요.”
그는 법무부의 종교위원시절 재소자 교화의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경기대 대학원에서 교정교화 전문화과정을 수료, 교정교화 상담 교사 자격증까지 취득할 정도로 적극적이다.
“아픔 속으로 들어가야 그 속에서 같이 깨어나는 거에요.”
성효 스님, 그는 결코 기쁨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용인대학교 학생들에게도 장학금을 전달해 젊은이들이 꿈과 용기를 잃지 않게 해주는 것은 물론이다.
지역 활동만으로도 분주하지만 그는 조계종 총무원 재정국장과 문화국장,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사무국장 등 주요 요직을 역임한 데 이어 중앙종회 소청심사위원, 조계종 환경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 종회의원 법제분과 간사 등 종단의 주요직을 두루 두루 맡고 있는 종단의 실력가다.

#미래 지향적 플랜이 아쉽다
인터뷰 도중 전화가 부지기수로 걸려온다.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전통사찰의 위기와 관련해 성효 스님의 활동이 분주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현행 문화재법은 300~500m 범위 안에서는 건축행위를 할 수 없는데, 경기도의회에서 이를 200~300m 범위 안으로 줄이는 조례개정 작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사찰의 보존환경, 수행환경이 개발 이익에 여지없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성효 스님은 이런 식으로라면 앞으로 50년 뒤에는 우리나라에 세계인의 발걸음이 끊길 것이라며 걱정한다.
성효 스님의 말대로 매사가 서구화 돼 가고 있는 현실에서 다행히 사찰은 우리 고유의 역사성과 문화성을 지키는 보고이며 문화산업시대의 가장 우수한 자원임에 두말의 여지가 없다.
“행정당국은 물론 의원들조차도 문화보전적, 미래지향적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이런 자세로라면 절대 선진국 형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매사에 과장돼 있다고 지적하는 성효 스님. 먹는 것도 과장되면 비만이 되는 것처럼 당장 눈앞의 유혹에 현혹돼 앞날을 망친다는 것이다.
“외국인들과 가끔 만나지만, 처음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은 뭔 나라가 이러냐, 나라의 색깔, 도시의 색깔조차도 전혀 없다고 말해요. 그런 말을 들을 때 아주 창피해요. 보세요. 전국 어디를 가나 울긋불긋한 간판들이 난립해 있잖아요. 3류 국가에요. 선진국에 가보세요. 정갈하고 단아한 국가의 색깔, 도시의 색깔이 한눈에 들어오잖아요.”
국가의 수준을 가늠하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하는 성효스님. 동양화가이며 시인이기도 한 그의 미적, 예술적 감각은 전통 문화의 보존은 물론 도시의 색깔, 도시 건축 디자인까지 이미 저만치 앞서나가 있는데 이 시대를 이끌어 간다는 리더들의 사고는 마냥 뒷걸음질 치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출가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족의 근현대에 걸쳐오면서 두드러진 사건중의 하나입니다. 그 가운데에 속해 있던 게 출가의 계기가 됐습니다.”
성효 스님은 당시 그렇게 갈망하던 민주화의 의제 속에서 젊은이들이, 시민들이, 국민들이 충격에 놀라고, 많이 아파하고, 또 생명을 잃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을 겪으면서 어린 나이에 성숙해 버려 도무지 삶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문제시 되면서 물음이 생기게 되더군요. 문제를 삼는다는 게 큰 문제였는데 해결 방안이 뭐냐, 내가 할 수 있는 방안이 뭐냐를 찾았죠.”
그는 아픔 속으로 계속 걸어가야 하는지, 스스로의 역할을 위해 또 다른 세계로 힘을 축적해야 하는 지 찾다보니 자신을 완성해 가는 것이 가장 필요로 한 부분이라는 것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불교 학생회에서 활동하면서 불교와 인연을 맺고 있던 그는 마침내 출가를 결심했다.
백양사로 출가했다. 신심이 아주 좋아 경전을 불을 때면서 10분, 20분 만에 반장씩 외울 정도였다. 잠도 안자고 하루에 과일 한 개씩 먹으면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겨울에도 방에 불도 넣지 않은 냉골에서 얇은 여름 이불 하나로 버티며 스스로와 싸우면서 오로지 정진에만 힘썼다.
그런 식으로 지속하다보니 당시 온 몸이 박하를 넣은 것 처럼 화해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새벽이었는데 몸이 화해져버리고 신심이 너무 좋았다.
행자 생활을 마치고 그는 신륵사에서 총무원장을 지낸 정대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득도했으며, 87년 범어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은 후 극락암 선원을 시작으로 목숨을 건 수행의 과정을 통해 5 하안거를 이루고, 피나는 정진으로 마침내 큰 깨달음으로 거듭나게 됐다.

# 미국행
“우리 것만 안다고 이것이 어떤 것이라고 말해선 안 됩니다. 이것과 저것을 대비하는 가운데 이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성효 스님은 95년 국제 포교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마이애미, 미 서부를 거쳐 뉴욕에 소재한 정명사에서 포교 활동을 펼쳤다.
할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탁월한 예술적 감각을 가지고 있는 그는 자신의 시·서·화의 기능만으로도 포교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미국 포교를 하면서 우리 것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가능하도록 변형되는, 버무려진 새로운 종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미국에 가서 선진 마인드가 뭐냐를 봤습니다. 살펴보니 순수성이었습니다. 선진화 될 수 있는 부분을 그들은 가지고 있던 거지요. 물론 선진화의 가치 기준은 따지기 어려워요. 정형화, 획일화, 구획화 돼 자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거든요.”
성효 스님은 맨허튼의 한 백화점을 승복 차림으로 나섰다가 한 외국인이 자신을 중국 무술 배우인줄 알고 사인을 해달라고 했던 에피소드도 한토막 소개한다.

# 용덕사 정착
3년만인 1998년 한국에 돌아와 이곳 용덕사로 왔다.
당시 전각이 없었고 쇄락해 있었다. 그는 토지정비부터 시작해 대대적인 중창불사의 계획을 수립했다.
1999년 일주문과 미륵전 신축을 시작으로 요사채 3동과 100여평 규모의 주차장, 종각, 27평 규모의 대웅전, 삼성각과 수각을 조성하여 가람의 면모를 새롭게 했다.
그는 앞으로도 10채 정도는 더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
“용인에는 대표적인 전통사찰이 3개 있어요. 백련사, 동도사, 그리고 용덕사입니다. 다른 사찰들은 나름대로 애로가 있어 전통사찰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곳은 용덕사 밖에 없다고 봅니다.”
용덕사를 용인의 본보기가 되도록 하겠다는 성효 스님은 내년에는 템플스테이를 할 수 있는 건물을 착공할 계획이다. 물론 용덕사의 모든 불사는 원형 복원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기능성을 고려해서 건축하고 있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문화체험이 가능한 사찰로 태어날 것입니다. 템플스테이는 주 5일제에 따른 시대적 요구임은 물론 특히 국가 이미지를 높여줄 수 있는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효 스님은 현재 스탠포드, 버클리 출신의 외국인 스님들을 강원에서 공부 시키고 있는 중이다. 용덕사의 템플스테이에서 어린이 영어 교실을 운영할 계획인 성효 스님은 여타 다른 나라의 인력들도 활용할 계획으로 있다.
한국불교문화재단의 사무국장을 역임한 그는 국가적 차원의 양질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이미 만들어 놓은 상태로, 문화 경영 마인드의 복합체인 템플스테이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있다.

# 더 낮은 곳으로
“시대적으로 종교보다 돈이 우선인 사회가 됐습니다. 신 위에 돈이 있습니다. 과거처럼 매사 신에 의존하던 시대가 아니라 돈만 있으면 자기 스스로 어떤 문제든 직접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들을 하지요. 돈이 종교인 거에요. 문화가 선도해 가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봐야 합니다.”
서구유럽의 경우 이미 사람들은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있고, 우리나라도 어느 한계점에 도달해 있다는 스님. 어찌 보면 포교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미 일본 같은 곳은 종교가 유치원, 학교를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사회사업적 종교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낮아져야 한다는 스님.
“더 낮아져야죠.”
성효 스님의 고즈넉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가 낮아짐의 진리를 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