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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미술인생 40년 …“이제까진 기초 닦았을 뿐”

정년퇴임 앞두고 전시회‘송번수 40년전’11월 25일까지
광주 영은미술관 섬유-판화-종이부조 작품 140점 소개
Close-up | 마가미술관 관장 송번수

   
 
한 방면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 특히 예술가들을 만날 때는 그의 작품과 삶, 예술세계를 몇 마디 말로 온전하게 담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항상 고민스럽다. 이번에 만난 송번수 씨도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든 예술가다.
마가미술관 송번수 관장은 판화와 섬유예술 두 분야에서, 특히 타피스트리(씨실과 날실로 엮어 짠 섬유예술)에 있어서는 국내에서 손꼽힐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다. 광주 영은미술관에서 ‘송번수 40년전’을 열고 있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송번수 관장은 현재 홍익대학교 섬유미술학과 교수로 수많은 대회에서 상을 받아왔다. 1968년 한국판화가협회 주최 제1회 한국판화전에서 최고상을, 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는 우수상을 받았다. 1972년 제2회 서울 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는 대상을 받았다. 해외 수상도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인가 짐작케 한다. 2001년 헝가리문화유산부가 주최한 헝가리 개국 1000년 기념 국제타피스트리 전시회에서 최고상을 받았고, 중국에서 열린 2002년 국제 타피스트리 비엔날레에서도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수상 이력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의 주요 건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판문점 평화의 집, 서울 시립미술관, LG강남타워, 국립극장, 고속철도 용산역사 등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작가지만 그에게도 어려운 시절은 있었다. 195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경제상황이 좋지 않던 까닭에 아버지의 권유로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은행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환쟁이가 웬 말이냐고 할 정도였죠.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제 친구들은 세무사, 은행원이 많아요. 상업고등학교 출신이 그림을 그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이 길을 선택한 것을 뒤돌아보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진정으로 후회하지는 않았어요. 이 길이 나의 길이라는 생각이었죠.”
결혼 후에는 작업실이 딸린 중국집 2층 5만 원짜리 전세방을 얻어 살았다. 지금은 시집간 딸도 어렵게 살던 그곳에서 낳았다고 했다.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이었어요. 그때 상금이 20만원이었죠. 저는 그 돈이 꼭 필요했고, 그 당시엔 아티스트고 뭐고 하는 생각보다는 상금을 꼭 타야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다행히 상을 받았고, 그 상금으로 이사를 갈 수 있었으니 제 삶에서는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할까요.”
그는 지금의 서울산업대학인 국립경기공업전문대에서 전임으로, 조교수로 일하다가 선생으로 늙는 것만 같아 학교생활을 접고 홀연 파리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에는 홍대에서 자리를 잡았다.
귀국 후 그는 다양한 작품 활동을 선보였다. 지금 전시된 그의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초창기인 1960년대에는 목판화로 시작해 실크스크린 등 판화작품을 1970년대까지 선보이고 있고, 1980년대에는 종이부조 작업과 타피스트리 작품들이 주로 선보인다.

# 한 올 한 올 짜는 정직한 작업, 타피스트리
판화작업이 많던 초기작들을 살펴보면 포탄이 떨어지는 지점을 표현한 ‘화집점’ 시리즈는 강력하고 젊은 시절의 에너지를 발산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고 1970년대에는 ‘판토마임’시리즈로 시간의 흐름과 마모가 가져오는 일상의 소멸을 다뤘다. ‘공습경보전’이라는 작품은 가스마스크를 쓴 사람의 모습을 표현했는데 민주주의와 세계 기아, 질병, 폭력의 문제가 지구에 공습경보가 떨어진 상태에 와있다는 문제의식을 담았다. ‘광화(crazy flower)’는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광기를 집어넣은 꽃이다.
사회와 폭력, 고난 등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은 판화에서 종이부조로, 또 타피스트리로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된다.
한 분야를 대표할 만한 작가의 작품 활동 40년을 기념하는 전시회는 미술에 대해 문외한이더라도 관심을 가져볼 만 하다. 특히 타피스트리는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인 작품활동이 아니라 더 그렇다. 영은미술관 1층 전시장에서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것은 타피스트리에 대한 설명이다. ‘타피스트리는 가장 정직한 작업’이라는 해설이 눈에 띈다.
“타피스트리는 인내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품이죠. 1년에 한 두 점밖에 못해요. 회화는 큰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거나 터치하는 것에 따라 달라지는 우연성이나 개연성이 있지만 타피스트리는 한 올 한 올 짜는 만큼만 만들어지거든요. 그래서 정직한 작업이죠. 위조하거나 튀겨낼 수 없으니까. 작가가 어제 놀았으면 어제 논 만큼 작업이 이뤄지지 않으니까요. 이 기법은 작가가 위조할 수 없는 하루하루의 시간이 축적된 화면이라는 작업의 진실성을 가지고 있고, 일반 회화에서 느낄 수 없는 섬유재가 주는 촉감이 있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어요. 오직 하나의 작품이라는 유일성을 갖죠. 작업에 집중하고 진솔해질 수 있고.”
그가 타피스트리를 시작하게 된 것은 파리 유학시절 국립 타피스트리 미술관을 보고 나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아티스트로 인내를 가지고 해볼 만한 일이라는 생각에 그는 한국에서 80년대 초 작업을 시도했다. 처음엔 단순히 면과 면의 부딪힘을 표현하는 정도였지만 점차 그라데이션과 연기를 표현할 수 있게 됐고, 이제는 불꽃도 가능하다. 실로 짜서 표현이 안 되는 게 없는 경지에 다다랐다.
가로세로 수 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작품들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실의 결이 보인다. 한 올 한 올을 계산하며 짜 내는 작업들은 과학이고 계산이고 인내다. 작품에서 소름끼치는 노력과 열정, 오랜 시간이 배어나온다. 톡톡한 카페트 같은 따뜻한 느낌도 작가의 열정과 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무영탑을 쌓은 신라의 석공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40년을 맞아 보니 이제 나의 기초가 어설프게나마 다져진 게 아닌가 싶어요. 새로운 시작의 초석이랄까요. 그동안 잘 보이지 않아 방황하던 것이 이제 사물의 의미가 보이기 시작하고 있어요. 예술가로서 이제까지 기초과정을 닦았고, 자유로 비상하는 시점이라고 봐야죠. 몇 달 남지 않은 퇴직이 기다려져요.”

# 가시 속에 담은 눈물과 의지
타피스트리라는 분야가 그의 장인정신과 고집을 읽을 수 있는 것이라면 소재 가운데서는 가시가 그를 이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작품들에는 유독 가시가 많은데, 왜일까.
“사실 70년대 초에는 장미를 담은 작품이 많아요. 그 당시에는 꽃의 작가로 불릴 정도였어요. 장미는 민주주의 발상지인 영국의 국화죠. 저는 우리나라가 처한 민주주의 상황을 장미로 표현했어요. 찢기고 꺾이고 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수난사를 표현하고자 한 거죠. 그러다가 파리 미대에 유학해 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꼭 꽃이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줄기가 중심이 되고 또 꽃에서 아름다움을 제외하면 가시가 실체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화면 속에서 가시로 남은 거죠.”
그는 인간이 가시에서 느끼는 이미지가 작품의 주제와 잘 맞아 선택했다고 덧붙였다. 고난, 처절한 폭력 그런 것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느낌이 가시를 볼 때 받는 느낌과도 연계돼 오랫동안 주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또 가시는 불가능의 장막을 뚫고 나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의 가시는 하나의 기법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설정된다. 그는 한 주제를 평생 가져가기보다는 자주 변화하고 주제에서도 주기적인 변화를 갖고 있다. 올해 완성한 작품 ‘너 자신을 알라: 나의 자화상’에서도 그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불에 타고 있는 가시의 모습은 그가 이제 가시를 소재로 하는데 머물지 않고 자신의 모습으로 투영되는 가시를 소각시켜 버리고 새로 태어날 것을 보여준다.
“아티스트로 지내는 것이 쉽지 않죠. 정경화를 보고 바이올린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미술 쪽도 그래요. 정말 사람들이 알아주는 미술가는 손으로 꼽힐 정도죠. 추사 선생이 제자들에게 한 말씀이 있어요. 예술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한 눈팔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후회하지 말라고 했어요. 예술을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아야 한다는 거죠. 나이들 수록 실감해요. 후회하거나 한 눈 팔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거든요. 예술의 길은 노력만으로는 안돼요. 타고난 게 정말 필요하죠. 예술은 90점으로는 안 되거든요. 저를 포함해 모든 아티스트들이 그걸 알아도 노력을 하다가 가는 거고, 조용히 사장되죠.”
예술가로 험난한 길을 걷게 되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자신의 길로 택했으면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해 착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성현말씀 중에 제가 제일 첫 번째로 꼽는 게 ‘너 자신을 알라’에요. 사람들이 그게 안돼서 불행해지고 엉뚱한 걸로 인생을 망치고 허비하는 게 대부분이거든요. 제가 이번에 완성한 작품 제목을 ‘너 자신을 알라; 자화상’이라고 단 것은 여러 가지가 함축돼 있어요. ‘가시’를 우선 일단락 짓는 것이죠. 그간의 가시에 대한 강렬함까지도 태워야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에요.”
관람객들이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보길 바라는가를 묻자 그는 ‘열린’ 해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보는 사람마다 생활 여건이 다르고 살아온 역사가 다르죠. 인간의 심성이 다 다르기 때문에 제 작품을 보고 느낌과 감동이 다를 겁니다. 무엇을 느끼면 좋겠다는 고정된 요구보다 각자의 감성과 개인사에 대입해 느껴주길 바래요. 작품 제목을 보면 제 표현의 대강이 나와있는데 각자 보고 이런 쪽으로 느껴진다고 자유롭게 판단해야죠.”

# 용인에 터를 잡은 인연
그가 용인에 자리 잡은 것은 1986년이다. 파리를 다녀온 후 홍대에 재직하면서 다시 5평짜리 작업실에서 일하게 됐지만 그의 수중에 있는 돈으로 마련할 수 있는 곳은 용인 모현이었다. 땅은 샀지만 건물을 지을 돈은 없었던 그에게 운 좋게도 한국전력에서 사원복지관 강당의 무대막 제작을 요청했다. 그 전에는 무대막은 모두 일본에서 맡아서 해오던 일이었던 터라 무대막을 제작할 공간이 국내엔 없었다. 그는 무대막을 짤 공간으로 12m의 천장고가 있는 집을 지어달라고 했다. 그가 작업을 완성한 1986년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무대막의 탄생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천정이 높은 모현의 작업장이 완성됐다.
작업장은 작품 활동을 하기엔 좋았지만 자신의 다른 작품을 보여주려면 펼치고 거는 일은 하루 일과가 될 만큼 힘들었다. 섬유를 사용하는 그의 작품들은 가로세로가 수 미터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물을 증축하면서 그의 작품들을 걸어둘 공간을 마련했고, 학생들과 다른 작가들의 전시 요청도 들어오게 됐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미술관으로 쓰이게 됐다.
“섬유미술 작품은 전시할 장이 적어요. 작품을 걸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렇게 전시공간을 제공하는 것들이 일종의 서비스가 되고, 제자들의 앞을 열어주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해요. 마가미술관에서는 제자들 전시뿐만 아니라 많은 기획전을 열었는데 작업실이 미술관 역할을 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미술관 이름을 ‘마가’로 지은 것은 미술관이 본격적인 미술관에 비하면 다락방 수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락방 미술관이라고는 할 수 없잖아요. 하하. 그래서 마가의 다락방을 떠올렸죠. 성경에 마가가 소원을 빌던 다락방이 있잖아요. 마가처럼 염원하는 곳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었죠.”
이름에서 소박하고 겸손한 마음이 묻어난다.
학교에 나가는 화요일과 수요일을 제외하고는 그는 마가에서 일상을 보낸다.
“작업장에서 계속 작업하구요. 집 관리도 하구요. 잔디 깎고 청소하고 할 일이 많아요. 작품하고 미술관 관리 하다보면 시간이 모자라요.”
정년 이후 어떤 계획이 있을까.
“세계 무대를 겨냥할 때라는 생각이 들어요. 미국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국제적인 활동을 하려구요. 그동안에는 학교 일로 한국에 있어야 해서 외국 전시를 많이 신경 쓰지 못했는데 작품들을 세계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어요.”
아무래도 이번 전시회가 끝나면 마가미술관에서도 그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딸이 마가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섬유미술과 판화 쪽으로 기획전을 마련하고 운영하는 한편 그는 외국에서 왕성한 전시활동을 할 예정이다.
<글·유성민객원기자 | 사진·김호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