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아원
안미옥
신발을 놓고 가는 곳.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쭈뼛거리는 게 병이라는 걸 알았다. 해가 바뀌어도 겨울은 지나가지 않고.
집마다 형제가 늘어났다. 손잡이를 돌릴 때 창문은 무섭게도 밖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벽을 밀면 골목이 좁아진다. 그렇게 모든 집을 합쳐서 길을 막으면.
푹푹, 빠지는 도랑을 가지고 싶었다. 빠지지 않는 발이 되고 싶었다.
마른 나무로 동굴을 만들고 손뼉으로 만든 붉은 얼굴들 여러 개의 발을 가진 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이상했다. 집을 나간 개가 너무 많고
그 할머니 집 벽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 상자가 많아서
상자 속에서 자고 있으면, 더 많은 상자를 쌓아 올렸다.
쏟아져 내릴 듯이 거울 앞에서
새파란 싹이 나는 감자를 도려냈다. 어깨가 아팠다.
‘불우(不遇)’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이제 이 불우라는 말을 남의 것으로만 알고 산다. ‘살림이나 처지가 딱하고 어려움’이란 사전적 의미를 우린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불우, 하면 불우이웃돕기란 말이 먼저 떠오르는 건 나이 30~40대를 넘긴 모든 이들의 공통된 감정이리라.
그런데 이 나라의 산업화가, 자본의 글로벌화가 정말 저 불우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준 것일까? 불우란 말은 필리핀이나 방글라데시와 같은 나라들에게나 어울리는 이야기가 된 것일까? 행복지수란 게 있다.
한 나라의 국민들 다수가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 나라 정치가 글러먹었기 때문이다.
아이들 밥 먹여주고, 병든 노인 돌봐주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그것은 개인의 노력 여부와 상관없는 국가의 책무이다. 개인의 가난과 불행을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려 하지 않고 단순히 개인 능력의 부재로만 덮어씌우려는 나라일수록 행복지수가 낮게 나타난다.
능력이 없는 사람도 먹고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상위 1%만 밖으로 드러난 빙산을 떠받치는 건 물속에 잠긴 나머지 99% 하층이란 걸 알아야 한다.
아, 그나마 예술가는 ‘싹이 나는 감자’ 같은, 싹둑 도려내 버리고 싶은 불우를 양식으로라도 삼을 수 있으니, 이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