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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을 주는 시 한 편-78|당신|김도언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78

 

당신

                                                     김도언

당신은 지구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의 목소리를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던 사람이 오래 전 죽은 것은 온전히 당신의 불행이다. 매일매일 당신은 무릎 아래에서 올라오는 동생들의 저녁을 돌보고 어머니의 길고 긴 목을 닦아주었다. 오랫동안 배를 타다가 육지로 돌아온 거친 사내들은 당신의 생밤 같은 얼굴을 만지고 싶어 했다. 당신은 그 중 한 사내의 힘줄을 아무도 몰래 끊고 싶었다. 숲 쪽으로 세 번, 바다 쪽으로 두 번 울었던 여름, 당신은 정갈하게 애인과 헤어졌다. 피로 쓴 편지를 주고받은 적 없었으나, 심장에 그어진 파문 때문에 당신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당신은 애인의 허리가 가르쳐준 굴욕을, 손톱을 베어내며 조금씩 떠올렸다. 하얀 종아리를 가진 애인을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 깊어, 마당에 매어둔 자전거들이 말처럼 휭휭 울었다. 당신은 관대한 사람들의 생애가 종종 실패하는 것을 목격했다. 별과 비와 시, 눈을 감아도 너무나 잘 보이는 것들만이 문제였다. 어머니의 배꼽을 베고 눈을 감은 아버지의 싱거운 모험을 생각하기도 했다. 동생들은 더디 자랐고 당신은 오랫동안 당신에 머물렀다.

 

 

아마도, 이 시는 얼마 전 『시인세계』를 통해 시인의 영역으로 망명한 김도언이라는 소설가 이름으로 발표된 처음이자 마지막 시가 될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엊그제 그가 앞으로 시를 발표할 때 황이리라는 필명을 쓰기로 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인지 묻지 마시라. 작가들에게 있어 이름이 갖는 의미는 굉장히 중요하니까. 6권의 소설 및 소설집과 1권의 에세이집을 펴낸 소설가가 어느 날 돌연 시인이 된 것이다. 왜, 그 잘난 소설을 놔두고 밥도 안 되는 시를 쓰고자 하는지도 묻지 마시라.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모든 일들, 사실 우리가 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다 가는 게 인생 아닌가. 번외의 얘기 하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로맹 가리는 유일하게 콩쿠르상(Prix Concourt)을 2번 받은 인물이다. 1956년에 「하늘의 뿌리」로, 1974년엔 에밀 아자르란 필명을 걸고 쓴 「자기 앞의 생」으로 또 한 번. 당시 프랑스 문단은 에밀 아자르란 인물이 누구인지 밝혀내질 못했고, 결국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로맹 가리의 유서를 통해서 에밀 아자르의 실체가 밝혀지게 된다. 이름은, 어쨌든 자신의 주인과 명운을 함께 하는 것이다. 「당신」이라는 시, 한 여자의 일생을 이렇듯 정갈하게 매듭지을 줄 아는 시인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지금 충분히 기쁘고 행복하다. 오늘은 그 동안 잊고 지냈던, 내 이름이 가진 뜻을 아주 오래도록 생각해 봐야겠다.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