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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3 |얼음수도원 1- 피정(避靜) 일기 |고진하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3

얼음수도원 1
- 피정(避靜) 일기

고진하

지난밤 꿈에
남극에 있는 한 수도원을 보았다.

얼음벽돌로 세워진
얼음수도원.
흰곰의 가죽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수도사들은,
얼음십자가상과
얼음성모상 앞에서
성체 조배를 바치고
찬미가를 불렀다.

하얀 콧김과
하얀 입김이 날리며
수도사들의
긴 머리칼과
눈썹과
수염에
고드름이 맺히게 했다.

저녁미사 시간,
수도사들이 바치는
비나리의 뜨거운 숨결이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얼음집을 다 녹였다.
얼음수도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수도사들도 사라졌다.

잠을 깨고 난 뒤, 온종일
사라져버린 얼음수도원을 묵상했다.

무념무상의 설원(雪原)에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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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폭염주의보. 고단했을 당신과 얼음수도원으로 떠나봅니다. 시인은 “지난밤 꿈에” 본 “남극에 있는 한 수도원”으로 우리를 인도하는데요. “흰곰의 가죽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수도사들”은 아니지만, 인간은 ‘삶’을 구도하는 자로서의 수도사 입니다. 부제인 ‘피정’은 일상에서 벗어나 행해지는 종교적 수련을 뜻하지요. 그러나 인간의 수련은 ‘삶’을 벗어나서는 행해지기 어렵습니다. 저마다 주어진 몫에 대해 “찬미가를” 부르며 살아갈 수밖에. “하얀 콧김과/하얀 입김이 날리며/수도사들의/긴 머리칼과/눈썹과/수염에/고드름이 맺히”는 풍경. 어때요, 그 서늘한 기운이 당신 이마에까지 전해지나요. 이어지는 “저녁미사 시간,/수도사들이 바치는/비나리의 뜨거운 숨결이/피어오르더니,/순식간에 얼음집을 다 녹였다.”고 하니, 차가움과 뜨거움은 이렇듯 변주됩니다. 이내 “얼음수도원은/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수도사들도 사라졌다.”는데요. 시인의 마음속 얼음수도원은 꿈속의 그것보다, 훨씬 더 차갑고 훨씬 더 뜨겁지 않겠습니까. “무념무상의 설원”보다는, 끝내 유념유상일 ‘삶’이라는 소슬한 종교에 귀의하고 싶은 게 우리 마음 아닐는지.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