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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4 |가구의 힘 |박형준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4


가구의 힘

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 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ㅡ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의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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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미래를 꿈꾸고 계신가요. 모든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역사가 있습니다. 사물도 마찬가지이지요. 이 가을 시인이 들려주는 ‘가구의 힘’에 귀 기울여보아요. 우연인 듯 필연인 듯 한자리에 모인 이름들이 긴장을 뿜어냅니다. 졸부인 외삼촌과 엄마, ‘나’ 그리고 니체와 왕비까지…. 멀리서 가까이서 고구마순 끊어지는 소리 뚝뚝 들리고요. 죄 없는 한 사람의 살갗만 아파옵니다. 방 안의 사물들은 약속처럼 주인의 손길을 닮아가기 마련인데요. 그중 제일은 ‘가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새로운 나이테가 그려지기 때문이지요. 머리맡 책의 갈피마다 읽는 이의 지문이 새겨지는 것처럼. ‘나’의 생각이 생각들로 이어지는 사이 문득 들려오는 엄마의 음성 ‘밥 먹고 자야지’. 우리는 자주 오해를 이해로 바꾸며 일상을 혹은 일생을 이어나갑니다. 소중한 사람이 미래를 깨우러 올 때까지, 저마다의 이론을 만들어가며 역사를 펼치며.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