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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7 |작은 상자 |바스코 포파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7


작은 상자

바스코 포파


작은 상자에 처음으로 젖니가 나고
짧은 길이와
좁은 넓이와 작은 공허
그리고 그 밖의 여백을 그녀는 가지고 있다

작은 상자는 계속 자란다
그녀의 안에 들어 있던 찬장은
지금 작은 상자 안에 있다

그녀는 커지고 커지고 더 커지며 자라난다
이제 방은 그녀의 안에 들어와 있고
집과 도시와 대지도
이전의 그녀가 알던 세계도 안에 들어와 있었다

작은 상자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간절히 돌아가고 싶어
다시 그녀는 작은 상자가 되었다

이제 작은 상자 속에는
축소된 전 세계가 있다.
당신은 그것을 쉽게 주머니에 넣을 수 있고
쉽게 훔칠 수도 쉽게 잃어버릴 수도 있다

작은 상자를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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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새로운 시편이지요. 포파의 이 시는 테드 휴즈의 시 입문서 ‘시란 무엇인가’의 앞머리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 휴즈의 이 책은 저자가 진행했던 시 수업의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요. 그가 이 작품을 우선적으로 소개한 이유는, 시에 대한 정의와 연관이 깊습니다. 그러나 시는 정의 내려지는 순간, 실루엣이 사라지는 상자와 같겠지요. 우리는 그저 작은 상자에 담긴 목소리를 들어볼까요. 시인은 한 사물을 통해 한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작은 상자에 처음으로 젖니가 나고/짧은 길이와/좁은 넓이와 작은 공허/그리고 그 밖의 여백을 그녀는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작은 상자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간절히 돌아가고 싶어/다시 그녀는 작은 상자가 되”기로 하지요. “이제 작은 상자 속에는/축소된 전 세계가” 자리합니다. 진술로 전개되던 시는 말미에 이르러, 포파 특유의 명령적 어조로의 변주를 들려주고 있어요. “당신은 그것을 쉽게 주머니에 넣을 수 있고/쉽게 훔칠 수도 쉽게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상자를 조심하라”는 비밀의 비밀.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