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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0 |1년 |오 은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0


1년

오은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을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탕을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고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6월은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7월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봅니다
그간 못 쓴 사족이
찬물에 융해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8월은 무던히도 덥습니다
온갖 몹쓸 감정들이
땀으로 액화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살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9월엔 마음을 다잡아보려 하지만,
다 잡아도 마음만은 못 잡겠더군요

10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책은 읽지 않고 있습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밤만 되면 꾸역꾸역 치밀어오릅니다
어제의 밥이, 그제의 욕심이, 그끄제의 생각이라는 것이

12월엔 한숨만 푹푹 내쉽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추위가 매섭습니다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몰라보게
주량이 줄었습니다 그런데도
잔고가 바닥났습니다
지난 1월의 결심이 까마득합니다
다가올 새 1월은 아마 더 까말 겁니다

다시 1월,
올해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1년만큼 더 늙은 내가
또 한 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월에 있을 다섯 번의 일요일을 생각하면
각하(脚下)는 행복합니다

나는 감히 작년을 승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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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잘 맞이하셨는지요. 어느덧 12월입니다. 생각이 많아지는, 많아질 수밖에 없는 나날인데요. 오은 시인이 들려주는 ‘1년’에 귀 기울여 봅니다. 정말이지 1월에는 희망으로 가득 찹니다. 아직 겨울의 끝자락을 잡고 서 있는 2월. 3월에는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것들을 바라보게 되지요. 4월에는 다만 견디는 것으로 지낼 뿐. 그러다가 새삼 정체성 혼란에 빠지게 되는 5월. 6월에는 무상하게 무심하게 꿈꾸고. 7월에는 지난 절기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여름아, 이 열기를 거두어다오 중얼거리게 되는 8월. 9월에는 가을의 도착을 바라보고 서 있게 되지요. 읽어야지 읽어야지, 라는 주문을 외우며 지나가 버리는 10월. 11월에는 치밀어 오르는 것들을 애써 다독입니다. 문득문득 까마득해지는 하루하루의 12월. 그리고 다시 찾아오는 1월.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되는 이치는 명백한데, 우리의 도돌이표는 언제 완성될까요. 아마도 문득 찾아오겠지요. ‘미완성의 완성’이라는 이름으로.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