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을 이제 뭐라 불러야 하나
<연산(燕山)혼차(昏虘)종사장위중의추대(宗社將危衆議推戴)>. 연산은 사리에 어두웠으며 마음이 모질어 나라가 위태롭게 되니 여럿이 의논하여 중종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 글은 중종실록 권1 원년 병인 9월 1일자 첫줄 말미에 있는 기록이다.
실록은 연산군을 일러 폭군이나 암군 용군 혼군이 아닌 혼차라는 단어로 규정짓는다. 어두울혼과 모질차가 합쳐진 단어다. 강호는 박근혜 대통령을 일러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을 뜻하는 혼군(昏君)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크게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그나마도 혼군의 자리에서 지난 3월10일 11시23분을 정점으로 파면이라는 이름으로 쫓겨났다.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이정미 재판관은 탄핵 인용도 탄핵 각하도 탄핵 기각도 아닌 꽤나 완곡한 표현인 “파면” 이라고 똑 부러지게 말했다. 이로써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이 부여해준 5년의 대통령 임기를 못 채우고 청와대를 나와 그가 살던 집으로 갔다. 강호는 그 집을 일러 사저(私邸)라는 표현을 쓰는데 쫓겨난 임금이 돌아간 집에 대한 택호로는 적절치 않다. 문제는 그가 청와대를 나서면서 한 가지를 빼놓고 갔다는 사실이다. 다름 아닌 승복 선언문. 그는 왜 승복 선언문을 쓰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 마음속에 절대로 승복할 수 없는 그 뭔가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종실록 원년 9월2일 기록은 이렇다. 박원종은 유순이 일러 준대로 임금 연산에게 말한다. 인심이 모두 진성에게로 돌아갔다. 사세가 이와 같으니 정전(正殿)을 피하고 옥새를 내 놓으라 하니 왕 연산은 짤막한 승복 선언문을 말한다.
“내 죄가 중대하여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좋을 대로 하거라(答曰我罪重大固知至此願好爲之)” 그러고는 시녀로 하여금 옥새를 내어 준다(卽令侍女出大寶). 조선의 제10대 왕 연산군 이융(李㦕)은 11년 9개월간의 왕 노릇에서 초반 6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천하에 둘도 없는 악인이었지만 권좌를 물러날 때는 쾌도난마보다도 더 명쾌했다. 물론 그에게는 폐위가 됐기에 시호(諡號)가 있을 수 없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못하고 쫓겨났을 때 중(宗)이나 조(祖)가 아닌 군(君)으로 통칭된다.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박근혜씨에게는 전 대통령도 전직 대통령도 적절치 않다면 뭐라 불러야하나. 삼성동 자택으로 금의야행하는 그의 환한 미소 속에서 여인의 한은 오뉴월 서릿발을 본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