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백낙천 서리는 희끗희끗 풀벌레소리 구슬퍼 길에는 사람의 발자취 끊겼구나 홀로이 문밖을 나 들녘을 바라보니 메밀꽃에 달이 밝아 눈이 오듯 하여라 백낙천(백거이 772-846)은 하남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당(盛唐) 시대의 이백과 두보와는 시대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중당(中唐)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이백과 두보에 필적할만한 시인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36세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그는 이 때 이미 저 유명한 「장한가(長恨歌)」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장한가는 현종황제와 양귀비의 비련의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다. 도입부는 ‘임금은 꽃에 취해 나라까지 버릴려고/오래두고 찾았으나 진짜 꽃은 못 얻었지/양가네 집 여자 있어/깊고 깊은 규방에서 남모르게 피었나니/하늘이 준 아름다움과 그 향기는 못 버려 하루아침 임금에게 그 향기 날아갔네’ 그의 또 다른 불후의 시편은「비파행(琵琶行)」이다. 그가 좌천되어 강주사마로 있을 때 배 위에서 비파 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녀는 본래 장안의 창녀였는데 색이 쇠하여 장사치의 아내가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사는 여자였다. 그는 술자리를 마련하고 그녀에게 비파를 타게 했다. 비파의 감동으로 그
처음 황주에 이르러 소동파 홀로 웃네, 평생에 입 때문에 바빴던 것을. 나이 먹어 하는 일이 도리어 황당만 하였으니, 성곽에 굽이치는 양자강 보니 고기맛 좋으리고. 아름다운 대나무밭, 산에 산에 이었으니 죽순 향기 좋으리라. 쫓겨 난 몸, 원외가 되든 어떻든. 시인은 예대로 수조랑*이 되었다네. 오직 부끄러움은, 아무 일에도 쓸모없이 되었어도. 아직 나라에서 술 짜는 자루 지급 중이라. * 소동파가 전에 이 관직에 있었음 소동파(1037-1101)는 사천성 출신이다. 22 세 때 과거험에서 진사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과거시험 위원장이 구양수였다. 그는 구양수의 제자가 되었으며 구양수의 후원으로 문단에 나갔다. 다시 제과에 응시하여 장원이 되었고 산시성의 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관직 생활은 순탄치 않아 두 번의 유배를 겪었다. 그의 문학은 운명에 순종하기 보다는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인간상을 묘사하는데 힘썼다. 따라서 그의 시는 비애나 감상이 나타나지 않으며 오직 의욕에 찬 생활과 역동적인 사회와 개척적인 인간상이 주류를 이룬다. 그가 친구의 시평에서 ‘그대의 글은 마치 구름이 떠나고 물이 흘러가는 듯 처음부터 정해진 바탕이 없다. 그러나 언제고 가야할 곳으
산골의 가을저녁 왕유 비 개인 산 성큼 다가선 가을 밝은 달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맑은 물 돌 위를 흐른다 대나무숲 버석이더니 빨래터 아낙네 돌아오고 연잎 흔들리더니 고깃배 지나누나 흘러간 세월 따라 꽃들은 지고 없지만 풍류 즐기는 젊은이 이 곳에 머물러 봄직도 하이 왕유(699-759)는 산서성 출신으로 상서우승의 벼슬을 지냈다. 다른 시인들과는 다르게 고위관직을 지낸 그의 시에는 불교적 색체가 강해 시불(詩佛)이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산수시인이다. 그는 당대의 대표적인 시인 이백과 두보와 대비된다. 이백처럼 능동적으로 낭만적 기질을 발휘하지도 않았고 두보처럼 정치적 현실이나 사회적 현상을 작품에 반영하지도 않았다. 그는 외부로 부터의 오는 모든 것들을 고즈넉하게 받아들여 이를 내성적으로 심화시켜나갔다. 이를 통해 자기응시와 인간적 고독을 다시 자연에 투사하는 방법으로 시세계를 밀고 갔다. 왕유의 시에 인간에 대한 원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범용한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진지하고 솔직하게 표현한 시풍으로 독자들의 공감과 사랑을 얻고 있다. 그는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남종화의 시조로도 일려져 있다. 「산골의 가을저녁」은 자
가을이여 5 한유 갈래 갈래 공연한 슬픔 걸고 슲고 슲게 빈 걱정 안고 있네. 이슬은 가을 나무 높이 맺히고 벌레는 찬 밤 긺이 슬퍼 우네. 삼가 물러나 새삼 조심하니 악착스레 앞서 날뛰던 일 구슬프네. 소박한데 돌아와서야 편안한 길 느끼고 옛 것을 길으니 긴 두레 줄 잡히네. 이름만 뜬 것 오히려 부끄럽고 세상 맛 엷은 것 정말 스스로 다행이네. 대저 부끄러움도 허물도 잊어버리면 이곳이 바로 은자의 집 되리라. 한유(768-824)는 허난성 난양 출신으로 사상가이며 시인이다. 그는 옛 문물을 숭상하는 상고주의자여서 전통적 윤리사상인 유교를 받들고 중국의 사회조직을 파괴한다고 생각되는 불교와 도교를 맹렬히 반대했다. 이는 그의 문학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옛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야말로 높은 문학정신이라고 생각했다.「가을이여」역시 그의 상고주의가 반영된 작품이다. 첫 연의 이슬과 벌레는 화자의 은유다. 높은 정신을 가졌으나 찬 밤이 길어 슬피 우는 것이다. 둘째 연은 관직에서 물러나 생각하니 악착스럽게 날뛰던 자신이 슬프고 물러나 소박하게 살아가니 마음이 고요해져서 옛 것을 긷는 긴 두레박줄이 잡히듯 학문이 보인다는 것이다. 셋째 연은 이름만 알려진 것이 부끄러울
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나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에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김춘수(1922~2004)는 경남 충무에서 태어났다.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를 거쳐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에 입학 했으나 3학년 때인 1942년 12월, 그는 겨울방학을 맞아 귀향길에 나섰다가 불경죄로 일경에게 체포된다. 요코하마헌병대와 세다가야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다가 7개월 뒤에야 귀국 조치된다. 이 사건으로 니혼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당한다. 1946년에 조향, 김수돈 등과 시 동인지 '낭만파'를 펴내고‘조선청년문학가협회’경남본부에서 발행한 [해방 1주년 기념 사화집]에 시‘애가(哀歌)’등을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에 나선다. 이듬해 자비출판으로 『구름과 장미』를 펴낸다. 김춘수는 꽃의 시인으로 알려졌다. 이때의 꽃은 의미를 불러들이는 형이상학적 존재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의 의도
돌각담 김종삼 다음부터 광막한 지대다. 기울기 시작했다 십자형의 칼이 바로 꽂혔다. 견고하고 자그마했다. 흰 옷포기가 포기어 놓였다. 돌담이 무너졌다 다시 쌓았다. 쌓았다 쌓았다 돌각담이 쌓이고 바람이 자고 틈을 타 동혼(凍昏)이 잦아들었다 김종삼(1921~1984)은 황해도 은율에서 출생했다. 김종문 시인이 형이다.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가 토요시마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도쿄문화학원 문학부에 입학하지만, 작곡을 하고 싶어 음악공부를 했다. 그가 고전음악 마니아가 된 것은 젊은 날의 꿈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사변 전의 유명한 고전음악 감상실이었던 명동의 돌체, 오아시스의 단골이었다. 전쟁이 터지고 돌체가 피난지 부산 역전으로 옮겨진 뒤에도 그곳을 단골로 드나들었다. 돌체는 피난지 부산으로 몰려든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그는 때로 잠 잘 곳이 마땅치 않아 돌체의 홀에서 자기도 했다. 6.25 전란 중이던 1951년『현대예술』에「돌각담」을 발표 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알콜릭이어서 심지어 소주를 훔쳐 마시기도 했다. 수모와 모욕으로 가득 찬 현실의 생활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신성하고 가장 평화로운 것을 추
사랑 김수영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김수영(1921~1968)은 서울 관철동에서 출생했다. 선린상고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1941년 동경상대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1943년 학병징집을 피해 귀국했다. 이듬해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해 길림 제육고 교원으로 일했다. 광복이 되자 귀국해서 연희대 영문과 4학년에 편입했으나 중퇴했다. 1945년『예술부락』에「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49년에는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합동시집『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소시민적 비애와 슬픔을 모더니즘적인 감각으로 펼치다가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현실에 대한 비판과 민중의 삶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참여시로 바뀐다. 김수영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회통하는 자리에 시의 세계를 완성하고 있다. 「사랑」의 화자는 너로 인해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운다. 그러나 너의 얼굴은 불빛이 켜지는 찰나에 꺼졌다
성씨보 오래인 관습-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 오장환 내 성은 오씨.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어 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일청인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숭배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어도 좋다. 해변가으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을랴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오장환(1918-1951)은 충북 보은군 회인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경기도 안성으로 이주하여 안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보를 중퇴한 후 일본에 잠시 유학하기도 했다. 1933년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며 문단 생활을 시작했다. 정지용 시인의 제자이며 백석과 더불어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1948년 2월경 월북하였으나 남로당계로 분류되어 숙청되었다. 「성씨보」는 자신의 족보에 대한 시다. 그는 오씨지만 중국에서 해주로 이주해온 청인
여승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백석(1912-1996)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동경의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34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했으며 1935년 시「정주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그의 향토성 짙은 문장과 시어들이 독창적인 향기를 지녀 많은 시인들이 백석의 시를 닮으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백석은 백석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여승」은 일제 강점기에 비극적 삶을 살아가는 한 여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가난 때문에 가족을 잃고 여승이 되기까지의 고단한 여정과 여승의 비극적 삶을 통한 시대적 현실을 서정적이며 애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민족적 비애를 느끼게 하는
절정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챗죽에 갈겨 마츰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리빨 칼날진 그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꾸러야하나?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깜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 이육사(1904-1944)는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 881번지에서 이가호와 허길의 둘째로 태어났다. 이활이 이육사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29년쯤으로 보인다 대구 감옥에서 출옥하면서 발표된 글에서 ‘대구 264’로 쓴 필명이 보이다가 이육사(李陸史)로 쓰고 있다. 264는 대구 감옥의 수인번호다. 그는 항일투쟁을 위해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난징에서 의열단장 이원봉을 만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했다. 귀국 후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베이징으로 압송된 그는 베이징 주제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구금되었다가 1944년 1월 16일 순국했다. 그의 대표작은 「광야」다. 이 작품은 발표되지 못하다가 해방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 <자유신문>에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절정」은 그의 항일운동의 여정과 맞물려 해석되는 작품이다. 화자가 북방으로 휩쓸려 온 것은 매운 계절의 챗죽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의
푸른 언덕 가으로 홍사용 푸른 언덕 가으로 흐르는 물이 올시다 어둔 밤 밝은 낮 어둡고 밝은 그 그림자에 괴로운 냄새, 슬픈 소리, 쓰린 눈물로 뒤섞여 뒤범벅 같게. 돌아다 보아도 우리 시고을은 어디멘지 꿈마다 맺히는 우리 시고을 집은 어느 메쯤이나 되는지 떠날 제 『가노라』 말도 못 해서 만날 줄만 여기고 기두르는 커다란 집 찬 밤을 어찌 다 날도 새우는지- 지난 일 생각하면 가슴이 뛰놀건만 여위인 이 볼인들 비쳐 낼 줄 있으랴 멀고 멀게 자꾸자꾸 흐르니 속 쓰린 긴 한숨은 그칠 줄도 모르면서 길고길게 어디로 끝끝내 흐르기만 하랴노- 퍼런 풀밭에서 방긋이 웃는 이 계집아해야 무궁화 꺾어 흘리는 그 비밀을 그 비밀을 일러라 귀밑머리 풀기 전에- 홍사용(1900-1947)은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동탄면 석우리, 돌모루)에서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헌병부위 홍철유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화성시 동탄 신도시로 노작홍사용문학관이 있는 곳이다. 1922년 『백조』를 창간했다. 그의 대표작인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1923년 『백조』 3호에 발표되었다. 1923년부터 '토월회'공연의 자금을 조달하고 '토월회'의 문예부장을 맡아 본격적으로 연극 활
칠성판의 고인은 바로 소생이로소이다 고정희 어누 때보다 제 눈빛은 밝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천천히 관속을 응시했습니다 “천고지붕 당했으니 하사말씀 가이없나이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직사각의 칠성판에 누워 있는 건 고인의 시체가 아니라 은빛으로 번쩍이는 ‘거울’이었습니다 그 거울 속에 누워 있는 건 다름 아닌 소생의 상반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소생은 죽었습니다 ......... 무등산 중봉 허리에서 우리는 너나없이 칠성판에 누워버렸습니다 오오 그것은 우리들의 장례 우리들의 거울장이었습니다 (이하 생략) 고정희(1948-1991)는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했다. 1975년 『현대문학』 추천완료로 문단에 나왔다. 그녀는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에 의한 신랄한 비판과 준열한 고발을 해온 시인이다. 1980년대에 그녀는 시를 통해 남녀평등과 여성해방을 부르짖기도 했다. 「칠성판의 고인은 바로 소생이로소이다」는 그녀의 장시집 『초혼제』에서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그 시대의 마지막 선비가 죽어 그의 장례를 치르는 의식으로부터 시가 시작된다. 선비는 민주주의일 수도 있고 자유일 수도 있다. 관속을 응시하던 화자는 칠성판 위에 누워 있는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는 화자 자신이 누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