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수명이 늘어감에 따라 현대의학에서는 심장 및 뇌혈관 질환, 치매, 척추나 관절의 퇴행성 질환 등과 같은 노인성 질환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감에 따라 연구 및 치료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파킨슨병도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으로 전 인구의 0.15%, 65세 이상 인구의 1%를 차지하고 있으며 노인인구의 증가에 따라 발병률 또한 증가하고 있습니다. - 증상 주 증상으로는 3가지가 나타나며 손과 몸의 떨림이 시작되는 진전증, 움직임이 점차 둔해지는 서동증, 근육의 긴장도가 증가되는 경직 또는 강직을 들 수 있습니다. 이외에는 체간 불균형, 보행 장애 등을 보이는 1차 증상이 올 수 있으며 2차 증상으로 우울증, 수면장애, 변비, 언어장애, 연하장애, 어지럼, 구부정한 자세, 치매증상까지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위 증상을 보이기 전 초기 증상으로 무력감, 지침, 피로 등이 나타날 수 있으며 보다 명확한 증상으로는 쉬는 손에 오는 떨림증이 75%를 차지, 대표적인 초기증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말하는 것이 어눌해지거나 목소리 변화가 나타나며 잘 때나 걸을 때 돌아서기(방향을 바꾸기)어려움, 걸을 때 손 흔들림이 사라지는 증상 등을 들 수 있습니
조선시대에 관청의 잘못된 권력남용에 대해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은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문고 인데, 이 북이 대궐 문루에 걸려 있었던 데다가 북을 치기위한 절차과정이 복잡했다. 상징적인 신문고 였지만 이를 아예 없애버린 연산군은 쫓겨났다. 반정에 성공한 중종 때부터 징을 쳐서 왕에게 호소하는 격쟁이 신문고를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알려졌다. 언로를 막았던 연산군을 몰아 낸 중종에 대한 기대감이 격쟁을 만들어 낼을 것이다. 대궐에 들어가 치던 관행은 영정조 시기에는 왕의 궐밖 행사시에 징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백성을 살피려는 군주의 마음을 이용하려는 백성들의 절박함 때문이다. 징을 친 백성이라 해도 왕의 행차를 막았기 때문에 형식적인 처벌을 받았다. 처벌을 감수할 만큼의 억울한 백성의 호소는 들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왕조국가 조선은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가장 억울한 이야기들을 직접 챙겨 들었던 것이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사회 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해법이니, 덕담이니 하며 식사를 하는 행사가 흔하다. 진짜 억울한 국민은, 사회적 약자들은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없다. 당연이 억울한 국민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
요로 결석은 비뇨기과에서 가장 흔한 질환 중의 하나로 전 인구의 5~15%가 이환될 정도로 흔한 질환입니다. 요로 결석이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으나 선천적인 대사 이상, 혹은 후천적 생활 습관 모두에 의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소변에는 누구에게나 결석을 만들 수 있는 성분이 존재하는데 사람마다 선천적, 혹은 후천적 요인에 의해 그러한 성분이 결정화되어 결석이 만들어집니다. 흔히 요로 결석의 원인을 ‘체질’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석은 신장에서 생성 되어 신장 내에 존재할 경우에는 대부분 증상이 없다가 요관 어딘가에 걸리게 되면 극심한 통증이 발생합니다. 즉 결석이 신장에 있거나 방광으로 빠지면 통증이 없지만 그 중간 통로인 요관에 걸릴 경우 증상을 일으키게 됩니다. 대표적인 증상은 옆구리 통증이지만 하복부나 골반, 생식기 통증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위장관계 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에 오심, 구토, 복부 팽만, 소화 불량 같은 증상이 흔히 동반됩니다. 그 밖에 혈뇨, 빈뇨, 절박뇨, 배뇨장애와 같은 하부요로증상이 수반될 수도 있습니다. 간혹 옆구리 통증과 함께 발열, 오한, 근육통 등의 ‘몸살증상’이 생
권력에 취한 연산군과 재물에 눈먼 황희의 아들 황수신을 보라. 자신을 비판하는 사림을 제거하기 위한 조작한 정치 음모였던 무오사화. 왕권에 도전한다고 생각한 훈구파를 몰아내기 급조한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연출한 것이다. 연산군에게 사림과 훈구는 자신의 향략생활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비판세력을 몰아내고 경연을 폐지한 그는 전국에 채홍사와 채청사를 보내 젊은 여성들을 뽑아오게 했다. 또한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원각사를 폐지한 뒤 그곳에 기생(당시에 운평이라 부름)들을 모아놓고 연방원이라 했다. 나라의 운세가 평안해졌고, 아름다운 꽃이 연달아 핀다는 뜻이니 정말 해석이 기가 찰 따름이다. 연방원에서 가무를 익힌 운평들이 수시로 대궐로 들어갔으니 그들을 흥청이라 불렀다. 왕이 운평에 의해 흥겨우면 나라도 흥할 것이라는 의미였다지만 연산군이 쫓겨난 이후에 흥청망청이 흥청과 놀다가 망했다는 사실로 널리 알려졌다. 구중궁궐에서 연산군이 흥청들과 어울려 있을 때, 흥청의 주변 인물들은 권세를 부렸다. 힘없는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행패를 부린 그들에 대한 원망은 왕에 대한 뒷담화로 나타난 것이다. ◆ 세종의 치세기는 영의정 황희의 뛰어난 업무 추진력과
가끔 외국의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준비하는 선물이 있다. 경기관광공사가 DMZ(Demilitarized Zone:비무장지대) 철책선을 보수할 때 버려지는 가시철책을 몇 마디씩 잘게 잘라 고운 액자에 담아 기념품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외국 손님들에게 많은 관심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 민족의 상처와 아픔과 함께 평화와 통일의 염원도 전달할 수 있어 의미 있는 만남의 기념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DMZ은 이제 대립과 분쟁을 넘어 평화와 공존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DMZ는 60년 간 민간인 절대 출입금지구역이었기 때문에 습지와 식생이 그대로 보존되었고 이제는 2710여 종의 다양한 멸종위기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寶庫)이자 생명의 땅이 되었다. 이 때문에 연간 60만명의 외국인이 찾고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 25대 명소로 꼽힌다. 얼마 전 도의회 행정자치위원회는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부지 내에 DMZ 생태관광지원센터 설치계획을 승인했다. 이는 정부에서 계획하고 있는 한반도 생태평화벨트 조성계획의 일환으로 일부 국비지원을 받아 건립되는데 향후 중부권동부권과 이어지는 녹색관광의 거점으로서 서부 DMZ 일원의 생태
▲ 강남병원 정형외과 과장 박훈 발뒤꿈치 통증(족저근막염)으로 고생하시나요? 족저근막이란? 발뒤꿈치 뼈(종골)부터 발바닥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부채꼴 모양의 단단한 섬유막이며 이것이 손상돼 염증이 생기는 질환을 족저근막염이라고 합니다. 족저근막은 발의 아치 유지 및 충격 흡수로 체중이 실린 발을 들어 올리는데 도움을 주는 등 보행 시 발의 역학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무리한 발사용이 염증 발생률을 높여 국내에서는 1% 정도가 족저근막염을 앓고 있습니다. 족저근막염 원인은? 지속적으로 발바닥에 충격을 주는 마라톤 등 운동을 비롯해 높게 점프 후 착지, 장시간 오래 서 있는 직업, 장시간 운동, 갑작스런 많은 양의 운동 등은 물론 체중증가, 폐경기 여성, 굽이 높거나 너무 평평한 신발을 신는 경우를 원인으로 볼 수 있으나 운동량에 상관없이 성별이나 발모양에 따라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족저근막염 증상은? 대부분 급성 외상보다는 점진적으로 증세가 발현됩니다. 족저근막염은 아침에 첫발을 내딛을 때 가장 심하게 통증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몇 발자국 떼고 나면 증세가 경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 수축해 있던 근막이 첫발을 디딜 때 갑자기 팽창하기 때문
삼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시대에도 노비는 단지 말하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성군이라는 세종과 성종, 후기의 태평치세라는 영정조 대에도 노비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귀족과 양반은 오로지 글공부나 하고 국가백년지대계 운운하는 동안 말하는 짐승 들은 노동에 종사하며 주인의 필요에 따라 물건처럼 팔렸다. 양반집이면 누구나 노비를 거느렸고, 상속할 때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398년 7월6일 태조에게 올린 형조의 보고를 보면 무릇 노비의 값은 비싸봐야 오승포 150필에 지나지 않는데 말 값은 4,5백 필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축을 중히 여기고 사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므로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무릇 노비의 값을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나이 15세에서 40살까지는 4백필로 하고 14살 이하와 41살 이상인 자는 3백필로 하여 매매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전쟁 때는 노비 열 명이 말 한 마리 값 -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는 말 한 마리와 노비 열 명을 맞바꿨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말 한 마리 값이 은자 열냥 정도라고 했으니 노비 한명의 값이 은자 한냥에 불과 했던 셈이다. 이처럼 노비는 주인이
태항산협곡 세계의 지붕(世界屋脊)으로 불리는 서남부의 지구상에서 가장 높다는 청장고원(靑藏高原청해 티벳고원)인데 청장고원은 동북방의 곤륜산(昆侖山)과 기련산(祁連山)에서 동으로 대흥안령(大興安嶺)태항산(太行山)무산(巫山)무릉산(武陵山)설봉산(雪峰山)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태항산은 한자어로는 태행산(太行山)이라 쓰는데 읽기는 태항산 이라 읽는다. 이는 산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산이 줄지어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행(行)을 항으로 읽는 것이다. 태항산이란 큰 산들이 한 줄로 길게 줄을 선 산이라는 뜻이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석가장(石家莊)으로 간다. 석가장(石家莊)은 춘추시대에는 위나라에 속했고 전국시대에는 조(趙)나라에 속했고, 조괄이 죽은 곳이기도 하다. 조괄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 사람. 조사(趙奢)의 아들로 마복자(馬服子)라 한다. 그는 병법(兵法)에 관한한 모르는 게 없다. 그런데 그는 공부만 잘하는 헛똑똑이란 사실이다. 조나라 효성왕(孝成王) 6년 진(秦)나라의 반간계(反間計)가 적중해 조괄은 염파(廉頗)대신 장군에 기용된다.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장군의 그릇이 아니라며 임금께 눈물로 간해도 안되자 재상
용인신문의 창간21주년을 용인지역 기업인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창간 이후 용인지역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온 그 발자취는 정도언론이란 단순한 표현 그 이상이 아니었나 생각 합니다. 언제나 현재의 용인과 미래의 용인을 생각하고 힘든 역경을 헤쳐 나온 발자취는 용인역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미래에도 용인의 중심언론으로 흔들림 없이 굳건히 자리매김하길 기원하며 용인의 모든 기업인과 함께 기원합니다.
주폐경기(폐경으로 가는 1년여의 기간) 또는 폐경기에 나타나는 증상들은 많지만 가장 흔한 증상으로는 안면홍조, 발한, 불면증, 전신통이 있다. 불안감이나 우울감, 기억력 감퇴가 나타나기도 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뇨생식기 위축, 질건조증, 성교통, 성욕감퇴, 피부노화 등이 서서히 나타난다. 개인에 따라 불편 없이 생활하기도 하지만 매우 심한 증상으로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기도 한다. 이 경우 호르몬 보조요법을 통한 제 증상의 치료를 시도할 수 있다. 폐경 여성에서 호르몬 요법의 목적은 폐경 후 여성 호르몬 감소로 인한 상기 증상들을 경감시키기 위해 에스트로겐 호르몬 또는 에스트로겐 유사제제를 투여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틀리지만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는 호르몬 보조요법의 효과는 매우 좋은 것으로 발표되고 있으며, 또 주변에서 좋은 효과를 경험한다. 하지만 호르몬 보조요법도 약을 투여하는 과정이므로 투여하면 안 되는 금기증이나 충분한 상담 후 시도해야 하는 위험증이 있다. 폐경 후 여성호르몬 결핍으로 인한 폐경 후 증후군을 호소하는 여성에서만 호르몬 요법의 득과 실을 설명한 후 호르몬요법을 시작할 수 있다. 유방암 또는 자궁내막암이 의심되거나 진단받고 치료중인 자,
광해군 10년(1618) 8월, 반역의 주모자로 몰린 허균은 두 팔과 두 다리 머리와 몸통이 6개 조각으로 찢기는 능지처참을 당했다. 일곱 차례나 관직에서 쫓겨난 앞뒤 사정을 살펴보면 허균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1589년 누이 허난설헌이 죽은 슬픔을 딛고 생원 시험에 합격한 허균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질서가 회복되면서 실시된 1594년의 과거 시험에서 을과로 급제했다. 평소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방탕자라는 비난을 받아 온 탓으로 관직 임용이 늦어졌다. 형의 도움으로 1597년 황해도 도사(종5품, 오늘날의 부도지사)에 임명되었다. 허균은 서울의 기생들을 임지로 데려가 별장을 짓고 데리고 놀았다는 이유로 곧 파면되었다. 해직되어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인 1598년 보란듯이 문과 중시(문과 급제자들을 대상으로 10년마다 시행하던 시험)에 장원 급제해 조정의 중요 문서를 다루는 관리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일년도 못가 방탕한 생활로 다시 해직되었다. 1601년 다시 복직되었으나 2년 만에 양반의 품위를 손상한 자로 탄핵받아 관직을 박탈당했다. 예조 판서가 된 형의 도움으로 1604년 다시 복직되어 황해도 수안 군수와 성균관 전적(교관)을 거쳤다.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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