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언 출신 방송인 김미화씨가 “KBS 내부에 나의 출연을 금지하는 블랙리스트가 있다”고 주장해 일기 시작한 ‘블랙리스트 파문’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KBS 측은 “그런 일 없다”며 강력히 부인한 데 이어 7일 김씨를 상대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한 개인을 상대로 거대 방송사인 KBS가 즉각 반박하고 뉴스시간에 이 내용을 비중있게 보도한데 이어 형사고소까지 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KBS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씨와 비슷한 뉘앙스로 블랙리스트 의혹을 제기한 진보 논객 진중권씨와 시사평론가 유창선씨도 역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밝혔다.
방송가에서 블랙리스트가 문제된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이명박 정부 들어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인사들이 방송에서 퇴출됐다. 희극인 출신 MC 김제동씨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노제와 1주기 추모제 사회를 본 이후 출연하던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뿐만 아니다. 토론 프로그램 사회자로 입지를 굳혔던 정관용씨와 인기가수 윤도현, 김C 등도 석연찮은 이유로 공영방송에서 모습을 감췄다. 영화배우 문성근, 명계남씨도 일부 컬트영화를 제외하곤 캐스팅 되지 않아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이명박 정부와 소위 코드가 다른 행보를 한 인사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블랙리스트 존재여부에 대해 방송사들은 “전혀 아니다”며 펄쩍 뛰고 있다. 실제로 방송사의 주장대로 블랙리스트라는 명시적 문건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송가 일각에서는 이 정부에 비우호적인 인사들을 방송에서 퇴출시키는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할 거라고 믿고 있다.
그 근거로 KBS 김인규 사장이 얼마 전 임원회의에서 김미화씨가 다큐멘터리의 내레이터를 맡은 것을 놓고 부적절하다고 지적했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KBS측은 이 사실 자체를 부인하지만 방송가의 전언을 종합하면 김씨는 서울 종로 기계공구 골목을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내래이션을 맡았는데 이를 본 김 사장이 아랫사람을 질책했다는 것이다. 김 사장의 발언이 알려지자 김씨의 KBS 출연은 앞으로 당분간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이 사태의 파장이 커지자 일부 보수언론은 “상식적으로 블랙리스트가 있겠느냐”며 다만 일부 실무자들이 다소 과잉대응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해프닝 정도로 해석하고 있다. 즉 윗 사람의 눈치를 본 말단선에서 오버했다는 것이다. 이 언론들은 역시 최근 문제가 된 총리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도 일선 직원들의 과잉충성이 문제인 것 같다고 지적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7일자 오피니언면에 실린 <과잉충성은 자해행위다>라는 기자칼럼을 통해 실무자의 과잉충성을 파문의 배경으로 지적했다. 이 신문은 “사실 여부를 떠나 많은 네티즌은 이들의 방송 하차 논란을 놓고 현 정부까지 싸잡아 공격하고 있다. (중략)만의 하나 이들의 정치적 색깔을 이유로 방송사 고위층이 압력을 행사했다면 이는 과잉충성이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이어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공무원들의 비리를 캐는 곳이다. 민간인의 개인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뒤질 정도로 한가한 조직이 아니다.
이런 조직이 나서 은행에 압력을 넣고 경찰에 수사하라는 공문을 보냈다.(중략)이 또한 과잉충성이 빚은 자해행위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 같은 보도에 힘을 얻어서일까? 마침내 여당에서도 같은 지적이 나왔다.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는 7일 “(민간인 사찰 사건은)정신나간 사람이 오버하다가 벌어진 사건”이라고 밝혔다.
이 신문과 김 대표의 지적이 어느 정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기관이건, 기업이건 최고 책임자의 지휘방침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살이 덧붙여져 과잉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특히 이 같은 실정을 군 시절에 대개 체험했다. 부대장의 “군기 빠졌다”는 한마디에 한밤중에 기합과 구타를 당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요즘은 아니라지만 말이다. 때문에 자칫하면 과잉충성을 유발하기 십상인 윗사람은 과잉충성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게 조직관리의 제1원칙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번에 빚어진 모든 사태의 정점에는 청와대로 상징되는 대통령실에 있다. 문제 해결은 간단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나서서 “내 뜻은 그게 아니니 오버하지마라”고 지시하면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