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외교부 특채비리사건을 계기로 각종 고시제도를 포함한 공무원 충원방식 개선움직임이 결국 백지화됐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9일 고위당정회의를 열고 5급 공무원 특채 비율을 50%로 확대하기로 한 방안을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최근 10년간의 평균비율인 37%선의 특채비율은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이는 특채비율을 50%로 확대할 경우 고위공직자 등 특권층의 공직 대물림을 보장하는 ‘현대판 음서제도’가 될 수 있다는 비판 여론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는 이에 앞서 지난달 12일 향후 3~4년에 걸쳐 5급 공무원의 절반을 특채로 선발하겠다고 발표했었다.
당정은 또 현행 행시제도의 명칭을 ‘5급 공개채용 시험’으로 바꾸고, 선발인원은 현행 수준인 260~300명 선을 유지키로 했다. 또한 현재 각 부처별로 이뤄지고 있는 5급 특채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행안부가 내년부터 채용박람회 형식으로 특채를 일괄 실시키로 했다. 구체적인 특채 선발규모와 시기는 정부의 인력수급 상황을 봐서 결정하기로 했다. 특채제도의 명칭도 변경하기로 했다.
정부가 국민여론을 받아들여 특채제도의 확대를 포기한 것은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아쉬움은 남는다. 정부가 당초 특채제도를 확대하려한 의도는 공직사회에 ‘개방과 경쟁시스템’을 도입하겠다는 의욕적인 발상에서 출발했다. 행정고시 등 현행 공무원 충원방식으로는 급속하게 변화하는 정책 환경과 갈수록 다양해지는 사회갈등에 대한 대응과 조정능력이 떨어져 시대흐름에 맞는 공직자를 양성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이 같은 당초 취지는 특채제도를 확대할 경우 채용과정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방식에 대해 국민의 신뢰를 얻는데 실패하면서 벽에 부닥쳤다. 당장 연인원 10만명에 이르는 고시족들에게는 기회의 축소로 인식되는 바람에 이들의 반발이 커졌다. 여기에 유명환 장관 딸의 특채비리 사건이 기름을 끼얹은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특채제도 확대계획을 취소하는 바람에 정부가 원래 특채를 확대하려고 하면서 제시했던 현행 고시제도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남는다는 점이다.
건국과 함께 등장한 고시를 축으로 한 고위공무원 선발제도는 그간 우리나라가 단기간에 획기적으로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맞다. 우리의 고시제도는 일본의 고시제도를 그대로 도입한 것인데 역시 일본의 경제부흥에도 우수한 엘리트 공무원들의 헌신적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얘기다.
1960~70년대 경제개발시대에 일본의 최고 엘리트들은 우리의 과거 재무부에 해당하는 대장성(大藏省)에서 일본부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도 한때 변호사가 될 수 있는 사법고시보다 경제개발의 주역이 되겠다며 굳이 행정고시 재경직을 택한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 경제개발 전선에서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제는 고시라는 폐쇄적 제도를 거쳐 선발된 인재들만으로 한 나라의 행정을 이끌어가게 하기에는 시대가 너무 달라졌다. 학문에도 크로스오버가 있고 융합이 있듯이 정책에도 부처간 경계가 무너지고 있으며 정책환경도 날로 글로벌화하고 있다. 다양한 경력과 시각을 가진 인물들이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개발경제시대의 주역이었던 남덕우, 이승윤 전 부총리등은 고시출신이 아니라 학자출신이었다.
고시족들에게는 돌 맞을 얘기지만 사실 단 한번의 시험에 운 좋게 합격했다고 해서 단번에 5급사무관직에 오른 다음 특별한 하자가 없다면 적어도 중앙부처 국장급인 이사관까지 승진이 보장되는 현행 시스템은 문제가 많다. ‘개천에서 용나게’하는 제도임에는 틀림없지만 고시제도 자체를 폐지하지 않는 한 등용문의 관문은 여전히 존재한다. 필자는 과거 현직 기자시절 부처를 출입하면서 탁월한 업무능력을 지닌 고시출신도 많이 봤지만 “어떻게 저런 인간이 고시를 합격했는지 모르겠다”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인물도 자주 봤다.
고시출신이 정부고위직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그들만의 인너서클’을 만드는 제도는 좀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차제에 대수술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