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졸업을 앞둔 197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겨울 방학 무렵이면 요즘도 그렇겠지만 그 때도 모두들 고교 진학문제가 최대의 화두였다. 단짝 친구가 어느 날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대학에 갈 수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간다니 좋겠다. 난 아무래도 집안이 어려운데다 동생들도 많아 공고를 가기로 했다.”
난 그 친구와 인문계 고교에 함께 진학하기로 다짐하며 제법 열심히 공부해오던 차였다. 그런 나에게 그 친구의 풀죽은 목소리는 매우 충격이었다. 결국 그 친구는 우수한 성적으로 그 지역의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나 몇 년 후, 난 그 친구의 소식을 듣고 또 놀랐다. 그 친구는 공고를 자퇴한 후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을 갔고 이후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었다. 공무원이 된 그는 내게 말했다.
“공고 출신으로 취업해본들 평생 고졸 공돌이 취급을 받는 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공고를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인문계고를 거쳐 서울소재 대학을 졸업한 후 언론사에 취직해 다니던 나에게 그의 말은 우리사회에 만연한 학력차별의 실상을 다소나마 알게해준 셈이었다.
산업은행 등 일부 은행의 고졸 행원 채용 움직임이 은행권 전체로 본격 확산해가고 있다. 전국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은행들은 올해 787명, 내년 939명, 2013년 996명 등 앞으로 3년간 총 2,722명의 고졸 인력을 채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은행권 전체 신규채용 인원의 5.7%에 지나지 않은 고졸 출신 비율을 2013년까지 13.2%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요즘 반값 대학 등록금 문제로 인해 우리사회에 만연한 학력 인플레현상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시점에 은행권이 고졸 채용을 내걸고 나선 것은 비록 때늦긴 했으나 다행이다.
은행권 통계에 따르면 한국 금융사 창구직원 가운데 고졸이하는 26%인 반면, 미국의 경우는 83%라고 한다. 사실 은행 창구직 업무는 단순직이어서 굳이 대졸 이상의 학력이 필요없다.
때문에 과거에 창구직원은 대부분 주산 잘하는 상고 출신이었다. 하지만 1997년 IMF외환위기를 계기로 은행권 채용과정에서 학력구분을 철폐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표면상 이유야 ‘학력구분철폐’였지만 결과는 고졸 취업 쿼터마저 고학력자가 잠식해버리는 엉뚱한 사태를 초래했다. 그러다보니 결국 은행권의 고졸 취업자는 급감했다.
이 같은 현상은 은행권뿐 아니라 공무원은 물론이고 공기업에까지 확산됐다. 공공기관은 재정부의 공공기관 인사운영지침에 따라 학력차별을 전면 금지하고 있어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별도의 학력 제한을 두고 있지 않다.
물론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채용결과는 역시 고학력 인플레이션의 재확인이다. 지난해의 경우 공기업 55곳 중 전문계고 출신은 전체 채용인원 2375명 가운데 겨우 1.1%에 불과했다.
또 지난해 서울시공무원 8ㆍ9급 합격자 415명 가운데 고졸 이하는 단 1명뿐이었다. 이제 박사 은행텔러, 석사 환경미화원 채용은 기사거리도 되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81.9%(2009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56%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이로 인한 사교육비와 대학 등록금 부담은 국민의 가계를 짓누른다. 또한 대졸 청년실업문제도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와중에 나온 은행권의 고졸 채용확대 정책은 가뭄의 단비라 할만하다. 하지만 이는 은행권에서 끝날 일은 아닌 것 같다.
공기업, 공무원 공채는 물론이고 사기업에서도 학력별 쿼터를 두든지 해서라도 전문계고 출신을 많이 뽑아 단순직종에 고학력자가 몰리는 현상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장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저학력자에 대한 사회적 경시현상과 전문대졸 이하의 임금이 대졸이상의 66% 밖에 되지 않는 학력간 임금격차 해소가 먼저 선결돼야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