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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을 주는 시 한 편-65|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박철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65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박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 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꾹쑥꾹 쑥꾹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 속 깊은 곳에서 쑥꾹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살면 살아진다고 해서 삶인가. 한없이 여린 시인이 돈 4만 원 들고 찾아가는 영진설비는 세상의 저 먼 끝에 있다. 끝까지 가야만 끝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시는 목적을 갖지 않는다. 시인은 돈으로 술과 향기를 바꿔 제 마음에 주곤 그저 아이의 눈썹을 바라볼 뿐이다. 가난과 결핵을 앓다 죽기 전 처지를 불쌍히 여긴 친구가 건넨 돈 5엔을 들고 1엔어치 목련꽃과 1엔짜리 화병을 샀다는 이시가와 다쿠보쿠(石川啄木.1886~1912)처럼, 매 순간 순간이 세상의 끝이란 걸 알기에 박철은 한 송이 재스민 향기와 한 글라스의 맥주를 제 마음 속에 바치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들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바보 같은 시인들(박철, 박후기, 박성우)만 남아서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던 지난겨울 그 애절한 밤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날이다.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